84화 하극상 (4)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
그들은 땅바닥에 누워 있다가 슬쩍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서 주춤거리고 있는 부하들이 보였다.
여섯 천두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처리해야겠지?”
“당연하지. 봤으면 죽어야지.”
묘백정과 미백정이 먼저 움직였다.
자신들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병장기들을 보며, 수적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두, 두목님! 어째서……!?”
“내가 무릎 꿇는 것을 봤잖냐. 본 놈이 나쁜 거야.”
그들은 자신들의 추한 모습을 목격했던 부하들을 남김없이 베어 죽였다.
진백정, 오백정, 신백정, 유백정 역시도 질세라 부하들을 학살했다.
자백정과 축백정의 앞에서 비굴하게 누워 있었던 모습이 행여나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윽고, 연회장이 온통 피로 물들었다.
이제 여섯 천두들의 굴욕적인 모습을 목격했던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병장기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안뜰의 상황은 어떻게 될까? 자 사형과 축 사형은 그새 더 강해진 것 같아.”
“뭐야. 그럼 인 사형이 진다는 말이야?”
“무슨! 우리는 봤잖아! 인 사형의 힘을. 그건 도저히 사람의 힘이 아니었다고.”
“아무리 그래도 자 사형이랑 축 사형이 합공을 하는데, 그걸 버틸 재간이 있으려고?”
“맞아. 원래 자 사형이 차기 채주였고 축 사형은 자 사형보다도 강하지만 그냥 서열상으로 양보한다는 느낌이었잖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술 사제나 해 사제처럼 관망할 것을.”
인백정은 강하다.
그렇기에 여섯 천두들은 그의 밑에 붙기를 선택했다.
하지만 자백정과 축백정 역시도 강하다.
원래 장강수로채의 채주와 부채주가 되었어야 할 그들이 합공을 한다면 천하의 그 누가 당해 내랴?
여섯 천두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때, 이들 중 가장 맏이인 묘백정이 말했다.
“까짓거, 뭘 고민해. 이기는 놈한테 붙으면 되지.”
그 말에 다른 천두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저 셋이 싸워서 인 사형이 이기면 그냥 이대로 있으면 돼.”
“만약 자 사형과 축 사형이 이기면?”
“그럼 인백정 놈에게 협박당했다고 하고 싹싹 빌면 되고.”
“맞아. 축 사형은 몰라도 자 사형은 워낙에 인자하니까…….”
“그럼 저 너머에서 누가 살아 나오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행보도 달라지겠군.”
막내 유백정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눈치를 보며 중문 앞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유백정이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도 술 사제처럼 오지 말 걸 그랬소. 그러면 그냥 내 산채에서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을 텐데.”
“아서라. 그랬다간 인 사형이 바로 네놈 산채를 찾아갔을걸?”
신백정이 이죽거렸다.
“차라리 해 사매처럼 스승님의 총애를 독식하지 그랬냐. 그러면 스승님께서 알아서 슬쩍 산채 밖으로 빼돌려 주셨을 건데. 괜히 핏물 안 튀게 말이야.”
바로 그 순간.
…콰쾅!
두꺼운 중문이 활짝 열렸다.
“!?”
여섯 천두들은 화들짝 놀라 목을 양 어깨 사이로 파묻는다.
이윽고, 여섯 명의 시선 앞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아아…….”
진백정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정문의 돌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바로 자백정과 축백정이었다.
갈가리 찢겨진 옷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다.
자백정은 한쪽 팔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축백정은 다리 한 짝이 사라져 외발로 서 있었다.
둘 다 무기가 없는 맨손으로 우뚝 선 채, 입가에서 피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당히 살아서 돌아왔다.
인백정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
‘좆됐다!’
이것이 여섯 대가리를 공통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었다.
천두들은 자백정과 축백정 앞에 납작 엎드렸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대고 있었다.
‘인백정 이 좆같은 새끼! 절대 안 질 것처럼 해 놓고 그새 뒈져 버렸구나! 빌어먹을,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 아니, 애초에 그 괴물 같은 인백정 새끼를 어떻게 죽였지? 아차, 자 사형과 축 사형도 괴물들이었지. 이런 개 같은…….’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것은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사였다.
“이, 이기실 줄 알았습니다 사형!”
이렇게 된 이상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한다.
빌고 또 빌어서 첫째 사형의 넓은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움직여야…….
하지만.
“…….”
“…….”
자백정과 축백정은 아무런 말이 없다.
때로는 침묵이 더 무서운 법이다.
여섯 천두들은 머리를 더욱 깊게 조아리며 바들바들 떨었다.
“역시 사형이십니다! 저희들은 처음부터 사형을 믿고 있었…….”
그때.
끼익……
자백정과 축백정의 몸이 앞으로 조금 움직였다.
“?”
눈치 빠른 묘백정이 이변을 눈치챘다.
자백정과 축백정은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발을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마치 교수형 당한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허공에 약간 뜬 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형이라는 게 나를 뜻하는 것이렷다?”
만신창이가 된 자백정과 축백정의 뒤에서 검붉은 그림자 하나가 일렁인다.
“헉!?”
여섯 천두들은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인백정. 그가 두 팔을 뻗어 자백정과 축백정의 뒷목을 움켜잡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인백정의 상태 역시도 별로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걸레짝이 된 옷 너머, 흰 피부에 이리저리 새겨진 붉은 흉터들.
얼굴과 두 팔은 온통 피범벅이 되어 있었고 심지어 오른쪽 눈은 터져 나가서 시커먼 구멍만이 뚫려 있는 상태였다.
…툭!
인백정은 손에 쥐고 있던 두 구의 시체를 돌계단 아래로 내던졌다.
자백정과 축백정의 몸은 썩은 나무토막처럼 굴러떨어져 흙바닥에 내팽개쳐진다.
인백정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다 버려라. 들개들이나 뜯어먹게.”
단지 그뿐이었다.
치열한 사투의 끝, 뒤집힌 서열, 깨져 버린 손등꿰기의 맹세에 대한 소감은.
“…….”
“…….”
“…….”
“…….”
“…….”
“…….”
여섯 천두들은 황망한 표정으로 자백정 서우학과 축백정 우철우의 시신을 수습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토록 강해 보였던 사형들이 지금은 차디찬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걸레짝이 된 주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흥.”
인백정은 사제들이 사형들의 시체를 치우는 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나는 내상을 회복해야겠다. 너희들은 호법을 서고 있거라.”
그 말을 끝으로, 인백정은 다시 중문을 닫아걸었다.
…쾅!
밤하늘에는 여전히 살성(殺星) 하나만이 홀로 떠 불길한 적빛을 뿌리고 있었다.
* * *
안채 깊숙한 곳.
인백정은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근 채 운기조식을 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츠……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목욕물을 붉게 물들인다.
물 위를 떠다니던 꽃잎들은 검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가루로 변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인백정은 붕대로 감은 자신의 오른쪽 눈을 꾹 눌렀다.
“큭큭큭큭…… 과연 대단하군. 자 사형, 축 사형. 예전의 나였다면 감히 이빨도 못 드러냈을 것이야.”
약 삼천여 합을 주고받은 끝에, 인백정은 자백정과 축백정을 죽일 수 있었다.
그 대가로 오른쪽 눈을 잃고 몸에도 수많은 흉터들이 생겨났지만.
“그 둘을 죽이는 데에 이 정도라면 싸게 먹혔지. 무엇보다…….”
인백정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는 자신의 심상세계 속을 들여다보았다.
단전 깊숙한 곳, 내력들이 흘러가 고이는 늪 속에서 무언가가 우글거린다.
창귀(倀鬼). 지금껏 인백정에게 죽은 수많은 이들이 혈액의 늪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마공 창귀칭. 인백정은 그것을 익히고 있었다.
“두 사형을 제 휘하로 거둘 수 있게 되었으니, 이거 아주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입니다.”
인백정은 단전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곳에는 수많은 창귀들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창귀가 있었다.
자백정 서우학, 축백정 우철우.
두 천두가 피눈물을 흘리며 울부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이에는 또 하나의 창귀가 보인다.
거정(巨丁) 공제환. 한때 장강수로채의 채주였던 남자였다.
인백정은 창귀로 변한 스승을 보며 미소 지었다.
“스승님. 당신을 잡기 위해 참으로 노력했습니다.”
스승은 말이 없다.
그저 피눈물을 흘리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뿐.
인백정은 재차 말을 이었다.
“당신이 노환으로 쓰러지지 않았다면, 치매에 걸려 주의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았다면 제가 당신을 독살할 기회도 없었겠지요.”
이 말을 들었을 때 자백정과 축백정은 미친 듯이 분노했었다.
그들이 평정심을 잃어버렸기에 인백정은 가까스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고 말이다.
“스승님은 항상 사형들을 아끼셨지요. 차기 채주는 자 사형으로 일찌감치 정해 놓으셨다면서, 제게는 늘 서운해 말라고만 하셨고 말입니다. 큭큭큭- 하지만 이제 형편이 이렇게 되었군요. 여러모로 참 유감입니다.”
인백정은 말을 마치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때, 공제환의 창귀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노려본다.
“…….”
그 눈빛을 본 인백정의 이마에서 물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주룩 흘러내렸다.
“스승님. 당신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게 노려본다고 해도 저는 겁먹지 않습니다. 예전, 당신의 셋째 제자로 있던 시절의 제가 아니니까요.”
인백정은 눈을 떴다.
그리고 심상세계에 갇혀 있는 창귀들의 아우성으로부터 귀를 닫아 버렸다.
‘이제 더는 천살성의 팔자를 외면할 이유도 없다. 같잖은 의적 놀이도 집어치우는 편이 낫다. 도적은 도적대로, 사람은 팔자대로 사는 것이 곧 순리일 테니까.’
인백정의 주변으로 물거품이 피어오른다.
부글부글부글부글……
핏물처럼 걸쭉하게 끓어오르는 목욕물은 이내 붉은 증기로 변해 넘실거리고 있었다.
“스승, 그리고 두 사형을 완전하게 소화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초절정의 벽을 넘어갈 수 있다. 그때 비로소 나는 진정한 장강의 주인이 되는 거야.”
순간, 인백정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승과의 대담을 마치고 상심해 있던 자신을 찾아왔던 정체불명의 방문객.
검붉은 죽립 아래로 보이던 시체 같은 낯빛.
불길하게 이글거리던 눈빛을 가진 그 노인이 전해 주었던 무공 몇 구결.
그로 인해 서열 삼 위의 인백정은 채주가 될 정도의 무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홍공(洪公).”
인백정은 자신의 또 다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올(彛兀)의 단계를 대성하고 나면 찾아오라고 했었지. 파촉설산(巴蜀雪山)의 ‘나락’으로 말이야.’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목욕물은 모두 증발하고 사라진 뒤다.
인백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잃어버린 오른쪽 눈을 제외한 모든 상처들은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아물어 있었다.
“장강을 완전히 접수하게 되면 부하들을 보내 봐야겠군.”
물론 좋은 목적의 접선은 아니다.
인백정은 비릿한 미소를 띤 채 겉옷을 걸쳤다.
그가 막 욕실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콰쾅!
멀리서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
인백정은 들썩거리는 창틀 너머의 어둠을 돌아보았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 소리, 바람을 타고 불어오는 피 냄새.
인백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형들이 끌고 왔던 잔당들이 아직 남아 있었나 보군.’
저 정도는 휘하로 거둔 일곱 천두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인백정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리고 흡수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백정과 축백정의 창귀를 복속시키기 위한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콰쾅! …콰쾅! 펑!
그러는 동안 창밖의 소란은 점점 더 크고 가까워지고 있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