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하극상 (2)
인채(寅砦).
장강수로채의 세 번째 산채로 높고 험준한 봉우리 위에 목책과 돌을 쌓아 만든 천혜 요새이다.
지금 이곳에는 마상격구(馬上擊毬) 대회가 한창 뜨겁게 벌어지고 있었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탄 장정들이 장시(杖匙)라는 이름의 긴 나무막대기를 휘두른다.
…따악!
그들은 장시를 뻗어 나무로 된 공을 후려쳤고, 그것을 이백오십 보 너머에 있는 상대편의 구문(毬門)에 집어넣기 위해 치열하게 겨루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격구 선수들 중, 단연코 눈에 띄는 한 사내가 있었다.
“비켜라! 잡졸들아!”
얼굴에 털이 많고 두 팔이 기괴하리만치 긴 장신의 남자.
그는 적들을 뚫고 단기필마로 내달려 구문 바로 앞까지 질주했다.
신백정 원이후(元二猴).
유독 긴 그의 팔에 장시가 들리니 공이 예측할 수 없는 거리에서 움직인다.
상대편의 선수들은 그를 막지 못해서 계속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
“원숭이 사형 혼자만 주목받게 할 수는 없지.”
신백정의 앞으로 또 다른 사내가 나타났다.
눈빛이 사납고 머리털이 위로 삐죽삐죽 솟아나 있는 남자가 장시를 들고 신백정의 앞을 막아섰다.
유백정 늑(肋). 그가 눈을 싸움닭 같이 부라리며 신백정과 공을 다툰다.
“야 이 투계 같은 놈아! 공을 쳐야지 왜 나를 치려 하느냐!?”
“사형이 자꾸 원숭이처럼 샥샥 피해 다니니까 이러는 것 아뇨!”
신백정과 유백정은 장시를 이용해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사실 이쯤 되면 격구가 아니라 숫제 창봉술 비무에 가깝다.
바로 그때.
“어허- 정작 공이 놀고 있지 않으냐? 그럼 쓰나.”
신백정과 유백정 사이에 있는 공을 귀신같이 낚아채 가는 이가 있었다.
갈색 피부에 긴 장발을 휘날리며 말을 모는 사내.
오백정 마맹(馬孟)이 어느새인가 공을 빼앗아 달린다.
그는 장강수로채의 천두들 중 가장 마상격구를 잘하기로 소문난 사내였다.
“이런! 정작 공을 뺏기면 의미가 없지.”
“사형! 치사하우! 공 다시 주슈!”
신백정과 유백정은 부리나케 오백정의 뒤를 쫓아간다.
하지만 오백정은 거의 신기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기마술로 두 천두를 따돌리며 적진의 구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때, 오백정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안 되지.”
붉은 얼굴에 두 갈래의 긴 수염을 기른 거한.
마치 관운장 두 명이 붙어 있는 듯한 풍채다.
그를 본 오백정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진 사형.”
그가 바로 진백정 강교(姜蛟)였다.
지금 마상격구를 위해 모여든 이들 중에 무공이 가장 고강한 천두이기도 했다.
오백정은 이를 악물고 장시를 놀렸다.
“비무에서는 져도 격구로는 안 지오.”
“……음!”
진백정 역시도 내력이 실린 장시를 뻗어 오백정의 공을 노린다.
따-악!
힘과 힘, 두 천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팽팽하게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거기에 각각 신백정과 유백정 역시도 끼어들었다.
“내공 싸움이라면 나도 자신 있다!”
“싸움은 기술로 하는 거라고!”
용, 말, 원숭이, 닭이 서로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네 개의 장시가 실타래처럼 뒤엉키며 복잡하게 꼬여 간다.
한편,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여인네들이 있었다.
“……하여튼 사내들이란. 저런 쓸닥다리도 없는 공놀이가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쯧쯧-”
“그러게 말이야. 괜히 헛힘 쓰는 데에는 도사들이지. 저런 데서 땀 흘릴 바에는 내 산채에 와서 수금이나 좀 돌아 줄 것이지.”
깡마른 몸에 난초 문신을 새긴 여인과 굵은 통뼈를 자랑하는 거구의 여인 둘이 나란히 앉아 있다.
신경질적으로 생긴 작은 여인이 묘백정으로 불리는 모아(牟娥), 펑퍼짐한 털가죽 외투를 걸치고 있는 거구의 여인이 미백정으로 불리는 양앙녀(良鴦女)였다.
묘백정과 미백정은 멀리서 싸우는 사내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런 땀내 나는 풍경을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말이야.”
“진 사형과 오 사형만 신났어 아주. 어휴, 저 원숭이랑 닭 놈도 깩깩거리면서 아주 살판이 났네.”
“쩝- 스승님 계실 적에는 경기가 저렇게 따분하게 길어지지도 않았는데.”
“맞지 맞지. 스승님은 항상 순식간에 끝내 버리셨으니…… 헉!?”
순간, 그녀들의 대화가 뚝 멎었다.
지겹다는 듯 구겨져 있던 그녀들의 표정이 싹 펴졌다.
동시에 계절감 없는 땀방울들이 이마에서 주룩주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두 여인네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승님 이야기는 금지라고 했잖아, 사매들.”
묘백정과 미백정, 두 여자의 어깨를 짚는 손이 있었다.
하얗고 고운 손.
그 손의 주인은 역시나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여자라고 생각될 정도로 곱상한 얼굴.
하지만 곰처럼 떡 벌어진 어깨와 늑대처럼 날렵한 허리, 상체와 하체를 모두 덮고 있는 호랑이 가죽은 그의 남성성을 한층 더 부각시킨다.
묘백정과 미백정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 죄송해요 사형…… 제, 제, 제가 그만 실언을…….”
“그, 그…… 하, 하려고 했던 게 아니옵고…… 그만 깜빡…….”
하지만 걱정과 달리, 남자는 온화한 미소로 그녀들을 다독였다.
“알았으면 됐다. 앞으로는 조심해 다오, 사매들.”
동시에, 그는 묘백정과 미백정의 사이를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도중에 말 한 마리를 잡아 탄 그는 그대로 마상격구 시합장 중앙으로 달려간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공을 두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네 천두들이 고개를 돌렸다.
“!”
“!”
“!”
“!”
진백정, 오백정, 신백정, 유백정.
네 천두들의 앞으로 장시 하나가 휘둘러졌다.
“큭!?”
진백정이 제일 먼저 반응을 보였다.
우지끈!
그의 장시가 부러져 나가며, 말의 다리가 꼬인다.
진백정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다음은 오백정이었다.
“어헉!?”
오백정은 자신을 짓누르는 내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곤두박질쳤다.
우당탕!
결국 오백정 역시도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신세가 되었다.
“헉!”
“흐익!?”
신백정과 유백정은 일찌감치 대항을 포기한 채 말머리를 뒤로 돌렸다.
사 대 일의 전투가 싱겁게도 끝나 버렸다.
순식간에 제압당해 버린 네 천두.
하지만 지켜보던 수적들 중 그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일인 양 고개를 주억거릴 따름.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네 천두들의 앞으로 아름다운 미색의 사내가 말을 몰아 왔다.
“이거 사제들 노는 데 끼어들어서 미안하게 됐구나.”
태연하게 장시를 뻗어 공을 차는 그가 바로 인백정 가정맹(苛政猛), 장강수로채의 차기 채주였다.
“이거, 인 사형은 도저히 못 당하겠습니다.”
마상격구를 가장 잘하는 오백정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었다.
그를 내려다보던 인백정 역시도 싱긋 웃었다.
흰 이마 위로 단아하게 쓴 유건(儒巾).
그 아래로 휘어진 눈꼬리에 붉은 기가 맴돈다.
그 아름답고도 퇴폐적인 시선에는 저 멀리서 지켜보던 묘백정과 미백정도 가슴을 누를 정도였다.
“……역시 인 사형의 미모는 알아줘야 해.”
“사내가 어찌 저리 아름답담. 여리여리해서 꼭 백면서생 같잖아.”
하지만 인백정은 이 산채의 주인이자 현시점 장강수로채의 최강자이다.
어찌 서열 삼 위에 불과하던 그가 이렇게 단시간 내에 급부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애초부터 그보다 서열이 낮고 무공이 약했던 다른 천두들로서는 그냥 그러려니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한편, 인백정은 눈앞에 있는 토끼, 용, 말, 양, 원숭이, 닭 사제들을 쭉 돌아보며 말했다.
“사(巳) 사제는 어디에 있느냐?”
그러자 뒤에서 전음(傳音)이 들려왔다.
‘나는 여기에 있소, 인 사형.’
“그렇구나. 또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느냐?”
‘살수(殺手)에게 밝고 시끄러운 곳은 부담스럽소이다.’
“그래. 알겠다.”
인백정은 저 멀리 누각 아래의 그림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백정 당삼랑(唐三郞).
자신의 둘째 사제가 저기 어딘가에 숨어 있다.
이로서 사제들이 모두 모인 셈이다.
“……두 놈을 제외하면 말이지.”
인백정은 턱을 쓸었다.
술백정 견술, 그리고 해백정 적향.
이 둘만은 자신의 소집령에 응하지 않았다.
첫째 자백정과 둘째 축백정은 둘 다 배분이 자신보다 높은 사형이니 그렇다고 쳐도, 가장 아래 서열의 둘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뭐. 곧 얼굴 보고 얘기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
인백정은 피식 웃으며 장시를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막사 주변에 있는 부하들을 향해 말했다.
“사제들이 시장하겠다. 어서 식사 준비를 해라.”
누구의 분부라고 지체할까, 수적들은 분주하게 연회 준비를 시작했다.
천두들이 마상격구를 하는 동안 이미 연회장은 거의 다 완성되어 있었다.
커다란 누각 중앙에 마련된 대연회석은 인백정과 나머지 일곱 천두들은 물론 그들이 이끌고 온 수백 명의 수적들까지 너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서서히 음식들이 날라져 온다.
산봉우리 아래의 마을 곳곳에서 납치해 온 숙수들이 죽어라고 요리한 진미들이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연와(燕窝)찜, 교룡의 지느러미로 만든 어시(魚翅), 애저(哀猪) 구이, 촉새 술찜, 오리 발바닥 볶음, 자라탕, 곰 발바닥 꿀절임, 잉어 회, 박쥐 튀김, 원숭이 생골, 송로버섯과 말린 전복, 해삼을 섞어 무친 산해진미들이 줄지어 깔렸다.
가려 뽑은 기녀들이 노래를 불렀고 마찬가지로, 가려 뽑은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했다.
인, 묘, 진, 사, 오, 미, 신, 유.
인백정을 필두로 한 여덟 사형제들은 그렇게 먹고 마시며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바로 그때.
“채주님!”
인채의 한 수적이 다급한 어조로 인백정을 찾았다.
“뭐냐?”
인백정은 느른한 어조로 물었다.
그는 자신을 채주라고 칭한 부하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형제들 역시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초, 초청하지 않은 객들이 왔습니다요.”
이어지는 부하의 보고에 모든 이들의 표정이 급변한다.
묘, 진, 사, 오, 미, 신, 유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동시에 인백정의 입꼬리가 비죽 말려 올라갔다.
“불청객이 몇 명이냐?”
“두, 둘입니다.”
“그렇군.”
보고를 받고 상황 파악을 끝낸 인백정이 사형, 사매들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자 사형과 축 사형이 오신 것 같구나.”
인백정의 눈꼬리가 한층 더 붉은 도화색으로 물들었다.
그 치명적인 색기에 주변에 있는 기녀들마저 홀려 버릴 정도.
스윽-
인백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나지도, 계속 앉아 있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형제들에게 말했다.
“안으로 뫼셔 오너라.”
그 말을 끝으로 인백정은 누각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연회장 중앙의 문이 열렸다.
우지끈! 콰-쾅!
철문에 덧대어 놨던 굵은 빗장 세 개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부서져 나갔다.
두 명의 남자가 장원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밤하늘에 천살성(天殺星)이 떴구나.”
“흉성(凶星)은 역시 흉성(凶性)이오. 타고난 것은 바뀌지 않나 보오.”
자백정 서우학(徐宇鶴)과 축백정 우철우(禹鐵牛).
본래 장강수로채의 채주가 되었어야 할 적통들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