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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78화 (78/110)

78화 저포놀이 (2)

“저포놀이는 사람이 많아야 재밌지.”

“…….”

“뭔 표정이 그래? 일단 물떡 한 잔 하고 긴장 풀어~”

술백정은 이 빠진 질그릇을 집어 들고는 안에 든 탁주를 깨끗하게 비웠다.

전령도 마지못해 자신 앞에 놓인 사발을 집어 들었다.

쭈욱-

쌀과 누룩으로 빚어진 걸쭉한 백탁액이 목구멍을 넘어가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이 판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속만 바싹바싹 탈 뿐이다.

그때 술백정이 기녀들을 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와 저 사신은 지면 목숨을 잃을 판이요, 자기들은 이기면 천금을 쥐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야. 다들 즐겨 보자고.”

“컥!”

전령은 마시던 탁주를 죄다 뱉어 버렸다.

진짜다.

저 맑은 눈의 광인은 진짜로 이 장난놀음 한 판에 전쟁을 일으킬 심산이다.

전령의 관자놀이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먼저 해. 처음이니까.”

술백정이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고는 전령의 앞으로 윤목 두 개를 던져 준다.

또르르……

일부터 육까지 적혀 있는 나무 주사위.

이 두 개가 돌아서 나온 합에 자신의 목숨이 달렸다.

전령은 흘끗 고개를 돌렸다.

이미 출구는 술채의 백두들이 단단히 가로막고 있었다.

‘제기랄, 살 길은 그나마 이거 하나뿐이구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령은 두 눈을 질끈 감고는 윤목 두 개를 그러쥐었다.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일단 여기만 벗어나고 나면 인천두님이 다 해결해 주실 거야.’

절로 이가 갈린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서 인채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반드시 오늘의 굴욕을 되갚아줄 수 있으리라.

“더, 던지겠소. 그런데 그 전에…….”

“그 전에 뭐?”

“이번 판에서 내가 이기면, 술천두께서는 우리 인천두님의 말에 따라 주셔야겠소이다.”

“알겠다니까. 나는 도박판에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

“그럼 믿겠소.”

이윽고, 전령은 윤목을 던졌다.

두 개의 주사위가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팩- 떽떼구르르르……

육면(六面) 중 한 면이 위로 고정되었다.

오(五)와 육(六). 도합 십일(十日)이다.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전령의 말 하나가 출발점에서부터 시작하여 총 열한 칸을 움직였다.

‘좋아. 꽤 앞으로 갔다.’

시작부터 좋은 숫자가 나왔다고 생각했다.

바로 뒤이어 술백정이 윤목을 던지기 전까지만 해도 전령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 그럼 이제 내 차례.”

술백정이 묘한 손동작으로 윤목을 말아접듯 던졌다.

또르르르륵……

그러자 이내 두 윤목이 각각 서로 같은 면을 드러냈다.

사(四)와 사(四). 도합 팔(八)이다.

술백정이 입꼬리를 비죽 말아 올렸다.

“윤목 두 개가 같은 숫자네. 그러면 한 번 더 던지는 것 알지?”

“처, 처음 듣는 규칙인데…….”

“우리 술채에서는 다 그렇게 해.”

전령의 항의를 무시한 술백정이 한 번 더 윤목을 던졌다.

떽떼구르르륵……

각각 일(一)과 이(二). 도합 삼(三).

술백정의 말이 여덟 번에서 세 번 추가로 이동했다.

공교롭게도 전령의 말이 있는 칸이었다.

“어이쿠. 이런. 잡아먹었네?”

술백정의 말은 전령의 말 위에 포개어졌고 그대로 따 뒤집어 버렸다.

원래 저포놀이에서는 자신의 말이 다른 사람의 말이 있는 칸에 도착하게 되면 상대방의 말을 최초 시작점으로 되돌아가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이곳 술채에서의 저포놀이 규칙은 조금 달랐다.

덜덜 떠는 전령을 보며 술백정이 씩 웃었다.

“우리는 한 번 죽은 말은 그냥 끝이야. 부활 같은 건 없어.”

“그, 그런 게 어디…….”

“있지. 여기에 있어. 그래도 현실에 비하면 훨씬 낫잖아? 목숨이 두 개나 되니까.”

“…….”

“아직 하나 남은 목숨, 잘 간수하라고.”

술백정은 전령에게서 시선을 떼고 옆에 있는 기녀의 볼에 입을 쪽 맞추었다.

“자기야. 이것 봐. 맨 처음에는 차라리 나중에 던지는 게 유리해. 무턱대로 선수를 잡았다가는 후발주자들에게 따먹힐 수 있거든.”

“…….”

“어이- 전령꾼. 뭐 해? 다들 던졌다구. 네 차례야, 빨리 던져. 분위기 재미없어지잖아~ 우리 예쁜이 입에서 하품 내면 죽는다 너?”

기녀들 역시도 윤목을 한 번씩 던진 뒤, 전령의 차례가 빠르게 돌아왔다.

술백정의 채근을 견디지 못한 전령이 다시 한번 윤목을 던졌다.

떼구르르르……

나무 주사위가 팽이처럼 굴다가 이내 움직임을 멎었다.

두 번째 말이 앞으로 이동한다.

오(五)와 사(四). 도합 구(九)다.

술백정은 싱긋 웃으며 윤목을 잡았다.

“어머, 어쩌니? 재수 없으면 시작부터 끝이겠네.”

“…….”

전령은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술백정의 윤목이 저포판 위를 구른다.

또르르르륵……

사(四)와 사(四). 도합 팔(八)이다.

두 개의 숫자가 같으니 주사위를 한번 더 던져야 했다.

“됐다!”

전령이 쾌재를 불렀다.

상대가 자기를 앞질러 갔는데도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이. 너무 앞서 가 버렸구만.”

술백정은 말을 앞으로 여덟 칸 옮겼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주사위를 던졌고.

이(二)와 삼(三). 도합 오(五).

말을 앞으로 다섯 칸 추가로 움직였다.

“휴우…….”

전령은 술백정의 말과 자신의 말 사이에 거리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판 전체로 보면 불리해졌지만 지금 당장 말을 따먹힐 위기는 넘겼으니 급한 불은 끈 셈이다.

바로 그때.

또르르르르……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다음 판.

술백정 다음으로 주사위를 넘겨받은 어린 기녀 하나.

이제 막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태연한 얼굴로 윤목을 던진 것이다.

오(五)와 사(四). 도합 구(九).

어린 기녀가 만들어 낸 윤목의 숫자는 아까 전령이 던진 숫자와 똑같았다.

“……어?”

전령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켜보고 있던 다른 사람들 역시도 모두 멍한 표정으로 입을 반쯤 벌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어린 기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옮겨 놓는다.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딱! 따-악!

기세 좋게 질주하던 말은 총 아홉 칸을 이동했다.

그리고 이내, 하나 남았던 전령의 말을 따먹어 버렸다.

“…….”

“…….”

“…….”

좌중의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듯 싸해졌다.

기녀들은 바들바들 떨었고 수적들은 긴장감에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술백정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전령의 말이 잡혀 버렸다.

그것도 시작하자마자 너무나도 허무하게.

“어…… 허허허허…… 어허허허허허허!”

전령이 웃었다.

두 개의 말.

남은 목숨 모두가 모두 저포판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을 보며, 그는 애써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거 시작하자마자 져 버렸습니다 그려. 아휴, 참. 너 저포놀이 한번 잘한다. 몇 살이니?”

전령은 마지막에 주사위를 던졌던 어린 기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술천두님. 이거 이거, 몰랐는데 저포라는 게 아주 재밌는 도박이오. 간만에 간땡이가 콩알만 해졌소이다. 이렇게 쫄깃한 명승부는 정말 오래간만인 것 같은데. 커흠 참. 이번에는 애들 장난 때문에 흐지부지되었지만, 다음에는 꼭 진심으로 다시 저포를 해 보고 싶소.”

전령은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아무튼 간에. 이번 일은 내가 잘 수습해 보겠…… 습니다. 인천두님께 돌아가서 제가 잘 말씀드립죠. 그러니까 최대한 양측 간에 불화가 없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그렇지요?”

어느새 말투 역시도 은근슬쩍 존대로 바뀌었다.

“…….”

“…….”

“…….”

좌중의 분위기는 여전히 긴장으로 인해 팽팽했다.

기녀들은 놀자고 자리한 판에서 혹시 피를 볼까 봐 걱정하고 있었고, 수적들은 설마 이런 사소한 도박 한 판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기색들이다.

그러나.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너?”

술백정이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향해 손을 뻗자, 수적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

전령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술백정이 집어 든 것은 커다란 날붙이였다.

개작두.

가위나 칼로도 자르기 힘든 것을 자를 때 쓰는 육중한 날붙이.

북송 시대의 명판관 포증(包拯)이 죄인의 허리를 자를 때 사용하던 것이다.

술백정은 그것의 날 부분만 따로 떼어 내 커다란 도(刀)처럼 들고 다니고 있었다.

“졌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뭔 개소리를 짖어 대고 앉았니? 여기가 술채라서 그러는 거야?”

“으으…… 으아아아아! 수, 술천두! 미쳤소!?”

“왕년에 미친개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지. 호호호-”

“이, 이건 하극상이야! 나는 사신이다! 사신을 죽이면 인천두께서 가만있으실 것 같으냐!”

“어차피 내가 지 말 들을 거라고 기대도 안 했을 거야. 너는 그냥 찔러보기용으로 보냈다가 버리는 패인 거지.”

“지, 진짜 그럴 거야? 지, 지, 진짜로 날 죽이겠다고? 그랬다간 전쟁이 벌어질……!”

그것이 전령의 마지막 말이었다.

썩-뚝!

술백정은 개작두를 내리그었고 그대로 전령의 허리를 토막 내 버렸다.

후두둑- 후두둑- 철퍽!

두 동강 난 토막.

거친 절단면 사이로 이것저것 많은 것들이 흘러내린다.

“미친…… 하룻강아지…… 새끼가…… 범 무서운 줄…… 모르…….”

전령은 입을 뻐끔거리던 끝에 그대로 축 늘어져 버렸다.

“…….”

“…….”

“…….”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기녀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수적들은 내전이 발발했다는 것에 대한 충격으로 저마다 말이 없다.

하지만.

“호호호호-”

술백정은 여전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탁주 사발을 집어 들었고 유쾌한 웃음과 함께 그것을 비웠다.

“일합(一合)에 인채의 백두급을 보내 버리다니. 꽤 하는구나, 아가야.”

술백정은 방금 전 주사위를 던졌던 어린 기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인채의 백두급이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흠. 나도 손짓 한 번에 죽일 자신은 없군. 그런데 너는 고작 주사위를 한 번 굴려 그걸 해냈으니 네가 나보다 낫다고 할 수밖에.”

“…….”

“어따. 강호에 새로운 여고수가 등장했다. 축하하는 의미에서 뭘 주고 싶은데. 뭐가 좋으니? 술? 돈? 쌀? 아, 비단이나 장신구도 많다.”

술백정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러자 어린 기녀는 표정 하나 변하는 것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보다. 저포놀이가 벌써 끝난 건가요?”

“……?”

“아직 이기지도 못했는데 상을 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

그 말에 술백정의 나른하던 눈매가 조금 위로 올라갔다.

고개를 돌리니 피 묻은 저포판 위에는 아직 말들이 많이 남아 있다.

“호호호호…….”

술백정은 웃었다.

그러고는 동굴이 떠나가라 손뼉을 쳤다.

“맞다. 네 말이 맞아. 아직 놀이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논공행상은 이르지.”

권태로워 보이던 술백정의 눈빛에 처음으로 생기가 깃들었다.

“자. 다시 놀자고. 나는 몰랐는데, 저포놀이라는 게…….”

술백정의 시선은 눈앞에 있는 어린 기녀 한 명만을 향하여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이 적어도 재밌는 거였네.”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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