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장강의 수적들 (4)
맑은 물속으로 가라앉으며 보이는 풍경.
수면 위로 비치는 햇살이 몇 겹으로 일그러진다.
그녀는 지금 눈을 뜬 채로 꿈을 꾸고 있었다.
‘엄마!’
그녀는 입을 열지 않고 소리 질렀다.
하지만 엄마는 그저 슬픈 눈으로 웃을 뿐이다.
부글부글 끓는 쇳물이 엄마를 삼킨다.
엄마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천천히 물속으로 흩어져 갔다.
소금으로 만들어진 인형처럼, 그렇게 물에 녹아 버렸다.
‘엄마! 엄마! 엄마!’
그녀는 울었다.
하지만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가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풀무와 망치를 든 채로.
“……커억!”
해백정은 물을 토해 냈다.
강물에 빠지는 순간부터 그녀는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휘저었다.
화살에 맞고, 암초에 부딪치고, 강바닥의 자갈에 쓸려가며, 해백정은 하류까지 떠내려왔다.
그러다가 뾰족한 나뭇가지에 옆구리를 찔리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찌른 그 나뭇가지를 구원의 손길처럼 잡고 뭍으로 기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왈그락!
해백정은 자갈밭 위에 엎드렸다.
그리고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작게 흐느꼈다.
“엄마…… 아빠…….”
바로 그때.
왈그락- 왈그락- 왈그락-
저 앞에서 자갈 밟는 소리들이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해백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낯익은 얼굴의 수적들이 보였다.
“두목님!”
백두 계급의 수적 하나가 부리나케 해백정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는 해백정의 가장 오래된 부하였다.
“……!”
해백정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수중에 무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별수 없이, 그녀는 큼지막한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야…… 너희들…… 배신이냐?”
“아닙니다 두목님! 저희는 두목님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수적들은 다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해백정은 그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었다.
백두 계급이 여섯.
나머지는 모두 십두 계급이다.
해백정이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 상류에 나를 치러 온 놈들이 있었다.”
“그놈들은 배신자들입니다. 저희 해채(亥寨)를 배신하고 인채(寅寨)에 가 붙은 놈들입니다.”
“인(寅)? 인 사형에게?”
해백정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장강수로십이채의 채주에게는 열두 제자가 있다.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각각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를 뜻하는 별호를 가진 이들이 바로 장강수로십이채를 지탱하는 열두 천두 계급이다.
그중 해백정은 채주의 막내 제자였다.
그리고 배신자들이 따르기로 했다는 인 사형이란 채주의 열두 제자들 중의 셋째, 바로 인백정을 뜻했다.
백두들이 해백정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해 천두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채주 좌를 놓고 한바탕 실랑이가 있었습니다.”
“인 천두님이 자 천두님과 축 천두님을 제끼고 채주 좌를 찬탈하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이미 해 두목님을 제외한 모든 천두님들이 인 천두님의 채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조만간 그곳에서 채주 좌를 건 경합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 두목님은 그동안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얼마나 찾았다구요!”
백두들의 말에 해백정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시국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왜 채주님은 나를 산채 밖으로 나가라고 하셨던 거지? 설마…….’
해백정은 아차 싶어 이를 악물었다.
그때. 백두들이 해백정을 향해 다가왔다.
“해 두목님. 지금이라도 채주 쟁탈전에 참가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손 놓고 당하실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모든 천두님들이 인 천두님의 산채로 갔답니다. 저희도 어서 그곳으로!”
하나같이들 다 충직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해백정은 부하들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알겠는데…… 너희들은 여기 왜 왔냐?”
“예? 그야 저희는 두목님을 모시려고…….”
“날 모시려고 왔다는 놈들이 약 한 첩, 담요 한 장 안 싸 들고 왔어? 칼만 바리바리 차고?”
그 말에 백두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맨 앞에 있던 늙은 백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곱게 갑시다, 해 천두.”
그 말을 시작으로, 모든 수적들이 병장기를 뽑아 들었다.
과연 이들 중에 음식이나 약, 담요 등을 짊어지고 있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해백정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짱돌을 움켜쥐었다.
“아까 활 쏘던 놈들도 한패지? 전원이 배신했구나. 인생 헛살았네.”
“인생을 헛산 것은 우리 아니겠소? 지금껏 무공만 강한 어린 계집을 두목으로 모셔야 했으니 말이오. 채주가 말년에 노망이 든 게지.”
“나는 욕해도 괜찮은데, 스승님은 욕하지 마라.”
“어차피 얼마 전에 뒈진 노친네한테 거 욕 좀 하면 어떻소이까?”
“……!?”
배신자들의 말에 해백정의 표정이 흔들린다.
“채, 채주님…… 아니 스승님이 돌아가셨다고? 왜?”
“그건 차기 채주님께 물어보든가.”
“차기 채주? 자(子) 사형?”
“하하하- 이렇게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가 다 있나. 자백정이 어떻게 차기 채주요? 인 천두님이 차기 채주시지.”
그 말에 해백정이 이를 더더욱 꽉 악물었다.
“인백정…… 셋째 사형이 결국 하극상을 일으키는구나. 스승님을 시해한 흉수도 분명…….”
“자, 길게 말할 것 없소. 갑시다. 인 천두님이 특별히 그대는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했으니.”
백두 여섯 명이 굵은 밧줄을 꺼내 들었다.
나머지 십두들은 활과 화살을 들어 이쪽을 겨누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부웅-
해백정이 손에 든 돌을 던졌다.
빠각!
그 돌은 바로 앞에 있는 바위를 향해 날아갔고 그대로 산산조각 났다.
퍼퍼퍼퍼퍼퍽!
엄청난 힘에 의해 터져 나간 돌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활을 들어 해백정을 포위하고 있던 궁수들의 눈에 돌조각이 튀었다.
“으악!?”
몇몇 이들이 화살을 엉뚱한 방향으로 쏘아 보냈다.
몇 개의 화살이 아군의 팔과 다리에 꽂히는 순간, 둥그런 포위망이 약간 허물어졌다.
해백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른 돌을 주워 들었다.
“해 천두! 포기하시오!”
여섯 백두들이 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해백정은 이를 악물고는 자갈들을 걷어찼다.
퍼퍼퍼퍽!
그녀의 발등이 깨지며, 핏방울과 함께 자갈과 흙이 비산했다.
백두들이 몸을 웅크리고 그것을 막는 순간, 해백정은 물가에 튀어나와 있던 나무토막 하나를 집어 들었고 그것으로 옆에 있던 십두 하나의 머리통을 깨 놓았다.
…빠각!
사람 머리가 터져 나가는 소리.
뜨거운 핏물이 흩뿌려져 해백정의 차게 식은 몸을 덥혀 준다.
“차라리 여기서 골통이 깨져 뒤지는 게 낫지. 인백정 그 새끼가 채주 되는 꼴을 볼 바에야.”
해백정은 침을 한번 퉤 뱉고는 바닥에 떨어진 무쇠 철퇴를 집어 들었다.
방금 전 대가리를 깨 죽인 십두가 들고 있던 무기였다.
백두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해 천두. 진정하시오. 우리들은 그대를 죽이기 위해 온 것이 아니외다.”
“인 천두님께서 약속하셨소. 그대를 살려서 데려오면 모두를 중히 쓸 것이라고. 해 천두 그대도 마찬가지요.”
“어차피 전 채주는 이미 죽었는데 무슨 충성을 다하겠다고 그러오?”
한 백두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 해백정의 꼭지를 돌려 버렸다.
“죽긴 누가 죽어!”
그녀가 무쇠 철퇴를 휘둘렀다.
“우리 스승님은 안 죽었어!”
묵직한 철퇴가 살벌한 바람 소리를 내며 휘둘러졌다.
빠-캉!
백두 하나가 칼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다가 공연히 칼만 잃어버렸다.
동강 나 부러진 칼날이 백두의 목에 꽂혀 시뻘건 피를 뿜어낸다.
“안되겠다! 팔다리 몇 개는 잘라야겠어!”
“목숨만 살려서 가면 된다!”
“그물 갖고 와! 던져!”
수적들답게 그물을 항상 들고 다니나 보다.
그들은 쫀쫀하게 짠 그물을 몇 겹으로 던져 해백정에게 씌웠다.
부웅- 붕!
해백정은 철퇴를 휘둘렀으나 그것은 그물을 찢기에는 너무 뭉툭했다.
더군다나 물살에 휩쓸려 오느라 지치고 부상당한 상태로는 더더욱 무리였다.
“으으윽!”
해백정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백두들의 칼끝이 더더욱 날카롭게 조여든다.
그녀가 팔다리를 잘린 채 사로잡히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바로 그 순간.
…빠각!
골통이 바스라지는 소리와 함께, 후미에 있던 백두 하나가 돌 맞은 개구리처럼 나자빠졌다.
“……!?”
고개를 돌린 수적들의 시야에 누군가가 보인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산봉우리 위에서 곤을 든 소년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내려오고 있었다.
“……인백정이라.”
이 세상에는 끌면 안 되는 것이 있다.
산적들은 그런 금기시되는 것을 끌어 버렸다.
“그자에 대해서 더 말해 봐라.”
바로 추이의 관심 말이다.
* * *
긴 사건이 아니라서 길게 묘사할 수도 없었다.
추이는 산봉우리에서 내려오자마자 살아남은 수적들을 모조리 곤으로 때려 죽였다.
단지 그뿐이다.
산 자에게 묻는 것보다는 죽은 자에게 묻는 것이 더 솔직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추이는 그렇게 했다.
츠츠츠츠츠츠츠……
추이는 수적들의 시체에서 창귀들을 뽑아냈다.
머리가 움푹 꺼지고, 목이 옆으로 꺾이고, 배와 가슴에 구멍이 난 창귀들이 시뻘건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추이는 창귀들이 일러바치는 것을 묵묵히 들었다.
一. 장강수로십이채의 채주가 죽었다.
二. 채주가 거둔 열두 명의 제자들은 채주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다.
三. 현재 해백정을 제외한 열한 명의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채주 자리를 놓고 겨루는 중이다.
四. 거기서 해백정은 모종의 이유로 제외되었다.
추이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강의 주인이 죽어서 아랫것들이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는가.”
판단은 짧았다.
“별것 아니었군.”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닌 모양이다.
“닥쳐!”
추이는 별안간 날아드는 곤봉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서는 해백정이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상처의 피를 지혈한 그녀는 어느 정도 회복된 힘을 바탕으로 추이를 향해 곤봉을 겨누었다.
“채주님이! 스승님이 돌아가셨을 리 없어! 그분은…… 강하다고!”
“뭘 어쩌라는 거냐. 한낱 수적 도당의 두목 따위에는 관심 없다.”
“하, 한낱? 이 자식…….”
해백정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추이는 귀찮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지만, 그렇다고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잘 생각해라. 여기는 물 위도 아니다.”
“스승님을 모욕한 새끼는 죽인다.”
해백정은 추이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추이 역시 해백정을 살려 둘 생각은 아니었다.
‘우선 창귀로 만든 뒤에 정보나 캐내 볼까?’
해백정 정도 되는 고수를 창귀로 만든다면 공력 증진에도 좋고 또 양질의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나게 될 ‘인백정’이라는 인물에 대한 정보 말이다.
‘……옛날 생각나는군.’
추이는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회귀하기 전, ‘사형(師兄)’과의 기억을 말이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