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연리지(連理枝) (3)
추이의 눈앞에는 검붉은 창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아니, 그것은 사실 창이라고 부르기에는 조금 이상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세 토막으로 나뉜 창대와 그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검은 쇠사슬은 마치 삼절곤(三節棍), 혹은 다절편(多節鞭)을 연상하게 만든다.
맨 끝에 있는 창대 끝에는 도(刀)의 형상으로 변한 매화검의 날이 단단히 붙어 있었다.
추이는 세 등분으로 나뉜 창대를 집어 들고는 사슬을 옆으로 밀었다.
그 뒤 나뉘어 있는 창대를 이어 붙여 보았다.
…철커덕!
창대의 분절 마디 끝부분에 붙어 있던 작은 홈이 다른 분절 마디 끝부분에 있는 걸쇠를 삼키며, 창대가 잠기듯 고정되었다.
두 개의 분절마디를 모두 잇자 삼절곤은 하나의 긴 창으로 변모했다.
추이는 창대를 다시 비틀었다.
버드나무 껍질을 벗기듯, 양쪽 손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비틀자.
…철커덕!
창대는 또다시 삼등분으로 분리되었다.
차르르르륵!
분리된 창대를 양쪽 끝으로 잡아당기자 창대 내부에 삼켜져 있던 긴 쇠사슬이 모습을 드러냈다.
끼릭-
추이는 창대를 다시 비틀어 끼워 맞췄다.
다음은 창날을 점검할 차례였다.
시뻘건 기운이 줄줄 흘러나오는 창끝.
갓 핀 매화의 은은한 붉기를 머금고 있던 매화검은 이제 진하게 농익은 혈매화 빛으로 바뀌었다.
추이는 빳빳한 머리카락 한 올을 뽑아 창날 위로 떨어트려 보았다.
사락-
머리카락은 창날 위에 떨어지자마자 세로로 곱게 잘려 나갔다.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겉보기에는 그럴듯하군.”
“뭐? 겉보기? 이게 뒈질라고!”
해백정이 망치를 들어 올렸으나 그녀에게는 이제 내리찍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아 보였다.
그녀는 추이에게 덤비는 대신 짜증스러운 말투로 첨언했다.
“내가 낳았으니까 이름 정도는 내가 붙여도 되지?”
“마음대로 해라.”
“좋았어. 사망매화의 검에 곤귀의 곤이 붙었으니…… 매화귀(梅花鬼) 어때?”
무기가 살상력만 좋으면 됐지 이름이 무에 소용일까?
추이는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무기를 탄생시킨 대장장이에게는 꽤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해백정은 창에 이름을 붙여 주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한 기색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특이한 무기를 주문했네. 이런 기형창은 어떻게 써?”
해백정조차도 신기해할 만큼 추이의 무기는 기묘하게 생긴 것이었다.
하지만 추이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리운 무게, 그리운 길이, 그리운 촉감, 그리운 형태를 손으로 가만히 어루만질 뿐이었다.
매화귀창. 이것은 전생의 추이가 쓰던 병기와 꼭 닮아 있었다.
평소에는 창처럼 쓰다가 숨기고 싶을 때는 접어서 품속에 넣을 수도 있고, 여차하면 창대를 꺾어서 상대를 당황시킬 수 있으며, 삼등분을 해서 채찍처럼 써도 되고, 이등분을 해서 도리깨처럼 써도 된다.
맨 윗부분의 창대만 따로 꺾어서 칼처럼 휘두르는 것도 가능하니 실로 기형변칙(奇形變則)의 정수라 부를 수 있으리라.
“한번 써 보겠다.”
추이는 창을 가지고 대장간 뒤뜰에 있는 대나무 숲으로 향했다.
마침 그곳에는 검은 대나무들이 빽빽하게 돋아나 있었다.
…철커덕!
추이는 창을 일자로 조립하여 평범한 형태로 만들었다.
이윽고, 추이의 창이 길게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썩둑- 썩둑- 쩍!
멀리 있던 대나무들이 붉은 창극에 닿아 토막 난다.
그 상황에서 추이는 창을 비틀어 꺾었다.
…철커덕!
눈 깜짝할 사이에 잠금장치가 풀리며 창이 삼등분으로 휘어졌다.
그것은 마치 채찍처럼 꿈틀거리며 전혀 예상치 못했던 궤도에 있던 다른 대나무를 베어 버린다.
차라라라락-
추이는 곧바로 창을 회수한 뒤 맨 마지막 마디만을 손에 쥐었다.
나머지 두 마디는 사슬을 이용하여 허리에 묶어 늘어트리고, 길게 늘어트린 사슬과 그 끝의 창대만을 손으로 잡으니 마치 장검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쩌저저적!
먼 거리에 있던 대나무뿐만이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 있던 대나무들도 모조리 동강 났다.
추이는 곧바로 손에 든 칼날을 집어 던지고는 그 끝에 있던 사슬과 다른 창대 마디들을 모두 풀어냈다.
창이 가장 길게 뻗어 나가는 바로 그 순간.
…딸깍!
던졌던 창날이 마지막 창대 마디에서 분절되었다.
그러니까, 창날만이 존재하는 네 번째 토막이 사슬에 붙은 채 길게 뻗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퍽-
창대 끝에서 뻗어 나간 창날이 바위에 깊게 박혔다.
차르르르륵-
추이는 창날에 붙은 사슬을 잡아당겨 창을 다시 원래의 모양으로 되돌렸다.
“이런 기능은 주문한 기억이 없는데?”
추이는 뒤에 서 있는 해백정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쭈뼛거리며 말했다.
“아니…… 만들다 보니까 너무 기분을 타 버려서…… 손이 멋대로 움직이더라고…….”
“실수했다는 거냐?”
“그게 아니라! 그, 그런 게 있어! 뭘 만들다 보면 그 창작물이 다루는 사람의 손을 벗어나서 마음대로 생명력을 얻어 날뛰는…… 아무튼. 뭐에 홀린 듯 만들고 보니 저렇게 되어 있었다고!”
“흠.”
추이는 턱을 짚고 잠깐 고민했다.
예상에 없던 네 번째 마디라.
‘뭐 나쁘지 않을지도.’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지금껏 겪어 왔던 바로는, 창대의 분절마디가 부족해서 곤란했던 적은 많았어도 분절마디가 너무 많아서 곤란했던 적은 없었다.
한편, 해백정은 추이가 베어 낸 대나무들을 보며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온통 초토화된 대나무들.
하나같이 균일한 높이에서 잘려 나가 있는 것이 보인다.
먼 거리, 짧은 거리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같은 길이로 잘려 나간 묵죽(墨竹)들을 보자 해백정은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가 이런 놈이랑 싸웠던 건가…….’
기형창을 든 추이는 예전에 곤 한 자루를 들고 다니던 때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해백정은 잘려 나간 대나무들을 살폈다.
‘일반적인 창의 길이는 저기까지…… 매화귀의 사정거리도 언뜻 보기에는 그쯤 되어 보여. 하지만 사실 매화귀의 창날이 닿는 거리는 그의 세 배, 아니 네 배가 넘지.’
아마 추이를 상대하고 있는 적에게는 날벼락 그 자체일 것이다.
분명 안전한 거리까지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시야가 일순간 붉어진다 싶을 테고, 그러면 끝일 테니까.
‘동영(東瀛)의 사복검(蛇腹劍) 류가 저런 식으로 동작하기는 하지만…… 그 원리를 창에 적용시키려는 미친놈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자신이 그 미친놈의 주문에 따라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는 생각에 해백정은 복잡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자신이 전설로 길이길이 남을 어떠한 무시무시한 존재의 탄생을 함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추이는 계속해서 창을 시험하고 있었다.
끼리리리릭-
창을 하나로 조립하여 평범한 외형으로 되돌린 추이는 그 뒤로 계속 정석적인 창법들을 구사했다.
‘무기의 기형적인 특성에 의존하면 실력이 퇴보하는 법. 뭐든지 정석부터. 차근차근.’
추이는 매화귀를 잡고 내력을 흘려보냈다.
사망매화 오자운의 기운도, 곤귀 구강룡의 기운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이 기형적이고 야성적인 창은 추이의 지배를 거부하며 야생마처럼 날뛰고 있었다.
추이는 이 팔팔한 신병기를 제어하기 위해 흘려넣는 내력을 세밀하게 조절했다.
권리창(圏裏槍), 권외창(圏外槍), 권리저창(圏裏低槍), 권외저창(圏外低槍), 권리고창(圏裏高槍), 권외고창(圏外高槍), 흘창(吃槍), 환창(澋槍).
팔모의 여덟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진왕마기(秦王磨旗), 봉점두(鳳點頭), 백사농풍(白蛇弄風), 철소추(鐵掃箒), 발초심사(撥草尋蛇), 마지막으로 일절(一戟), 이진(二進), 삼란(三攔), 사전(四纏), 오나(五拏), 육직(六直)의 연계까지.
변식과 연계식을 통틀어 여섯 합에 걸친 동작이 그 뒤를 따랐다.
키리릭-
창은 딱히 기형적인 형태로 변신하지 않아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나(挐)의 기법으로 상대의 공격을 되감아치기 좋게끔 충분히 유연하고 낭창낭창했으며, 또 힘있게 찌를 때 보법의 힘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질기고 단단했다.
상대가 창의 외형에 놀라 움찔하는 그 찰나의 한순간. 그 빈틈을 찌르고 들어가 확실하게 목숨을 앗아 갈 수 있을 정도로 기본기가 탄탄한 병기였다.
“쓸 만하군.”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전생에 쓰던 것만은 못하지만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백정의 솜씨는 기대한 것 이상이었던 것이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해백정이 툴툴거렸다.
“‘쓸 만하군’이 아니라 ‘이런 명창은 태어나서 처음 봐요’겠지.”
“그 정도는 아니다.”
“지랄. 니가 쳐 놓은 난장을 좀 봐라.”
몸을 혹사해서 그런가, 그녀의 말투는 매우 거칠어져 있었다.
추이는 해백정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나무숲이었던 산기슭이 어느덧 민둥산으로 변해 있었다.
“여기 사람들 당분간 그릇이랑 장작 걱정은 없겠네.”
해백정은 잘려 나간 대나무 뭉텅이를 산기슭 아래로 뻥뻥 걷어차며 말했다.
이윽고.
…철컥! …철컥! …철커덕!
추이는 창을 네 조각으로 접은 뒤 몸에 둘렀다.
여기에 펑퍼짐한 옷을 입는다면 추이가 창을 소지하고 있는지 아닌지, 겉으로 보고서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윽고, 추이는 자리를 뜨려 했다.
“어이! 그냥 가?”
한데. 해백정은 계속해서 쭐레쭐레 추이의 뒤를 따라왔다.
“뭐냐?”
“뭐긴.”
추이가 묻자 해백정은 파리한 안색으로 씩 웃어 보였다.
“도와준다고 했잖아. 복수.”
“…….”
추이는 해백정이 강가에서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도와줘.’
그냥 목숨을 살려 달라는 뜻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녀는 조금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었나 보다.
“장강수로채를 칠 거야. 도와줘.”
“…….”
“어차피 너도 인백정, 그 새끼한테 볼일이 있는 것 아녔어? 별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찾아가려는 것 같지는 않던데.”
딴엔 맞는 말이다.
추이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자리에 섰다.
그리고 잠시간 고민했다.
그러는 동안 해백정은 은근한 말로 추이를 꾀었다.
“그 개고생을 해 가면서 창을 만들어 줬는데, 설마 이대로 먹튀를 할 생각은 아니시겠죠? 이 오지산간에 마누라를 내버리고?”
“누가 마누라냐?”
“무기는 자식처럼 아끼라는 말도 몰라? 그 창이 너의 자식이니까 네가 아비지. 그리고 그 창을 낳은 어미는 나고. 그러니까 그 창을 쓰는 동안에는 내가 네 마누라인 거야.”
해백정은 씩 웃으며 바위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나는 그 창을 만드느라 너무 지쳐서 홀몸으로는 복수가 힘들어. 네가 도와줘야 돼.”
“…….”
“그리고 또. 장강수로채에 맨몸뚱이로 쳐들어갈 거야? 나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산채로 들어갈 수 있는 길들을 많이 알아.”
이쯤 되면 해백정과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다.
추이는 결정을 내렸다.
“인백정을 만날 때까지만이다.”
“그러셔. 나도 길게 따라다닐 생각 없어.”
“허튼짓하면 바로 죽인다.”
“아깝다. 내가 먼저 말하려 했는데.”
이윽고, 추이와 해백정이 나란히 마주 섰다.
“…….”
“?”
추이는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는 해백정을 향해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백정은 탄성을 질렀다.
“생각났어!”
“뭐가.”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장강수로채 안으로 잠입할 수 있는 방법.”
그녀는 손을 뻗어 추이의 양쪽 볼을 탁 잡고 터질 듯 빵빵하게 눌렀다.
“……바로 이 얼굴을 이용하는 거야.”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