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하극상 (1)
장강수로채의 술채가 하루아침에 불타 사라졌다.
산봉우리 위에 있던 수적들의 산채가 불타오르며 남긴 연기와 잿가루는 인근의 강을 시커멓게 물들일 정도였다.
하지만 세간을 놀라게 만든 것은 단지 그 사실만이 아니다.
수적들의 산채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던 양곡들과 재물들.
그것들이 지난밤 새 가난한 양민들의 집으로 옮겨졌다.
며칠째 풀죽 한 그릇 못 쑤어먹은 집, 아이를 낳고 산후조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있던 집, 병자가 있는 집, 그 외에도 농사나 어업이 망하여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있던 수많은 이들.
그들은 어느 날 아침 자신들의 집 마당에 수북하게 쌓인 쌀과 은자들을 보며 기절초풍해야 했다.
이곳 장가촌(杖家村) 역시도 비슷한 경우였다.
“세상에, 이게 다 뭐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먼.”
“대체 누가 이것들을 여기에 놓고 갔지?”
사람들은 마을 중앙에 수북하게 쌓인 양곡들을 보며 넋을 잃고 있었다.
올해 여름에는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비축해 놓은 식량이 없던 처지다.
당장 다가오는 겨울을 나려면 내년 봄을 위해 아껴두었던 종자라도 꺼내 먹어야 하나, 걱정이 태산 같았는데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이 정도면 마을 사람들 전체가 충분히 겨울을 날 수 있다.
어딘가에 빚을 지지 않고서도 말이다.
젊은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지난밤 새에 웬 텁석부리 사내들이 와서는 양곡을 여기에 쌓아 놓았다는데?”
“근데 그게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이라는 말이 있어.”
“뭐? 수적들이? 별 웃기는 소리 다 듣겠네. 그 숭한 도적놈들이 무슨 쌀을 나눠 줘.”
“그러게 말이야. 뺏어 갈 때는 언제고 참. 허…….”
수적들이 쌀을 나눠 주고 갔다는 말에 모두가 황당해한다.
하지만 장가촌의 일부 노인들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옛날의 장강수로채는 지금처럼 그렇지 않았었지, 암.”
“맞아. 거정(巨丁)님께서 계실 적에는 이런 일들이 자주 있었어.”
“그때는 정말 의적들의 패거리였었지.”
“지금 쌓여 있는 이 양곡들을 보니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 같구만…….”
뭐, 아무튼. 양곡을 가져다 놓은 이들이 수적이면 어떻고 관군이면 어떠랴?
장가촌의 사람들은 신이 나서 양곡들을 집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며칠째 연기가 나지 않았던 굴뚝이 뜨겁게 데워졌고 각 집에서 물 끓이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람 사는 게 별거겠나.
굶고 있던 아이들이 밥을 배불리 먹고, 냉골에서 덜덜 떨던 늙은 부모가 따듯하게 잠들고, 늘 근심에 절어 있던 아내 남편이 오랜만에 웃으면 그걸로 된 것이다.
장가촌 사람들은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한패의 수적 무리가 장가촌에 모습을 드러냈다.
“얼레? 소문이 사실인가 보네.”
얼굴에 칼자국 난 수적 하나가 밥 냄새를 맡고는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술채 놈들이 미쳐서는 우리들의 초대도 거부하고, 군량미도 아무 데나 내다 버리고, 뭐 그런다는 말이 진짠가 봐.”
“이야. 기껏 뺏은 돈이랑 쌀을 나눠 줘? 이게 뭔 수적 망신이야?”
“인천두님이 격노하시는 것도 이해가 돼.”
“하이고, 그것들 다시 일일이 거둬들이려면 한동안 개고생 좀 하겠군.”
그들은 인채 소속의 수적들이었다.
십두급 수적 몇몇이 칼을 든 채 장가촌으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멋도 모른 채 환호성을 지르며 다가온다.
“고맙습니다 아저씨들! 할아버지 할머니랑 엄마 아빠가 너무 좋아하셨어요!”
한 아이가 수적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수적 하나가 비죽 웃었다.
“그건 술채의 수적들이고.”
“예?”
“우리는 인채 소속이란다.”
말을 마친 수적은 아이의 머리끄댕이를 확 붙잡았다.
“지금부터 이 촌구석에 뿌려진 양곡들을 모조리 다시 거둬들인다. 그새 축내 버린 것들은 모두 곱절로 갚아야 할 것이야.”
수적들은 저마다 칼을 꺼내 든 채 킬킬거린다.
아이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바로 그때.
“인채에서 벌써 반응이 오는군.”
길 너머의 풀숲에서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적들이 고개를 돌린 곳에서 세 명의 남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얼굴과 옷에 온통 낙엽과 도꼬마리 열매, 가막사리 씨 등이 잔뜩 붙어 있어서 일견 외형을 알아보기 힘들다.
그중 큰 키에 나른한 눈매를 가진 남자가 말했다.
“똥줄이 어지간히도 탔나 보지? 저렇게 쫄따구들을 보내서 재산들을 회수해 오라고 할 정도면.”
“뭐라? 쫄따구?”
수적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들은 손에 칼을 든 채로 풀숲을 향해 걸어 들어왔다.
“네놈들은 뭐냐? 뭔데 뒈지고 싶어 안달이냐?”
“나?”
나른한 눈매의 사내는 고개를 한번 갸웃했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여자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 다 백정 노릇은 그만두기로 했으니. 이제는 그냥 술(戌)이랑 해(亥)…… 개돼지로군. 멍멍꿀꿀~”
“닥쳐! 나한테는 적향이라는 이름이 있어!”
“그렇게 따지면 나도 견술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지. 아, 나는 이름부터가 견과 술…… 개 중의 개로다. 왕왕-”
이들은 각각 술백정과 해백정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소년의 이름은 당연히 추이다.
“이봐.”
추이는 수적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인백정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말해라.”
“인백정? 지금 우리 인천두님께 백정이라고 한 거냐, 아해야?”
수적들은 칼을 든 채 킬킬 웃었다.
십수 명이 넘는 쪽수를 믿고 있는 탓이다.
이윽고, 수적 하나가 눈을 빛냈다.
“일단 꼬마야, 네 혀부터 좀 뽑아 놓고 말하자. 거기 뒤에 있는 년놈들도 편히 죽을 생각일랑 말거라. 장가촌의 거지새끼들은 그 다음이다.”
수많은 칼들이 추이를 향했다.
물론,
…썩뚝!
그들 중 제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추이가 매화귀창을 한번 휘둘러 수적들의 무릎을 그어 버렸기 때문이다.
“……어?”
아까 전에 아이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던 수적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땅이 보이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무릎 아래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에 한번 쓰러지고 나니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어? 어어?”
그러는 동안 추이가 수적의 머리끄댕이를 잡아 들었다.
어느새 반대편 손에는 송곳 한 자루가 들려 있는 채였다.
“인백정 어디 있어?”
“…….”
“말할 것 없으면 죽고.”
그제야 수적들은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말 한마디를 잘못해서 앉은뱅이가 되었고, 이제는 목숨마저 빼앗기게 생겼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추이는 계속해서 인채를 향해 나아간다.
그동안 적향과 견술은 계속해서 추이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
추이는 잠시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매화귀창을 만들어 줬던 적향이야 그렇다 치고, 견술은 왜 따라오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추이는 견술을 향해 말했다.
“하나 묻지.”
“어. 물어봐.”
“그만 따라와라.”
“그건 물어보는 게 아니지 않니?”
견술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니 말 듣고 부하들 해산시키고, 산채에 불 지르고, 쌓아 놨던 재물들까지 다 양민들 나눠 줬는데도 나를 못 믿어?”
“…….”
추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실제로, 견술은 추이의 말을 고분고분 따랐다.
창고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금괴, 은원보, 촉금(蜀錦), 양곡 등등을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견술은 한마디 불평도 없이, 미련도 없이 모든 것들을 털어 버렸고 그 뒤부터는 이렇게 계속 추이를 쫓아오고 있는 것이다.
“따고 배짱도 아니고, 설욕전 해야지?”
손에 쥔 윤목과 저포말들을 연신 던졌다 받으며 웃는 견술.
추이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저포놀이는 끝났다. 졌으면 그만 꺼져.”
“그건 아니지. 내가 지긴 왜 져.”
“?”
추이의 말에 견술은 이의를 제기했다.
“네가 네 입으로 그랬잖아. 주사위는 끝까지 던져 봐야 안다고.”
“…….”
“내가 던져서 0이 나왔다는 건 알겠는데. 그런 논리대로라면 뒤에 네가 던져서 무슨 숫자가 나올지, 그것도 모르는 거 아닌가? 어쨌든 너도 아직 안 던진 거니까.”
“…….”
“그리고 저포판의 규칙에는 두 개의 윤목이 같은 면을 드러내 보였을 때, 윤목을 한 번 더 던진다는 것도 있다고.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때 윤목을 한 번 더 던졌어야 했어.”
영(零)과 영(零). 도합 영(零)이었어도 같은 숫자가 나온 걸로 간주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견술은 지금 이 점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추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럼 그때 그렇게 말하지 그랬나?”
“호호호- 그때 그랬으면 우리 예쁜이가 예 알겠습니다- 했을까? 귀찮으니까 그냥 내 모가지를 따 버렸지 싶은데?”
“그도 그렇군.”
“그렇지? 그러니까 이렇게 따라다니면서 툴툴거리기라도 해야지. 재대결을 해 줄 때까지.”
견술은 한쪽 손에 든 윤목과 다른쪽 손에 든 개작두를 흔들어 보였다.
스윽……
추이가 창을 들어 올렸다.
아마 그 재대결이라는 것을 여기서 해 주려는 모양.
그때, 적향이 추이를 말렸다.
“관둬. 제대로 붙으면 서로 귀찮아져.”
그녀는 추이의 귓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견술, 저 미친놈은 실력이 상당해. 자 사형과 축 사형도 인정했을 정도였어. 아무리 너라도 기습이 아니면 피해 없이 이기기 힘들걸?”
“상관없다.”
“상관이 없지 않아. 지금 네가 벌이려고 하는 일을 생각해 보라고.”
“…….”
적향의 어조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장강수로채의 인채를 치러 가는 거잖아. 이게 뭘 뜻하는지 몰라?”
“…….”
“무려 사도십오주의 한 축을 무너트리러 가는 거야. 예전에 네가 걸어온 여정에 빗대자면…… 그래! 남궁세가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거랑 비슷하다고.”
무림맹을 구성하는 정도십오주에 남궁세가가 있다면 사도련을 구성하는 사도십오주에는 장강수로채가 있다.
그리고 추이는 현재 그 장강수로채의 실질적 최강인 인백정을 잡으러 가고 있는 것이다.
적향이 말을 계속했다.
“아무리 내분이 일어나서 스스로 무너지는 중이더라도…… 인백정은 장강수로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는 고수야.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지.”
“하고 싶은 말이 뭐냐?”
“같은 편이 하나라도 더 있어야 한다는 거지. 최소한 적으로 돌리지는 말자 이거야.”
그러자 견술이 적향의 말을 받았다.
“사매가 의외로 머리가 좋네. 근데 스승님께서는 왜 사매를 밖으로 내치셨을까? 이렇게 잔대가리 잘 굴리는 것 보면 인백정 놈 손아귀 속에서도 샥샥 잘 살아남았을 것 같구만.”
“넌 좀 닥쳐!”
“어허. 말이 심하군 사매. 그래도 내가 사형인데.”
능글거리며 딴청을 피우는 견술, 걱정이 많아 보이는 적향.
하지만 추이는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거사를 앞두고 이렇게 태연자약하기도 힘든 일이다.
그 점이 못내 신기했는지, 견술이 물었다.
“근데 구체적인 계획이 뭐니 너네? 나야 그렇다고 쳐도 인백정 놈은 어떻게 치러 갈 생각이지? 거기에는 그놈에게 붙어먹은 다른 사형, 사매들도 많을 텐데.”
“글쎄, 그건 아직 나도…….”
적향도 우물쭈물하며 추이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추이가 되레 묻는다.
“꼭 무슨 계획이 있어야 하나?”
“?”
“?”
적향과 견술의 표정이 멍해졌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추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냥 정면돌파할 생각이다.”
애초에, 추이는 복잡한 계획을 세우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냥 쳐들어가서 다 찔러 죽이는 것.
이보다 더 간편한 방법이 어디 있겠나.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