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저포놀이 (1)
갑판 위로 요란한 발소리들이 들려온다.
“나와, 이년들아!”
험상궂게 생긴 수적들이 선실 안에 있던 기녀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개중 몇몇이 기녀들을 향해 코를 벌름거렸다.
“캬, 이게 얼마 만에 맡아 보는 분 냄새냐?”
“어이. 바로 산채로 가나?”
“그 전에 우리부터 좀 놀다가 가면 안 될까?”
그때, 한 수적이 앞으로 나섰다.
“허튼소리 말고 산채로 데려가라. 기녀들을 정중하게 대우하라는 술천두님의 명령이 있으셨다.”
“에이…… 어차피 위에 올라가면 다 더럽게 놀 텐데. 지금부터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닥쳐라. 네놈들은 그저 두목님 명령에만 따르면 돼.”
“쳇. 장강수로채에서는 제멋대로 굴어도 된다고 해서 들어왔는데. 이건 뭐, 하지 말라는 게 왜 이리 많아?”
이윽고, 수적 하나가 낄낄 웃으며 추이의 엉덩이를 더듬었다.
“그럼 이렇게 만지작거리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요 어린 년 하나쯤은…….”
하지만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사뿍-
맨 처음 경고했던 수적이 칼을 뽑아 그의 목을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술천두님이 명령하셨다. 기녀들을 정중히 대하라고.”
“…….”
“항명할 놈은 지금 해라.”
서슬 퍼런 십두(十頭)의 말에 다른 수적들은 조용히 눈을 내리깐다.
이윽고, 십두는 뽑았던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혀를 찼다.
“외부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이 우르르 들어와서는 아주 위계질서가 개판이 났군.”
그는 추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부하의 무례를 대신 사과하마. 우리 두목님은 겉보기와는 달리 여자를 함부로 대하는 분이 아니야. 너희들 모두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십두의 말에 기녀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도착하자마자 피를 봤으니 당연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들 사이에 있는 두 명의 기녀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큰 기녀와 작은 기녀.
둘은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산길을 올라간다.
길을 안내하던 십두는 그녀들을 보며 감탄했다.
‘계집들이 배짱도 좋군. 좋은 곳에 태어났더라면 기녀가 아니라 여장부가 되었을 터인데. 참 가엾구나.’
* * *
산채 내부. 커다란 동혈 속에 마련된 은신처에서는 연신 시끄러운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꺄악! 오(五), 오(五), 십(十)이다! 이러면 제가 한번 더 던져도 되는 거 맞죠?”
“아아! 나는 삼(三)이야! 망했어!”
“얘! 너는 세 칸이라도 갔지! 나는 이(二)야!”
“바보야! 이(二)면 똑같은 일(一)이 두 개니까 한 번 더 던지잖아! 차라리 삼보다는 이가 나은 거야!”
먼저 온 다른 기루의 기녀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신 재잘거린다.
그녀들 가운데에는 성인 남자 십수 명이 올라가도 될 정도로 크고 넓은 나무판이 벌어져 있었다.
저포(樗蒲)놀이.
윤목(輪木)이라는 나무 주사위 두 개를 던져서 하는 윷놀이의 일종으로 규칙은 지역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된다.
이 저포놀이는 황, 청, 백, 적, 흑으로 이루어진 오방색의 말판 위에 그려진 삼백이십사 개의 칸을 두 개의 말로 달려 하나의 말이라도 먼저 결승점에 도착하게 되면 승리하는 규칙.
두 개의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숫자의 합만큼 말을 이동시키며 똑같은 숫자가 나올 경우에는 한 번을 더 던질 수 있는 것이 핵심이었다.
“주사위를 잘 굴려 봐, 자기야. 혹시 아니? 연거푸 십이(十二)가 나올지.”
저포놀이판의 가장 상석에는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가느다란 눈썹.
여우의 것처럼 길게 뻗었다가 나른하게 쳐진 눈꼬리.
그 밑에 콕 찍혀 있는 눈물점.
여인의 것처럼 갸름한 턱선과 유려한 목선이 한번 까닥 움직일 때마다 기녀들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진다.
술백정(戌白丁) 견술(甄戌).
그가 이곳 산봉우리의 천오백 수적들을 거느리고 있는 천두(千頭)였다.
“아, 이런. 나는 삼(三)이 나왔네.”
술백정은 손으로 얼굴을 짚으며 탄식했다.
“주사위 두 개에서 똑같은 숫자가 나와 줘야 한 번 더 던질 수 있으니, 삼이 사실상 최저점이란 말이야.”
“호호호- 술천두님은 운도 없으셔.”
“운이 없긴. 오히려 운이 좋지. 우리 자기 같은 미녀가 옆에서 술을 따라 주고 있는데~”
그는 옆에 있던 기녀를 끌어안으며 낄낄 웃는다.
여인의 허리를 잡아당기는 술백정의 손등에는 구멍이 뚫렸다가 아문 듯한 흉터가 나 있었다.
바로 그때.
“두목님. 즐기시는데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백두 하나가 기녀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밖에 전령꾼이 왔습니다.”
“전령? 어디서 왔는데?”
“인채(寅砦)입니다.”
“…….”
백두의 보고를 받은 술백정의 표정이 확 찡그려진다.
“에이 씨, 기분 확 잡치네. 꼴 보기 싫은 놈이 또 뭘 보냈나 본데.”
“어쩔까요? 죽여 버릴까요?”
“미쳤니? 왜 그렇게 극단적이야. 전쟁 낼 일 있어?”
“저희들은 두목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전장으로 나가 죽을 수 있…….”
“아 됐어. 진짜 부담스럽네. 일단 들어오라 그래 봐.”
술백정이 손사래를 쳤다.
이윽고, 백두들 사이로 한 명의 사내가 들어왔다.
큰 덩치에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남자.
그는 자신을 인채의 백두라고 소개했다.
“어험! 나는 인천두님의 명을 받아 인채를 대리하는 자격으로 이 자리에 왔소이다.”
말이 꽤 짧다.
술채의 백두들이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
백두 계급 주제에 천두 계급에게 은근슬쩍 맞먹고 있는 꼴이 여간 거슬리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술백정은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래, 그래. 왜 왔니?”
“지금부터 인천두님이 보내신 서신의 내용을 읊어 드리겠소. 경건한 마음으로 세이경청(洗耳傾聽)하시오!”
이윽고, 전령은 서신을 펼쳐 그 내용을 읽어 내렸다.
“친애하는 술(戌) 사제. 거리가 멀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이렇게 서신으로만 뜻을 전하게 되어 애석한 마음일세. 부디 이해하시게.”
“개좆밥아. 내 얼굴 직접 보게 되면 존나 무서울걸? 그러니까 편지로 말할 때 잘 들어라.”
“……?”
“아, 신경 쓰지 마. 그냥 편지 내용을 내 식대로 해석하는 거니까. 편하게 해. 편하게~”
술백정이 씩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인채에서 온 전령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계속 편지를 읽었다.
“우리 사형제들끼리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지 꽤나 오래되었지? 그간 참으로 격조했네. 이렇게 서신을 적는 동안이라도 술 사제 생각을 떠올리니 옛날 생각도 나고 참 좋군. 그리운 추억이 많아.”
“우리 평소에 사이 별로 안 좋잖아. 할 말도 별로 없으니 슬슬 본론 들어간다.”
“참, 술 사제. 서신을 적던 도중 문득 생각이 난 건데.”
“사실 이 말 할라고 편지 썼다. 개새끼야.”
“다름이 아니라. 스승님이 요즘 많이 편찮으시다네. 그래서 스승님을 위로할 겸하여, 오랜만에 우리 사형제들이 모두 모여서 격구 시합이라도 한번 벌이는 것이 어떻겠나?”
“다 늙어 빠진 스승은 내가 벌써 제껴 버렸고. 이제 껄끄러운 제자 새끼들까지 한데 모아서 싹 죽여 버릴 생각이야.”
“오랜만에 친목도 다지고, 안부도 묻고, 스승님께 문안 인사도 드릴 겸 하여 한번 모였으면 하네. 참가의 뜻을 묻기 위해 이렇게 서신을 띄우네.”
“꼭 와라. 안 오면 죽여 버린다. 물론 와도 죽일 거지만.”
전령이 서신의 내용을 읽는 동안 술백정은 요상한 입모양으로 계속 이상한 해석을 늘어놓았다.
참다못한 전령이 벌컥 화를 냈다.
“그 무슨 망발이시오! 제끼다니! 싹 죽이다니! 어찌 그런 모함을 하신단 말이오!”
“아님 말고. 왜 화를 내고 그래?”
“술천두께서 이렇게 인천두님을 공공연히 모욕하니 어찌 화를 안 낼 수가 있겠소!?”
“알겠어, 알겠어. 미안해. 화내지 마. 사과할게. 나도 인 사형하고 싸울 생각은 없어.”
술백정이 이렇게까지 말하자 전령의 화도 조금 누그러졌다.
이윽고, 전령이 말했다.
“그럼 이제 답변을 들을 차례요. 인천두님의 초청에 응하시겠소? 물론 응하실 것이라 믿소만.”
“응 안 가.”
“……?”
전령은 잘못 들었다 싶어서 귀를 벅벅 문질렀다.
하지만 술백정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
“산채에 가만히 박혀 있는 나한테 왜 괜히 오라 가라야. 아무리 사형이라고 해도 이건 아니지.”
“무, 무엄하오! 어찌 사형께!”
“나는 원래 패륜아라서 스승님이 불러도 안 가. 하물며 사형 주제에 어찌 나를 오라 가라 한단 말이야? 그것도 뭐? 격구 시합을 하자고? 내가 격한 운동 싫어하는 거 모르니?”
대놓고 놀리는 기색이다.
전령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기 시작했다.
“나는 인천두님을 대리하여 이 자리에 온 사람이오! 무례를 삼가길 바라오!”
“무례라. 으음- 지금도 상당히 대접해 주고 있는 건데.”
술백정은 씩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내 돌계단을 밟아 가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저벅-
술백정이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저벅- 저벅-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저벅-
술백정이 앞에 섰을 때, 전령은 자신의 폐장육부가 새끼줄에 꽉 묶여 있는 듯한 답답함과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시오…… 나는 인천두님의 사신이오…….”
“알아 얘~ 그래서 이러는 거야.”
술백정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전령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자 사형이나 축 사형의 사신이었다면 이렇게 못 했지.”
“…….”
“근데 인백정, 그놈의 사신에게는 좀 이렇게 막 해도 될 것 같아서.”
그 말에 전령은 이를 악물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 지금 하극상을 벌이려는 것이오!? 어찌 개가 범의 자리를 넘본단 말이오!”
“그럼 범이 소와 쥐의 자리를 넘보는 것은 하극상이 아니니? 스승님을 위한 자리를 왜 첫째도, 둘째도 아닌 셋째 놈이 주최한다는 게야? 격구 시합? 이건 또 무슨 어린애 장난질이니. 인백정 놈이 스승님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쯤은 세상 물정 모르고 산채 밖으로 나간 막내 년도 알겠다.”
“이, 이게 술채의 공식 답변이오!? 나, 나, 나는 그럼 이대로 돌아가서 곧이곧대로 전할 수밖에 없소!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술천두께서 무어라 하셨는지!”
“그래라. 그럴 수 있다면 말이야.”
“……!?”
전령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술채의 백두들이 출구를 막고 있는 것이 보인다.
“사, 사, 사신을 주, 죽이면 하극상…… 아니 반란이오! 이러는 게 어딨소?”
“으음. 그건 그래. 사신으로 온 놈을 죽이면 안 되지.”
술백정은 턱을 쓸며 고민했다.
“하지만 나는 꼭 너를 죽이고 싶단 말이지.”
“히익!”
“그런데 사신을 죽이는 건 또 도리가 아니라 그러고…… 이야, 이것 참 난제야.”
맑은 눈의 광인.
술백정의 시선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말이 떠오른다.
전령은 덜덜 떨기 시작했다.
술백정의 말은 진심이고, 그가 하고 있는 이 해맑은 고민에 자신의 목이 떨어질 수도, 계속 붙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그때. 술백정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아하!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군.”
“……?”
전령은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앞에는 술백정의 손바닥이 펼쳐져 있었다.
손바닥 위에는 두 개의 윤목이 보인다.
1부터 6까지 적혀 있는 나무 주사위.
그것을 본 전령의 표정이 멍하게 바뀌었다.
술백정이 말했다.
“네가 저포로 나를 이기면 인백정 놈의 말에 따라 주마.”
“그, 그럼 제가 지면……?”
“죽는 거지 뭐.”
술백정은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피식 웃었다.
이윽고, 술백정은 돌계단 위에 있는 기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자. 너희들도 다 같이 하자. 저포놀이는 여럿이서 하는 것이 재밌단다.”
때마침 산채에 새로 들어온 기녀 무리가 저포놀이에 합류하게 되면서 판이 더 커졌다.
기녀들의 표정은 복잡미묘했다.
졸지에 사람 목숨이 걸린 도박판에 끼어들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
더군다나 이번 한 판으로 인해 산채와 산채 간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게 되었으니 분위기는 더더욱 심각했다.
저포놀이를 지켜보고 있던 백두들의 표정마저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판국인데, 하물며 기녀들이 울상을 짓지 않고 배길까.
그러나.
멍청하여 분위기를 못 읽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원래 표정이 없는 것인지, 이 와중에도 안색이 전혀 변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
“…….”
모정루의 기녀 패거리 사이에 끼어 있는 뜨내기들.
아무도 아는 사람 없는 하루벌이 기녀 두 명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