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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80화 (80/110)

80화 저포놀이 (4)

추이는 저포판 위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창귀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이제 쓸모가 없으니 돌아가라.’

지금까지 추이 대신 주사위를 굴려 왔던 창귀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간다.

추이는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호호호호- 그래, 맞는 말이다. 으응, 맞는 말이야. 주사위를 던져 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뭐가 나올지 말이야. 인생이라는 게 참 그래. 으응?”

술백정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 웃고 있었다.

이윽고, 두 개의 나무 주사위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두 주사위의 합이 일 이상이기만 하면 내가 이긴다. 자, 보자. 어떤 패가 나오는지.”

술백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주사위가 던져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도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을 바로 그때, 추이는 비로소 품속에 숨겨 두었던 칼을 빼 들었다.

…철커덕!

넉넉한 품의 치마 속에서 검붉은 칼날이 쑥 튀어나왔다.

코등이도 없이 바로 자루에서 주석막이, 칼날로 이어지는 유려한 곡선.

추이는 칼 손잡이를 잡은 그대로 술백정의 목을 그어 버렸다.

쫘악-

핏물로 이루어진 긴 적선(赤線) 하나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

본능적인 감각, 직감으로 느낀 서늘함이 위로 향했던 술백정의 턱을 아래로 잡아끌어 놓았다.

…쩌엉!

술백정은 황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고 개작두의 날을 들어 추이의 칼날을 막아 냈다.

하지만 이미 추이의 칼날이 목의 피부를 가르고 살짝이나마 파고들었기 때문에 피를 보는 것 을 피할 수는 없었다.

푸슈숙!

살짝 갈라진 피부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와 저포판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꺄아아아악!”

주변에서 기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백두들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칼을 빼 들었으나.

“어허. 끼어들기 금지.”

또 다른 기녀 한 명이 도끼날을 들어 백두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쩍-

거칠고 투박한 손도끼 하나가 내리꽂혀 바닥을 길게 쪼개놓는다.

“이 선 넘어가고 싶은 놈들은 들어와. 근데 두 다리 멀쩡하게는 못 넘어가.”

해백정 적향. 그녀가 얼굴을 가렸던 화장을 탁주로 씻어낸 뒤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말했다.

한편, 술백정은 아직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술백정은 목을 잡은 채로 뒤로 물러났다.

목에서는 아직도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술백정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는 눈앞에 있는 추이와 그 뒤에 있는 적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니. 너네 살수였니? 아니, 자세히 보니까 해 사매잖아? 언제부터 살수로 전직했어?”

“닥쳐. 여기의 미곡이랑 병장기들을 불태우러 왔다.”

“아니, 얘. 화가 났으면 대화를 해야지 왜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패악질이니?”

“인백정, 그놈이 대화가 통할 놈이냐?”

“범 새끼한테 볼일이 있는 거였어? 근데 왜 인채로 안 가고 술채에 와서 이 지랄일까?”

“군량이랑 병장기들이 술채를 거쳐서 인채로 가잖아. 그러니 인채를 치기 전에 술채부터 쳐서 보급로를 끊어 놔야지. 상식 아냐?”

“오. 나와 인백정을 한패라고 생각했군. 뭐…… 상황만 놓고 보면 그럴 수 있기는 해.”

적향의 말을 들은 술백정이 씩 웃었다.

그는 옆에 있던 천으로 목을 칭칭 감았다.

꽈드드득……

어찌나 세게 조이는지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간다.

흰 천이 시뻘겋게 물드는가 싶더니 이내 지혈이 끝났다.

“휴. 목 졸려 죽나 했네. 지 손에 목 졸려 죽으면 뭔 개망신이야 그게.”

술백정은 피 묻은 개작두를 들어 올려 어깨에 걸쳤다.

그의 눈은 이제 적향이 아닌 추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뭐, 이미 피를 본 마당에 해명은 피차 필요 없을 것 같고.”

“…….”

“누군가를 죽이려 했으면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겠지?”

추이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돌려 적향에게 물었을 뿐이다.

“이놈을 잡으면 다음이 인백정인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커. 여기서 산봉우리 몇 개만 넘으면 바로 인채거든.”

“알겠다. 빨리 처리하는 편이 좋겠어.”

추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자 술백정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맹랑한 꼬맹이구나. 칼은 제법 잘 다루는 것 같다만…… 어디 기습 말고 다른 것도 잘하는지 한번 볼까?”

술백정은 개작두를 집어 들고 휘둘렀다.

거대한 날붙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떨어져 내린다.

따-앙!

추이의 칼과 술백정의 개작두가 맞부딪치며 무수한 불똥을 빚어냈다.

눈 한번 깜빡일 동안 오고 가는 십수 합, 그동안 술백정의 표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뭐야. 애가 아닌데 이거?”

“…….”

“……너 뭐니?”

한 방 한 방이 묵직하다.

날붙이와 날붙이의 접점에서 퍼지는 내공의 파문이 말해 주고 있었다.

상대의 내력이 결코 이쪽에 비해 얕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게다가…… 개작두의 날에 밀리기는커녕 오히려 개작두를 밀어내고 있는 저 기묘한 칼은 대체 무엇인가?

검붉은 칼날 아래 검붉은 손잡이, 그리고 그 끝에 늘어진 사슬이 적의 품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이 보인다.

‘칼을 놓칠까 봐 허리에 묶어 놓은 건가?’

술백정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차라라라라락!

추이의 손에 잡혀 있던 칼날이 별안간 쑥 튀어나왔다.

“……!”

술백정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을 보며 기겁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차라라락! 따각! 철커덕!

추이의 손에서 뻗어 나온 칼날이 두 배가 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세 배로 늘어났다.

매화귀창. 총 네 개의 마디로 분절되는 이 기묘한 창이 드디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낸 것이다.

“미친!”

술백정은 경악했다.

어디로 도망가든, 아무리 멀어지든 간에 계속해서 코앞으로 짓쳐들어오는 창날.

부우웅! 키리릭! 파캉! 차르르르르르륵! …철커덕!

추이는 매화귀창 한 자루를 칼로도 쓰고 도리깨로도 쓰고 삼절곤으로도 쓰고 창으로도 쓰며 계속해서 술백정을 추격했다.

써거걱!

매화귀창의 날이 저포놀이판 위를 훑고 지나갔다.

판 위에 있던 말들이 죄다 두 토막으로 절단되었다.

“젠장! 뭐 저딴 무기가 다 있어!?”

술백정은 목에서 쏟아지는 피를 막으면서도 열심히 개작두를 휘둘렀다.

하지만 추이는 집요하고 또 철저했다.

술백정이 거리를 벌린다 싶으면 창으로 대응했고, 거리를 좁혀 온다 싶으면 칼로 대응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후두두둑-

추이는 술백정이 발을 디디려 하는 곳마다 마름쇠를 한 움큼씩 뿌려 놓고 있었다.

“어?”

술백정은 발을 뒤로 빼는 순간 발바닥에서 따끔함을 느꼈다.

마름쇠의 가시 하나가 발바닥을 뚫고 발등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술백정이 마름쇠를 밟고 멈추는 순간, 추이는 곧바로 창을 조립해 뒤쫓아갔다.

쉬익- 쉭- 쇄애액!

독사처럼 뻗어 오는 창끝에 술백정은 점점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부웅-

술백정이 창끝을 피해 고개를 숙이는 순간.

뻐-억!

추이의 다른 팔 소매에 숨겨져 있었던 쇠망치가 술백정의 머리통을 후려갈겼다.

‘미친놈! 대체 무기가 몇 개야!?’

술백정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고개를 틀어 망치를 피했다.

하지만 머릿가죽의 일부가 찢어지고 뇌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땅그랑!

추이는 유효타를 거두자마자 곧바로 망치를 버린 뒤 두 손으로 창을 쥐었다.

창은 독사처럼 대가리를 들이밀며 술백정의 눈, 목, 심장, 폐, 간, 사타구니, 허벅지를 노렸다.

“꺼져라!”

술백정은 피를 토하면서도 버럭 소리쳤다.

육중한 개작두 날이 휘둘러져 추이의 창날을 쳐냈다.

쩌-엉!

하지만 창은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개작두를 되튕겨냈다.

‘무슨 놈의 힘이…….’

술백정은 이를 악물었다.

방금 전의 교전에서 전해져 온 추이의 내력.

그것이 손목뼈를 으스러트릴 듯 징징 울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추이는 술백정을 처음 기습했을 때부터 지금껏 계속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힘이 넘친다. 내력도 끊기지 않고.’

패도회주 도막생을 죽여 창귀로 만들고 난 뒤, 추이의 경지는 이올(彛兀)의 제삼 층계까지 단숨에 올라가 있었다.

‘창도 쓸 만하니 좋군.’

더군다나 무기 또한 전생에 쓰던 형태로 개조시켜 놓았다.

여러모로 지려야 질 수가 없는 판이었다.

파-캉!

추이의 창은 지난번 대나무 숲에서 시험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빠르고 강맹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시시껍적한 대나무를 상대로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는 듯, 적수다운 적수를 만날 때에만 제 실력을 뽐내겠다는 듯, 매화귀창은 그렇게 펄펄 날뛰었다.

“……! ……! ……!”

추이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고 술백정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평소 술백정은 개작두라는 다소 생소한 무기를 써서 상대방에게 당혹감을 안겨 주곤 했었다.

하지만 바로 지금, 더욱 더 생소하고 기형적인 무기와 만나 싸워 보니 비로소 알겠다.

지금껏 자신의 손에 죽은 이들이 얼마나 당혹스럽고 절망스러웠을지 말이다.

“빌어먹을!”

술백정은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두 손으로 개작두의 손잡이를 쥔 채 그것을 직선으로 내리그었다.

동시에, 추이 역시도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철커덕! 차르르륵!

하나의 긴 창으로 변한 매화귀창이 엄청난 속도로 뻗어 나간다.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개작두와 직선으로 쏘아지는 창날이 서로 맞물리는 순간.

쩌-억!

동굴의 벽과 바닥이 갈라지며 무시무시한 굉음이 일어났다.

“…….”

“…….”

기녀들은 머리를 감싸 쥔 채 바닥에 얼굴을 처박았고, 수적들은 감히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

“…….”

추이와 술백정 역시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이의 창은 술백정의 목젖 바로 앞에서 멈춰 있었다.

술백정의 개작두는 추이의 창대에 완전히 가로막혀 있는 것이 보인다.

이윽고, 추이가 말했다.

“승부가 났군.”

그러자 술백정이 싸늘한 어조로 대답했다.

“왜 안 죽였지?”

“이미 이겼는데 굳이.”

“지랄.”

술백정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른하기만 하던 시선에는 어느덧 시퍼런 살기가 번뜩거리고 있었다.

“나는 죽기 전까지 진 게 아니야. 알아?”

“승부에 승복해라. 견술.”

“승복시키려면 죽여.”

술백정은 추이의 창을 향해 목을 들이밀었다.

…뿌직!

창끝이 목젖을 파고들자 빨갛게 물든 천에서 또다시 피가 흘러나온다.

죽기 전에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것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추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공정하고 엄격하게 하자고 안 했나?”

“……?”

“저포놀이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추이가 아래를 향해 턱짓했다.

술백정은 무슨 말인가 싶어 시선을 내렸다.

그곳에는 저포놀이 판이 있었다.

“……!”

맨 마지막에 술백정이 던졌던 주사위 두 개.

그것들이 판 위에 멈춰서 있는 것이 보인다.

주사위의 맨 윗면에는 무슨 숫자가 나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추이가 마지막에 내질렀던 창날이 두 주사위의 윗면을 절묘하게 깎아내며 지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주사위의 맨 위에는 그저 맨들맨들한 나무 면만이 존재할 뿐, 아무런 숫자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일(一)도 아니고, 이(二)도 아니고, 삼(三)도 아니고, 사(四)도 아니고, 오(五)도 아니고, 육(六)도 아닌, 영(零).

영(零)과 영(零). 도합 영(零)이었다.

술백정의 말은 결승점까지 한 칸을 남겨 놓았으되, 결국 움직이지 못했다.

추이의 창 역시도 술백정의 목젖 직전에 멈추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상태에서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

“…….”

이윽고.

“……푸핫!”

술백정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는 폭소를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딴엔 맞는 말이군.”

그는 들고 있던 개작두를 바닥에 떨궜다.

그리고 턱밑까지 쳐들어온 추이의 창을 귀찮다는 듯 손으로 밀어냈다.

“그래. 뭘 원하니?”

추이가 말했다.

“전부 다.”

다른 수적들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술백정이 대답했다.

“그래라.”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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