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하극상 (3)
밤하늘에는 아무것도 없다.
달도 별도 구름도, 모든 것들이 두려움에 떨며 자취를 감추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고 말이다.
붉은 별.
홀로 뜬 혈성(血星).
밤하늘의 정중앙에서 시뻘겋게 타오르는 별 하나가 형형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흰 장포에 흑립을 쓴 자백정 서우학이 침음을 삼켰다.
“천살성의 기운이 한층 더 강대해졌구나. 지난밤 별점에선 보이지 않았던 일인데. 이해하지 못할 변고로다.”
투구와 갑옷을 입은 축백정 우철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의 별점마저 비틀어 버릴 정도면 인 사제가 준비를 많이 했나 봅니다.”
“하긴. 하극상을 일으켜 채주직을 강탈할 정도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자백정이 장검을 빼 들며 웃었다.
축백정 역시도 육십이 근이나 나가는 육중한 월아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두 사형의 앞으로 여러 명의 천두들이 내려섰다.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
토끼, 용, 말, 양, 원숭이, 닭이 쥐와 소를 마주한다.
진백정이 입을 열었다.
“사형들 오셨소?”
“불렀으니 왔지. 우리가 어디 못 올 데 왔느냐?”
자백정의 말에 묘백정이 미간을 찡그렸다.
“사형. 오랜만에 뵈었는데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는 좀 별로네요.”
“나는 네가 전혀 불편하지 않다, 사매. 만약 네가 나를 대하기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네 태도가 변해서 그렇겠지.”
축백정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오백정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사(巳) 사제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가. 그 조용한 녀석도 인 사제를 돕기로 했나 보군. 의외야.”
“사실상 사형들 두 분만 아니시면 모두가 인 사형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계속 이렇게 분열을 야기하실 겁니까?”
“분열이라니? 우리가 뭘 했다고. 허허허- 그런데 술 사제와 해 사매가 안 보이는구나? 그 둘은 어디 있느냐?”
자백정의 말에 천두들은 하나같이들 입을 다문다.
축백정이 웃었다.
“모두가 스승님께 등을 돌린 것은 아니로군. 하기야, 술 사제와 해 사매는 기개 있는 인간들이지. 네놈들과 달리 말이야.”
그 말에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리 사형들이라고 해도 더는 용납하기가 힘들어요.”
“투항하시오. 그렇다면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인 사형께 잘 말해 주겠소.”
“우리는 여섯이야.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사 사제까지 합치면 일곱이지.”
“거기에 인 사형도 있어요. 인 사형의 무공은 단연코 최강이지요.”
“거, 웬만하면 좋게 좋게 갑시다. 나도 사형들과 싸우기 싫소.”
“막내로 하여금 패륜을 저지르게 하지 마십시다.”
하지만 자백정의 대답은 짧았다.
“다들, 손등꿰기의 맹세를 잊었는가?”
그 말이 나오자 여섯 천두들의 입이 거짓말처럼 다물렸다.
손등꿰기의 맹세. 그것은 장강수로채의 열두 천두들의 서열을 정했던 과거의 의식이었다.
막내가 손바닥을 사발 위에 올린다.
그다음 막내가 손바닥을 그 위에 올린다.
그다음 막내가 손바닥을 그 위에 위에 올린다.
그다음 막내가 손바닥을 그 위에 위에 위에 올린다.
이렇게 해서 제일 위에는 맏이의 손바닥이 올라간다.
다음. 긴 송곳 한 자루가 열두 개의 손바닥을 단숨에 꿰뚫어 관통한다.
송곳을 빼내고 나면 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제일 위의 피가 흘러내려 아래 손바닥의 구멍을 지나 더 아래 손바닥의 구멍을 지나 더 아래 손바닥의 구멍을 지나 결국에는 맨 밑에 있는 사발에 고인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린 핏물은 아래의 구멍을 지나며 더욱 더 진하고 붉은 피가 되어 사발에 섞이고, 열두 개 구멍의 주인들은 그 사발에 담긴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 바로 손등꿰기의 맹세 의식이었다.
가장 위에 있는 이의 피가 아래에 섞이고, 또 그 아래에 섞이고, 또 그 아래에 섞이고, 이렇게 해서 피에 새겨진 순서.
그것이 바로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십이지 서열이다.
자백정과 축백정은 자신의 왼손을 들어 올렸다.
손등에는 송곳에 의해 뚫렸다가 아문 흉터가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
“…….”
“…….”
“…….”
“…….”
“…….”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 역시도 자신들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서열 맹세 당시를 떠올리게 하는 흉터의 흔적이 뚜렷했다.
자백정이 말했다.
“사제, 사매들은 부끄러움을 알고 물러나라. 그리고 스승님의 안부와 위치를 말해 다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두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다만.
“사형들. 이해해 주시오. 스승님의 철학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 이것이 마땅한 흐름이오. 도적은 도적다워야지.”
진백정을 필두로 전투 준비를 할 뿐이었다.
자백정과 축백정의 표정도 굳었다.
결국에는 문답(問答)이 무용(無用)한 일이었다.
“하-앗!”
여섯 명의 천두들이 제각기 자리를 박찼다.
묘백정은 쌍검을 들고 몸을 풍차처럼 돌리며 사나운 검풍을 일으켰다.
진백정은 커다란 철퇴를 휘두르며 눈앞의 모든 것들을 깨부술 듯 돌진했다.
오백정은 한 자루의 긴 장창으로 눈부신 창술을 선보였다.
미백정은 사슬낫을 휘두르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토막 내 버렸다.
신백정은 심후한 내력이 담긴 쌍장을 내질렀다.
유백정은 한 자루의 긴 장검을 휘두르며 기묘한 곡선을 그려냈다.
여섯 절정고수들의 합공이 펼쳐지자 천지가 뒤집어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렇게 사제들과 노는 것도 오랜만이군.”
“그간 격조했습니다, 사형.”
자백정과 축백정은 태연한 기색이었다.
이윽고, 자백정의 장검과 축백정의 월아산이 각자 시퍼런 강기를 머금었다.
…번쩍!
여덟 개의 공격이 한 곳에서 엉켜들었다.
환한 빛무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공방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쩌-엉! 쩡! 쩌저저저적!
자백정의 장검은 묘백정의 쌍검, 진백정의 철퇴, 오백정의 장창을 눈 깜짝할 사이에 튕겨 냈고 찰나의 틈을 비틀고 들어갔다.
축백정의 월아산은 미백정의 사슬낫, 신백정의 두 손바닥, 유백정의 장검을 힘으로 짓눌러 버렸다.
…퍼퍼퍼퍼펑!
여섯 천두들은 자신들의 내력이 갈가리 찢겨 나가는 것도 모자라 단전까지 치고 들어오는 충격에 놀라 뒤로 나자빠졌다.
그 앞으로 검을 빗겨 든 자백정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대로 앉아 있거라. 사제들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여섯 명의 천두는 대답할 말이 없어 그저 멍한 표정만 짓고 있을 뿐이다.
그 앞으로 축백정이 지나가며 한 말을 보탰다.
“방금의 일격에서 자 사형은 실력의 일 할도 내지 않으셨다.”
“……!”
묘백정,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자신들의 무기는 이미 산산조각 났고 기혈 역시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다.
심지어 무기를 들었으니 망정이지, 맨손으로 싸웠던 신백정은 아예 두 손이 피투성이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마당에 자백정과 축백정은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실력의 일 할도 다하지 않았다니.
여섯 천두들의 표정에 불안감이 스쳤다.
“…….”
“…….”
“…….”
“…….”
“…….”
“…….”
차기 채주로 일찌감치 낙점되어 있던 자백정, 그리고 자백정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축백정이 아닌가.
전 채주 공제환 역시도 이 두 수제자가 버티고 있는 한 장강수로채는 끄떡없을 것이라 든든해했었다.
이런 마당에서 인백정의 편을 계속 드는 것이 맞을까?
여섯 천두들 입장에서도 이 점이 계속 못내 찜찜한 것이었다.
결국.
…풀썩!
묘백정이 자리에 주저앉은 채 그대로 뻗어 버렸다.
의식은 있지만 일어서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진백정, 오백정, 미백정, 신백정, 유백정이 차례대로 드러누웠다.
자백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잘 생각했다. 방금의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야.”
이윽고, 자백정과 축백정은 여섯 천두들의 앞을 지나쳐 누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끼기기기긱……
두꺼운 중문이 열리며 안쪽에 있던 수적들이 머리를 조아린다.
자백정과 축백정은 안뜰로 접어들었다.
“어서들 오시오.”
구층 누각의 꼭대기에서 인백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백정 가정맹. 그가 해사하게 웃으며 난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백정이 물었다.
“인 사제. 나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있으니 불렀겠지요.”
인백정의 태연한 대답에 축백정의 눈꼬리가 사납게 찢어졌다.
“이놈! 스승님은 어디 계시냐! 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게야!”
“후후후후-”
인백정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을 뿐이다.
자백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검을 내려놓고 타이르듯 말했다.
“맹아.”
“…….”
“네 오성이 뛰어나고 자질이 비범하다는 것은 내 잘 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
“분명 옛날에는 착한 사제였거늘, 지금은 왜 이렇게 변했느냐? 너 역시도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지 않았더냐. 천살성의 팔자를 타고났다고 해서 그에 끌려다니기만 하라는 법은 없다고. 반드시 운명을 바꿀 것이라고 네 스스로…….”
하지만 자백정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인백정이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기 때문이다.
“쥐새끼 같은 소리는 그만 들읍시다. 이제 피차 충고할 사이도 아니지 않소.”
“이놈! 어딜 사형에게 버릇없이!”
“축 사형도 그만 짖어 대시오. 귀가 따갑소.”
인백정이 난간 위로 올라섰다.
순간.
“……!”
“……!”
자백정과 축백정은 보았다.
밤하늘의 붉은 별이 더더욱 섬뜩하게 빛나는 것을.
이윽고.
츠츠츠츠츠츠츠……
인백정의 몸 주위로 붉은 기운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주변에서 기분 나쁜 웃음소리들이 들려온다.
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히-
자백정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철우야. 들었느냐?”
“예, 사형. 틀림없이 들었소.”
“스승님의 웃음소리셨지?”
“분명했소.”
자백정과 축백정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인백정을 바라보았다.
인백정이 미소 지었다.
“어찌하여 내가 내공을 끌어올릴 때 스승님의 웃음소리가 나는지, 궁금하오 사형들?”
그의 몸에서는 피를 끓여서 만들어 내는 것 같은 붉은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압도적인 불길함 앞에 자백정과 축백정이 무기를 들었다.
“처음 느껴 보는 내력이로다. 예전에 포달랍궁의 무인들과 겨뤄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보다도 훨씬 더 이질적이구나.”
“나는 해동(海東)에서 저것과 비슷한 사술(邪術)들을 견식했던 적이 있었소.”
자백정의 장검과 축백정의 월아산이 인백정의 기세를 앞두고 징징 울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인백정이 누각에서 펄쩍 뛰어내려 바닥으로 내려섰다.
구층에서 뛰어내렸음에도 불구하고 흙바닥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흙먼지조차 한 점 일지 않는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며, 자백정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어디서 요상한 세외마공(世外魔工)을 배워 왔어.”
“사형. 나는 처음부터 전력으로 가겠소. 저 마공이 해동에서 건너온 것이라면……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소.”
자백정과 축백정이 자세를 잡았다.
인백정의 표정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스르릉-
그는 허리춤에서 한 자루의 긴 칼을 빼 들었다.
칼날이 기이하리만치 휘어져 있는 만곡도(蠻曲刀)였다.
“한꺼번에 오시오, 사형들.”
자(子)와 축(丑), 그리고 인(寅).
장강수로채의 첫째, 둘째가 셋째를 합공하고 있는 기묘한 형국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