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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72화 (72/110)

72화 연리지(連理枝) (1)

사천성(四川省).

송대의 행정구역인 천협사로(川陝四路)에 원대를 거치며 만들어진 성이 자리했다.

장강(長江), 민강(岷江), 타강(陀江), 가릉강(嘉陵江)이 발원하는 곳인지라 수많은 상인들이 모여드는 상업지구.

하지만 강이 많고 상행이 번화했다는 것은 그만큼 수적들도 많다는 뜻이다.

때문에 농민들이나 어부들 중에는 수적들을 피해 험준한 산봉우리로 올라가 화전(火田)을 일구고 사는 이들이 많았다.

여기에 있는 손강(孫鋼)과 손화(孫嬅) 부녀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오늘은 좋은 철이 많았으면 좋겠구나.”

“화덕에 뗄 장작이 다 떨어져 가요, 아버지.”

손강은 대장장이였고 손화는 그런 손강의 외동딸이다.

두 부녀는 멀리 외떨어진 산 중턱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산기슭 아래에 있는 농민들에게 농기구를 파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 가고 있었다.

이 산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손강은 어디에서 질 좋은 철이 나는지 잘 알고 있었고 내년에 다가올 농번기에 대비해 미리미리 그것들을 캐서 저장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화를 불렀다.

장강의 수적들이 손강의 대장간을 약탈하러 찾아온 것이다.

…쾅!

문짝을 부수고 들어온 수적 하나가 대뜸 손강의 가슴팍을 걷어찼고 곧이어 손화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꺄악!?”

딸의 비명에 손강이 기침을 하며 외쳤다.

“무슨 짓이오!”

손강의 분노 섞인 외침에 수적들은 낄낄 웃어 댔다.

“이 초막의 철을 모두 징발한다. 싹 다 가져와서 여기 수레에 실어 놓아라. 그리고 저 산 아래의 강가까지 끌고 내려가.”

“…….”

칼을 차고 온 건장한 사내들이 다섯 명이나 된다.

하나같이 살인에는 이골이 난 악귀들일 테니 저항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손강은 이를 꽉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딸이 수적들에게 붙잡혀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아버님…….”

손화는 수적들에게 붙잡힌 채 흐느꼈다.

수적들은 손화를 끌고 가서 평상에 앉혔다.

그러고는 손강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말했다.

“반나절 주마. 그 안에 철들을 다 배에 실어 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딸년은 오늘 토막토막 잘려 물고기 밥이 된다.”

“……알겠소. 시키는 대로 할 테니 딸만은 건들지 말아 주오.”

손강은 땀을 뻘뻘 흘리며 철광석을 날라 수레에 실었다.

그러는 동안 수적들은 초막 안에서 차나 떡, 어포 등을 꺼내어 제멋대로 먹기 시작했다.

그때, 한 수적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년 이거, 얼굴이 꽤 반반한데요?”

“뭐? 에이! 이렇게 더러운 년이 뭐가 반반해?”

“아뇨. 얼굴이 숯검댕 투성이라 그렇지 지우면 꽤나 볼만하겠습니다요.”

수적이 손화의 머리끄댕이를 확 잡아 올렸다.

손화의 얼굴에는 검은 숯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어서 언뜻 보기에는 전혀 외모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수적이 말했다.

“너, 여기 우물에서 얼굴을 좀 씻어 봐라.”

“…….”

손화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우물 앞에 떠놓은 물동이에서 물을 조금 떠서 얼굴을 문댔다.

그러자 수적이 그녀의 뺨을 후려갈겼다.

“똑바로 안 씻어? 얼굴에 숯가루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네년 애비의 창자를 뽑아서 닦아 주마! 알겠어!?”

칼 든 사내들의 으름장에 손화는 손발을 덜덜 떨며 얼굴을 씻었다.

수적들은 그녀의 앞에서 낄낄 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숯가루 씻었는데 못생겼으면 바로 죽인다.”

“아, 못생긴 건 못 참지. 저년 애비까지 바로 죽일 거야.”

“들었지, 이년아? 너는 예뻐야 돼. 아니면 뭐, 부녀가 쌍으로 죽는 거고.”

“빨리빨리 씻어, 덜덜 떨지만 말고. 어?”

“보자. 오? 피부는 제법 뽀얗네. 어디, 더 씻어 봐라.”

이윽고, 손화는 세안을 마쳤다.

그러자 수적들이 감탄했다.

“이야. 진짜 예쁘네.”

“화장 없이 이 정도면 저기 태애현 춘월이보다도 괜찮겠는데?”

“제 말이 맞지요? 제가 여자 보는 눈은 정확합죠.”

“안되겠다. 여기서 바로 회포 좀 풀고 가야지.”

“순서를 정하자. 제비뽑기 어때?”

손화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녀의 수난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때, 철광석을 나르던 손강이 뛰어왔다.

“무, 무슨 짓들이오! 철을 주겠다는데 왜 그러오!”

“누가 죽인대? 그냥 데리고 좀 놀겠다는 거잖아.”

“제발! 제발 그러지 마시오! 광 속에 숨겨 놓은 것까지 모두, 모두 내줄 테니 제발 딸만은……!”

수적 한 명이 귀찮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리고 커다란 손을 뻗어 손강의 멱살을 잡았다.

그는 손강을 끌고 대장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솥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쇳물이 있었다.

수적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사람 먹은 쇳물은 더 단단하게 굳는다던데, 사실인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그는 손강의 머리채를 잡아 쇳물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손화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버님을 해치지 마세요! 뭐, 뭐든 시키는 대로 할 테니……!”

그 말에 수적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재미있는 것들이야. 여기에 한 일주일은 머물러 있을까? 이 계집한테 이것저것 시키면서.”

“아서라. 갈 길이 멀어. 적어도 내일 새벽에는 배를 띄워야 함세.”

“멀기는. 어차피 장강수로채에 가입하러 가는 길이잖나. 이 근방에 술백정 견술(甄戌)이라는 자의 산채가 있다던데. 그리로 가면 금방 아니겠나?”

“예끼 이 사람아! 기왕 투신할 거면 실세에게 붙어야지.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인백정 가정맹이라는 자의 산채가 있어.”

“인백정이라. 그가 더 세력이 큰가?”

“말해 뭣하나? 장강수로채의 차기 채주가 될 자라는 소문이 파다해. 그리고 부하를 받을 때 신분이나 출신, 인성 같은 것도 전혀 안 본다더군. 딱 실력만 놓고 대우해 준다나?”

“큭큭큭- 우리 같은 실력자들에게는 딱이야.”

“참.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거기 가서는 인백정 인백정 하면 안 돼. 인 천두님이라고 정중하게 부르는 것 잊지 말고.”

“이 사람. 내가 미쳤나? 거기 가서도 백정 백정 하게. 알아서 잘할 테니 걱정 말게.”

수적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껄껄 웃는다.

바로 그때.

“누가 차기 채주라고?”

수적들의 뒤에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들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창백한 안색의 여자 하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수적들이 웃었다.

“오, 계집 하나가 더 있었군?”

“이쪽이 더 예쁜데?”

“에이, 근데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잖아.”

“나는 괜찮아. 내가 하나 더 새겨 주지 뭐.”

“어이- 너도 이리로 와서 좀 앉아 보…….”

마지막 수적의 말은 중간에 잘렸다.

왜냐하면 그의 머리통이 중간에 잘려 나갔기 때문이다.

쩌-걱!

장작 패는 데나 쓰이는 손도끼가 날아들어 수적의 안면을 절단했다.

…털썩!

핏물이 흩뿌려지며 우물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

수적들이 황급히 칼을 빼 들었다.

“이런 개 같은 년이!”

수적 하나가 칼을 휘둘렀다.

칼자국 여인은 그 칼을 피할 힘도 없는지 그저 비틀거리며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까앙!

그녀의 뒤에서 튀어나온 흑색의 곤 하나가 수적의 칼을 쳐냈다.

“……억!?”

부러진 칼날이 수적의 목을 뚫고 뒷목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그와 동시에, 앳된 외모의 소년이 곤을 회수했다.

퍼퍽!

빠르게 연이어진 찌르기가 다른 수적 둘의 머리통을 차례차례 부숴 버렸다.

추이와 해백정.

그들은 수적 넷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죽여 버리고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저벅- 저벅- 저벅-

살아남은 수적 하나가 뒤로 나동그라진 채 엉금엉금 기어서 도망간다.

그 앞으로 추이가 걸어왔다.

“사람 먹은 쇳물은 더 단단하게 굳는다던데.”

“……?”

“사실인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

방금 전에 자신이 내뱉은 말을 그대로 다시 돌려받게 된 수적.

그의 표정이 거멓게 죽어 가기 시작했다.

추이는 뻘겋게 달아오른 솥의 손잡이를 맨손으로 콱 움켜잡았다.

부글부글부글부글……

그러고는 솥 안에 든 쇳물을 수적의 머리 위에 끼얹어 버렸다.

치이이이이이이이익!

살 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노린내가 퍼진다.

“……! ……! ……!”

수적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그러고는 식어 버린 쇠에 갇혀 죽고 말았다.

“…….”

손강과 손화 부녀는 서로 부둥켜안은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수적들도 무서웠지만 지금 나타난 저 두 남녀가 훨씬 더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손강과 손화 부녀의 앞으로 해백정이 걸어왔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부자리.”

“…….”

“그리고 화덕을 빌려줘.”

“…….”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거역하겠는가.

*       *       *

해백정은 뜨끈뜨끈한 구들장에 누워 이불을 덮고서도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추워…… 추워…….”

뾰족한 나뭇가지에 몸을 관통당한 것은 약과다.

그녀는 허리와 허벅다리에 칼을 두 번이나 맞았고 등에는 일곱 발의 화살촉이 박혀 있다.

암초에 부딪친 뼈는 부러져 산산조각 났고 그 와중에 추이의 곤에 몇 번이나 얻어맞은 부위들이 시퍼렇게 멍들어 팅팅 부어오르고 있었다.

…땅그랑!

추이는 그런 해백정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몸 곳곳을 파고든 칼 조각이나 화살촉들을 뽑아냈다.

“쯧.”

추이는 혀를 가볍게 찼다.

창귀로 만들려고 했던 적을 죽이기는커녕 치료까지 해 주고 있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무기 제련을 하지 못하면 너는 죽는다.”

“추워…… 추, 추워…….”

해백정은 의식을 잃은 채 고열에 신음한다.

아까 전에 도끼를 던졌던 것도 ‘인백정’이나 ‘채주’라는 단어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했을 뿐이다.

추이는 해백정의 옷을 전부 벗기고 몸을 파고든 쇠붙이나 나무조각 등을 모두 제거한 뒤 다시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 장지문을 열고 마루에 대기하고 있던 손화에게 말했다.

“뜨거운 물과 깨끗한 천을 다오. 그리고 약재도 몇 가지 구해 와라.”

“예, 그러겠습니다. 한데…….”

“?”

손화가 말끝을 흐리며 추이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고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며 물었다.

“함께 온 여인분은…… 혹 아내이신지요?”

“아니다.”

“하면 연인이십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이신지…….”

추이의 대답을 듣는 손화의 표정에 뜻 모를 기대감이 어린다.

한편, 추이는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몰라 미간을 찡그렸다.

“포로다.”

“?”

“구해 오라는 것이나 빨리 구해 와라. 싫다면 다른 집으로 가겠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여기 계셔요! 얼른 구해 올게요!”

손화는 화색이 된 얼굴로 사립문을 향해 뛰어갔다.

추이는 해백정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열이 펄펄 끓고 있어서 여기에 대고 쇠를 녹여도 될 정도다.

그때.

“화덕을 쓰시렵니까?”

마루 너머에서 손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추이는 해백정이 있는 방문을 닫고 마루로 나갔다.

손강이 공손한 자세로 서서 추이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언제든 쓰실 수 있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거기서 이걸 이어 붙일 수 있겠는가?”

추이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묵죽곤과 매화검을 보여 주었다.

손강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두 병기를 살피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기물(奇物)들은 평범한 대장장이의 실력으로는 다룰 수 없겠습니다. 제 미천한 능력으로는 날을 가는 것조차도 어렵겠군요.”

“가능한 대장장이를 모르나?”

“제가 알기로는 이 인근에는 없습니다. 저기 성도(成都)로 나가면 또 어떨지…….”

“…….”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해백정이 깨어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그녀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값싼 거짓말을 내뱉은 것이라면…… 반드시 그에 맞는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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