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여장 (2)
파등선 한 척이 살얼음을 깨고 물살을 가른다.
강바람이 차다.
갑판 위를 돌아다니는 선원들은 자신의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가지는 않았는지 한번 만져서 확인해 본다.
배 안쪽의 선실에는 장강행(長江行)을 선택한 기녀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다.
옷을 벗고 이를 잡아서 호롱불에 그을리거나, 창밖으로 요강 속에 담긴 오줌똥을 버리는 이들 사이에 추이와 해백정이 끼어 있었다.
“후우…….”
해백정은 얼굴을 가린 면포 아래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한때 내가 머물던 곳인데, 이제는 숨어서 들어와야 하는 처지라니…….”
어린 나이에 심후한 공력과 무술 실력을 쌓기까지, 그녀는 장강의 물길과 산길을 수도 없이 쏘다니며 훈련을 해야 했다.
문득 자신을 이 경지까지 훈련시켜 준 스승의 얼굴이 떠오른다.
해백정은 면포 자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리 없어. 분명 살아계실 거야. 그렇게 강하고 의로우셨던 분이…….”
“스승이라 하면. 장강수로채의 채주 공제환을 말하는가?”
추이의 질문에 해백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정(巨丁) 공제환. 그는 사도련의 큰 기둥이라 불리는 호걸이다.
비록 도적이지만 가난한 이들의 재물은 털지 않고, 부정하게 재산을 축적한 이들의 것만을 털어 굶주리고 약한 자들을 구휼해 왔던 의적(義賊).
하지만 뜻이 다른 이들과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데다가, 저항하는 자들을 워낙 잔인하게 다루는 까닭에 세간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 편이었다.
물론 그 역시도 추이가 강호 활동을 하기 전에 이미 죽고 없어진 인물이었기에 아는 바는 많지 않았다.
‘아마 이 해백정이라는 여자 역시도 마찬가지였겠지.’
만약 추이가 아니었더라면 해백정은 자신을 추격해 온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에게 잡혀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회귀하기 전 추이의 원래 운명에서는 그녀 또한 진작에 죽고 없어진 인물이라는 뜻.
추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해백정이 자신의 본명을 말하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지금껏 통성명도 안 했네. 피차 언제 어디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산 사람이 죽은 사람 기억이라도 해 줍시다.”
“…….”
“내 이름은 적향. 너는?”
“……!”
뜻밖의 이름에 추이는 감았던 눈을 떴다
아는 이름이었다.
“뭘 그렇게 봐? 이름이 뭐냐니까?”
“…….”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의 얼굴을 추이는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기억이 서서히 떠오른다.
원래 알던 얼굴과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얼굴이 천천히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적향(翟珦).
산채 내의 별호는 해천두(亥千頭).
수적을 싫어하는 이들에게는 해백정(亥白丁).
하지만 추이는 향후 그녀가 다른 별호로 불리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혈측천(血則天).
무림사 최악의 여걸(女傑)이자 괴걸(怪傑)의 본명이 바로 적향이었다.
‘……심지어 만나 본 적도 있었지. 두 번이나.’
추이는 회귀하기 전 그녀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첫 번째는 일 차 정사대전(定私大戰) 당시에, 그리고 두 번째는 삼 차 원마대전(元魔大戰) 당시였다.
한때 정파와 사파가 치열하게 뒤엉켜 싸우던 시절이 있었다.
중원무림의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한 이념과 이념, 칼과 칼의 전쟁.
그때의 추이는 사파의 최전선에서 창을 잡았었다.
무림맹의 무인들과 사도련의 무인들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던,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매일매일 벌레처럼 스러져 가던 피의 전선.
그 당시 추이는 사도련의 무사들을 수도 없이 찢어죽이던 무시무시한 여고수 한 명을 먼발치에서 목격했던 바 있었다.
정도 소속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무인들을 무자비하게 도륙 내던 그녀에게 그날 이후 붙은 별호가 바로 ‘혈측천(血則天)’.
‘피를 뒤집어쓴 측천무후(則天武后)’라는 뜻인데,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했던 여황제의 시호를 별호에 붙여 주었을 정도면 그녀의 위용이 어떠했을지 얼추 짐작이 가는 바이다.
사방팔방으로 휘날리던 붉은 머리카락.
사도련의 무사들을 장작처럼 쪼개 놓았던 도끼.
머리카락 사이의 눈으로 이글이글 뿜어져 나오던 증오.
그 당시 혈측천이 어떤 연유로 전쟁에 참여하여 사도련의 고수들을 도살했는지, 그것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무림사의 신비 중 하나였다.
그 이후 그녀는 십수 년 동안 종적을 감추었다가 훗날 중원과 마교와의 전쟁에서 또다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그때의 혈측천은 파촉(巴蜀) 부근에 자신의 영역을 정해 두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정도의 고수와 마도의 고수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함으로써 다시 한번 무림을 뒤집어 놓았다.
오죽했으면 그녀 한 명 때문에 마교의 중원 침공군 전체가 파촉 지역을 피해 우회했을 정도였다.
그 당시 은근히 마교의 편을 들었던 추이는 우연히 파촉도(巴蜀島)라는 지역에서 혈측천과 마주했던 적이 있었다.
정사대전 당시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에서였다.
그때의 그녀는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상태로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얼굴에는 무수한 칼자국들이 그어져 있었고 몸에는 화살들이 수도 없이 박혀서 체형을 짐작할 길도 없었다.
바닥에는 정파의 무인, 사파의 무인, 마도의 무인들이 공평하게 죽어 나자빠져 있었기에 그녀가 셋 중 어디의 소속도 아님을 알 수 있게끔 했다.
‘…….’
‘…….’
추이는 그 괴물 같은 여자와 맞상대를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고, 혈측천 역시도 그런 추이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제 갈 길을 갔던 적이 있다.
자신 쪽에서 먼저 싸움을 꺼렸던 적은 극히 드물었기에 추이의 기억은 더더욱 선명했다.
그 뒤로 들려온 소식은 원마대전이 끝난 직후, 혈측천이 사도련에게 생포당하여 압송된 끝에 사도련주에 의해 친히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혈측천을 길러낸 고수가 누구일지 궁금했는데. 장강수로채의 채주 공제환이었군.’
추이는 눈앞에 있는 혈측천, 아니 적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기억 속 혈측천의 모습과 달리 눈앞의 적향은 맑고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다.
비록 지금은 부모와 스승의 원수를 갚고자 발버둥 치고 있으나, 그것은 그녀가 원래 맞이했어야 할 가혹한 운명에 비하면 요람 속 잠투정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젊고 풋풋했던 그녀가 대체 무슨 일을 겪게 되는 것일까?
어찌하여 전생의 기억 속, 그토록 처절하고도 무시무시한 몰골로 변해 버리는 것일까?
추이는 지금껏 한 귀로 흘려들었던 그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대장장이 부부의 딸.
정체불명의 세력가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부모.
행방불명된 오빠.
그리고 지금. 그녀는 생사조차 모를 스승의 복수를 위해 사지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자신을 길러 준 은혜를 갚기 위해, 그리고 부모의 원수에 대해 듣기 위해.
“…….”
추이는 문득 호예양을 떠올렸다.
전생에서 동고동락했던 그녀와 회귀 이후 만났던 그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지금의 적향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가 대략적으로 그려진다.
이윽고, 추이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추이다.”
“추이? 이상한 이름이네. 어디 출신이야?”
“묘족.”
“그렇군. 나는 한족인데, 뭐 그런 게 대수겠어?”
해백정 적향. 그녀는 추이를 향해 손사래를 쳐 보였다.
이윽고 그녀는 진중한 표정으로 본론을 꺼냈다.
“아무튼.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장강수로채의 술(戌)채야.”
“거기에 인백정이 있나?”
“아니. 하지만 인백정이 비축해 놓은 군량미나 재화 등이 보관되어 있지.”
즉, 모든 산채들의 요충지라는 뜻이다.
적향이 눈을 빛냈다.
“그곳을 불태울 수만 있으면 인백정, 그놈 눈깔이 아주 헤까닥 뒤집어질걸? 만약 놈을 죽이는 것에 실패한다고 해도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야.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복수가 되는 셈이지.”
“잘됐군. 그럼 그곳을 싹 다 불태우고 곧장 인백정을 찾아가면 되겠어. 좋은 선물이 되겠지.”
“그런데 그게 그리 말처럼 쉽지만은 않을 거야. 왜냐면…….”
추이의 대답을 들은 적향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거기를 지키고 있는 술백정이라는 놈이 거의 인백정만큼이나 강하거든.”
“무공의 수위대로 서열이 정해진 것이 아닌가?”
“아니야. 서열은 그냥 스승님이 제자로 거두신 순서대로야. 물론 자 사형과 축 사형의 실력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수준이기는 한데…….”
“자백정과 축백정의 실력은 인백정보다 강하다는 말이군.”
“어. 훨씬 더 강해.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되는 거야. 스승님은 물론이고, 자 사형과 축 사형이 있는데 인백정 그놈이 어떻게 하극상을 할 수 있었는지 말이야. 그래서 내가 아까부터 계속 스승님은 살아계실 거라고 말하는 거고…….”
적향은 화장으로 가린 콧등의 흉터가 간지러운지 그 부분을 계속 긁었다.
지금 보니 콧등을 긁는 그녀의 손등에는 뻥 뚫렸다가 아문 듯한 흉터가 있었다.
“아무튼. 술 사형…… 아니 술백정 놈의 산채에는 유독 부하가 많으니 조심해. 천두 밑에 열두 백두, 백두 밑에 열두 십두, 십두 밑에 열 명의 수적들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지?”
“그래 안다.”
“내 산채에 있던 십두급들이 대거 술백정 놈의 산채로 넘어갔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부하들의 수가 족히 두 배는 될 거야. 그 외에도 요즘 죄를 짓고 도망다니는 범죄자 놈들이 다 투신하고 있다던데…… 지금쯤은 병력이 얼마나 될지 가늠도 안 돼.”
적향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추이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상관없지.”
“?”
“적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
“그래야 내가 더 강해진다.”
“???”
추이는 더는 말하지 않았다.
창귀를 흡수할수록 강해지는 창귀칭의 원리를 어찌 설명하겠는가.
그러니 적향은 그저 손가락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로 그때.
“조심해!”
저 위에서 선원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늘어져 있던 기녀들이 갑자기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그러고는 황급히 이불이나 봇짐 등을 머리 위로 올리고 몸을 바싹 웅크린다.
이윽고.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퍽!
요란한 소음들이 나무 천장 위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신고식이 시작됐군.”
적향이 표정을 찡그렸다.
수적들은 자신들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배가 있으면 무조건 화살 세례를 퍼붓고 본다.
그러면 지금처럼 이렇게 요란한 소음들이 빗발치게 되는 것이다.
진짜 죽이려는 목적은 아니고, 그저 기선을 제압하려는 용도지만 때때로 죽는 사람도 나온다.
…펑!
창문을 틀어막고 있던 이불 뭉치가 빠지면서 화살촉 하나가 내실까지 삐죽 파고들었다.
“꺄악!?”
한 기녀가 비명을 질렀다.
창문을 막고 있던 이불이 빠졌으니 이제 곧 이리로 화살들이 날아올 것이다.
…퍽! …퍽! …퍽!
모든 이들이 내실 바닥에 엎드리자마자 벽으로 화살 몇 대가 더 들어와 꽂혔다.
그렇게 약 반 각 정도가 지난 뒤.
“그만! 멈춰!”
화살 소리가 멎었다.
뒤이어 갑판 쪽에서 묵직한 발소리들과 함께 거친 욕설이 들려왔다.
“빨리빨리 내려라, 창기들아!”
드디어 파등선이 목적지에 당도한 것이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