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저포놀이 (3)
저포놀이 판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물떡 떨어졌다. 좀 더 가져와라. 아니다, 얘. 그냥 다 가져와.”
술백정은 텅 빈 탁주 동이를 집어 던지며 말했다.
이윽고, 항아리 속의 희뿌연 누룩주들이 찰랑찰랑 날라져 온다.
술백정은 목이 타는지 질그릇을 들어 동이 속의 탁주를 연거푸 퍼마셨다.
그러는 동안 어린 기녀는 윤목들을 손에 말아 쥐었다.
“접습니다.”
이윽고.
“던집니다.”
오방색의 말판 위로 나무 주사위 두 개가 굴러간다.
떽-떼구르르르르……
순간, 모든 이들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육(六)과 육(六). 도합 십이(十二).
더군다나 두 주사위의 숫자가 같으니 한 번 더 던질 수 있다.
저포놀이 판에서 가장 좋은 패가 뜬 것이다.
“오, 주사위 좀 던지는구만.”
“저 애는 누구야? 기녀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은데.”
“노래를 잘 불러서 데려왔다더군.”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어린 기녀는 나이답지 않게 초연한 모습으로 판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따-악!
어린 기녀의 말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후, 규칙에 의해 어린 기녀는 한 번 더 주사위를 던졌다.
또르르르르륵……
주사위는 기묘한 궤도로 굴러가더니 우뚝 멈춰 섰다.
육(六)과 육(六). 도합 십이(十二).
아까와 같은 숫자가 나왔다.
“접습니다.”
어린 기녀가 주사위를 회수했고.
“던집니다.”
또다시 던졌다.
뗴구르르르르……
육(六)과 육(六). 도합 십이(十二).
또다시 같은 결과가 나왔다.
어린 기녀는 또다시 말을 움직였고, 또다시 주사위를 움켜쥐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던 말은 앞에 있던 기녀들의 말, 백두들의 말을 모조리 따 잡아먹었고 앞서 있던 술백정의 말까지 잡아 버렸다.
“…….”
“…….”
“…….”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
“접습니다.”
떽떼구르르르르……
“던집니다.”
또르르르르르르……
저포놀이가 벌어지고 있는 판 위에는 오직 어린 기녀가 말하는 두 마디와 주사위 구르는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어린 기녀의 말이 판 위를 질주한다.
그 앞에 있던 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죄다 잡아먹혔다.
육(六)과 육(六)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따라서 주사위 역시도 쉬지 않고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한 백두가 손을 들어 올려 어린 기녀의 질주를 중간에 끊었다.
“주, 주사위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얘야. 이걸로 바꿔서 해 보련?”
어린 기녀의 손에 들린 주사위가 나무 주사위에서 황동 주사위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았다.
떼구르르르……
육(六)과 육(六). 도합 십이(十二).
여전히 같은 결과다.
이후 황동 주사위를 청동 주사위, 돌 주사위, 은 주사위, 황금 주사위 등으로 바꿔 보았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덧 어린 기녀의 말은 저포놀이판 위의 모든 칸들을 지나 결승점에 제일 가까워져 있는 상태.
“허허…… 거참 기묘하네.”
술백정은 상석에서 내려와 어린 기녀의 앞에 앉았다.
“주사위라는 게 원래 저런 식으로 굴러갈 수 있는 게 아닌데 말이야.”
그러는 동안에도 주사위는 계속 육과 육을 토해 내고 있었다.
어린 기녀의 말은 어느덧 결승점을 코앞에 두었다.
약간의 침묵 후, 어린 기녀는 술백정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끝내도 됩니까?”
“할 수 있으면 해 보렴.”
술백정이 교태롭게 웃었다.
어린 기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사위를 허공에 던졌다.
떼구르르르……
주사위가 이상하게 구른다.
그것은 넘어가야 할 때에 넘어가지 않고, 넘어가지 않아야 할 때에 넘어가며 또다시 같은 숫자를 드러냈다.
이번에도 육(六)과 육(六). 도합 십이(十二)였다.
바로 그 순간.
…콰-앙!
별안간 판이 뒤흔들렸다.
“아, 이거 실례.”
술백정이 옆의 돌바닥을 손바닥으로 내리친 것이다.
쩌적……
바닥이 여러 개의 균열을 만들며 쪼개졌고 그 때문에 놀이판도 약간 기울어져 버렸다.
술백정은 탁주 사발 위를 손으로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벌레가 있어서. 어휴, 참. 한겨울에 웬 날벌레가…… 물떡에 꼬여 왔니 너네?”
“…….”
어린 기녀는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판이 움직였기에 판도도 변했다.
육(六)과 육(六)에서 일(一)과 이(二)로.
주사위가 충격에 의해 뒤집어지는 바람에 안 좋은 패가 되어 버린 것이다.
빙글빙글 웃는 술백정의 표정을 본 다른 백두들이 한숨을 쉰다.
“또 시작되셨군.”
“두목님의 나쁜 버릇이 나왔네.”
“도박에서는 무슨 어거지를 써서든 이기려 하신다니까.”
“근데 무슨 저런 꼬맹이한테도 그러시냐.”
“음. 나는 좀 이해되기도 해. 십이가 작작 나와야지.”
“그러게. 이상할 정도로 운이 좋단 말이야.”
다 뜬 패를 뒤집어서 다른 패로 바꾸는 것은 반칙이지만…… 이런 상황에서 술백정에게 그 점을 따질 만큼 용기 있는 자는 없었다.
술백정은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네가 이번 판에서 이기면 네 소원을 뭐든지 하나 들어줄게.”
“…….”
“대신에, 공정하고 엄격하게 하자구. 어떤 기술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좀 불공평하잖아. 안 그래?”
“…….”
어린 기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다른 사람들 역시도 모두 말을 잃어버렸기에 이제 저포놀이는 술백정과 어린 기녀, 단둘만이 즐기게 되었다.
이윽고, 술백정의 차례가 되었다.
윤목 두 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가 판 위로 떨어져 내렸다.
떼구르르르르……
오(五)와 육(六), 도합 십일(十日)이다.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따-악!
술백정의 말이 앞으로 열한 칸 이동했다.
다시 어린 기녀의 차례가 되었다.
“접습니다.”
주사위가 작은 손아귀 속에서 달그락 달그락 소리를 낸다.
“던집니다.”
이윽고, 판 위로 숫자 두 개가 드러났다.
육(六)과 육(六). 도합…….
짜-악!
하지만 주사위 숫자는 도중에 바뀌었다.
술백정이 판 옆에 대고 별안간 손뼉을 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공이 실려 있는 손동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 참 미색이 곱구나. 조금만 더 크면 아주 천하절색이 되겠어. 훗날 여럿 사내 울릴 관상이야. 으응. 물론 난 어린애한테는 흥미 없기는 한데…….”
“…….”
“앗챠챠- 너무 감탄한 나머지 박수를 쳐 버렸군. 이거 미안해서 어쩌나.”
술백정은 싱긋 웃으며 판 위를 턱짓했다.
삼(三)과 오(五). 도합 팔(八).
손바닥과 손바닥이 마주칠 때의 충격으로 인해 주사위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옆에 있던 기녀 한 명이 콧소리를 내며 술백정의 팔을 톡 쳤다.
“어머~ 오라버니 뭐야~ 치사해요~”
“치사하다니. 얘, 도박에 그런 게 어딨니? 주사위가 멈춘 뒤 굴러갔든, 굴러간 뒤 멈췄든, 어쨌든 지금 나온 숫자가 장땡이야!”
술백정은 킥킥 웃으며 허리를 뒤로 젖혔다.
이후의 양상도 비슷했다.
어린 기녀가 주사위를 던져 육과 육을 만들면, 술백정은 어김없이 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치거나 크게 재채기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주사위를 뒤집었다.
이윽고, 어린 기녀의 말과 술백정의 말이 지척에 놓이게 되었다.
어린 기녀를 거의 다 따라잡은 술백정이 또다시 주사위를 던졌다.
떼구르르르……
오(五)와 오(五). 도합 십(十).
주사위의 숫자가 높고 똑같기도 똑같다.
한 번 더 던지게 되니 좋은 패이다.
술백정은 연이어 주사위를 던졌고 이번에는 도합 칠(七)로 꽤나 준수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는 술백정의 말이 어린 기녀의 말을 앞질렀다.
술백정의 말은 고작 결승점에서 한 칸 뒤에 있었고, 어린 기녀의 말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공교롭게도 딱 열두 칸.
“…….”
술백정의 말은 결승점까지 단 한 칸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기에 어린 기녀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어떻게든 두 주사위의 숫자를 같게 만들어 한 번 더 던져야 한다.
가능하면 육과 육을 만들어서 술백정의 말을 따내 버리고, 그 뒤에 결승점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의 결과.
“…….”
“…….”
“…….”
모두가 긴장한 표정으로 저포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어린 기녀가 말했다.
“접습니다.”
여전히 태연한 표정, 태연한 목소리.
“던집니다.”
두 개의 나무 주사위가 판 위를 구른다.
이번에도 역시 이변은 없었다.
육과 육. 도합 십이.
바로 그 순간, 어김없이 술백정이 발을 굴렀다.
…쿵!
기울어지려던 주사위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육(六)과 육(六)이었던 패가 육(六)과 오(五)로 바뀌었다.
도합 십일(十日). 다시 던질 기회는 없다.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따-악!
어린 기녀의 말은 앞으로 열한 칸을 이동하여 멈췄다.
그곳은 공교롭게도 결승점에서 단 두 칸이 모자란 곳, 술백정의 말과는 단 한 칸 차이였다.
“호호호-”
술백정이 웃었다.
“이거 아주 철렁했어. 하마터면 결승점 한 칸 뒤에서 말을 따먹힐 뻔했잖니.”
그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뒤 상아를 깎아 만든 자신의 말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결승점까지 한 칸 남았다.”
“…….”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양 숫자의 합이 일(一)을 넘으면 돼.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 으응?”
주사위는 일(一)에서 육(六)까지 밖에 없다.
그것을 두 개 던지게 되니 나올 수 있는 패의 최소값은 이(二), 최대값은 십이(十二)이다.
그러니 결승점까지 한 칸이 남은 시점에서는 무조건 이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술백정이 이겼고 어린 기녀가 졌다.
……하지만.
어린 기녀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술백정의 미소를 마주했다.
“던져 보기 전까지는 모르지요.”
“모르기는 뭘 몰라? 두 개의 주사위 합이 일(一) 미만일 수가…….”
“그러니까.”
어린 기녀가 술백정의 말을 도중에 잘랐다.
“던져 보기 전까지는 모른다고.”
말이 짧아졌다.
분위기도 변했다.
한 칸을 두고 바싹 붙어 있는 말처럼, 술백정과 어린 기녀 사이의 간격 역시도 어느새 바로 지척까지 좁아져 있었다.
“…….”
술백정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
“…….”
“…….”
주변에도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녀들과 수적들 모두가 어린 기녀의 언행에 놀라 토끼눈을 뜨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술백정이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호호호- 그래, 맞는 말이다. 으응, 맞는 말이야. 주사위를 던져 보기 전까지는 모르지. 뭐가 나올지 말이야. 인생이라는 게 참 그래. 으응?”
그는 주사위를 집어 들었다.
“두 주사위의 합이 일 이상이기만 하면 내가 이긴다. 자, 보자. 어떤 패가 나오는지.”
두 개의 윤목이 허공으로 높게 날아올랐다.
술백정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시선이 주사위들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어린 기녀.
아니, 기녀로 분장한 살수(殺手).
추이가 품속에 손을 집어넣고 있었다.
눈앞으로 훤히 드러나 있는 술백정의 목을 바라보면서.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