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68화 (68/110)

68화 장강의 수적들 (2)

바다처럼 넓은 강.

투명하게 출렁이는 물결 아래로 열 길이나 되는 깊은 강바닥이 들여다보인다.

하지만 불과 한 길밖에 되지 않는 사람의 속은 전혀 들여다볼 수 없다.

“…….”

여인에게는 추이가 바로 그랬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

흘러가는 물결을 보며 그저 무심하게 앉아만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결국 여인이 먼저 면포를 벗었다.

펄럭-

크고 아름다운 눈 아래로 칼자국 흉터가 드러났다.

그것은 그녀의 콧잔등 위에 가로로 길게 뻗어 나가 있었다.

길게 늘어진 가짜 머리카락을 떼어 내니 원래의 짧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해백정. 장강수로채의 열두 천두들 중 하나가 추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해백정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추이는 여전히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비린내.”

“뭐? 그럴 리가? 새 옷에 향유를 발랐는데?”

“네 혼백까지 눌어붙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어찌 모르겠나.”

“……?”

해백정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추이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해백정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피 냄새를 맡은 창귀들이 겅중겅중 날뛰며 춤을 추어 댔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아무튼,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해백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업보 뭐 그런 걸 말하는 건가? 땡중 말코 같은 소리를 하네.”

그녀는 치마폭 속에 숨겨 놓았던 손도끼를 들어 올렸다.

“얼굴 하관을 가린 미모를 믿으면 안 되지.”

“별 차이 없는 것 같은데.”

“……그래?”

해백정이 약간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손도끼를 고쳐 쥐었다.

“아부해도 소용없어. 아무튼. 그 사망매화 놈이 없어졌으니 이제 일을 보기가 수월해졌다.”

그녀는 도끼를 들어 추이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부하를 죽인 대가를 치러야겠어.”

“해 봐라.”

추이가 그제야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두 고수의 대치가 시작되었다.

츠츠츠츠츠츠츠……

기세를 끌어올리던 해백정은 순간 코끝을 스쳐 가는 혈향에 흠칫했다.

추이의 몸에서 검붉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짙은 혈향은 분명 거기서부터 퍼져 나오고 있었다.

문득, 방금 전 추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네 혼백까지 눌어붙은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데 어찌 모르겠나.’

해백정의 이마에 땀 한 방울이 맺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이윽고, 칼날을 허리에 차고 곤을 움켜쥔 추이에게서 산과 같은 기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놈은 위험하다.’

해백정은 생각했다.

패도회에서 보았던 오자운이나 도막생은 강하기는 했으되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년은 다르다.

강하고 또한 위험하다.

인간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폭력성이라는 것을 사람 모양으로 꽉꽉 응축해 놓은 형상을 보는 듯한 느낌.

‘천살성(天殺星)이라도 타고났나? 무슨 놈의 살기가…….’

해백정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지금껏 살면서 저렇게 짙은 살기를 내뿜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한 명 있었다. 셋째 사형이 그랬지.’

별로 생각하기 싫은 인물의 얼굴을 떠올린 해백정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살기만 내뿜는다고 사람이 죽겠냐!?”

그녀는 고함과 함께 손도끼를 휘둘렀다.

추이 역시도 곤을 뻗어 해백정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까-앙!

쇠몽둥이와 쇠도끼가 부딪치며 묵직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배가 요동치며 주변으로 원형의 파장 수십 개가 겹겹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따앙! 깡! 떠-걱!

사방팔방으로 불똥이 튄다.

추이와 해백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합을 겨루었다.

빠직! 빠직! 빠직! 빠직!

그럴 때마다 배를 구성하고 있는 널빤지들이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탁!

추이가 뒤로 물러서며 뱃머리를 밟았다.

그리고 몸을 빙글 돌리며 곤 끝에 원심력을 실었다.

육각으로 네모진 묵죽의 끝이 해백정의 머리통을 향해 쇄도했다.

바로 그 순간.

“흥!”

해백정이 오른쪽 뱃전을 세게 밟았다.

…쿵! 출-렁!

배가 별안간 오른쪽으로 크게 기울며 바닥의 축이 뒤흔들렸다.

뱃머리를 밟고 회전하던 추이의 몸이 오른쪽으로 쏠리며 균형이 허물어진다.

그 틈을 타서, 해백정의 도끼가 텅 비어 버린 왼쪽으로 날아들었다.

“…….”

추이는 곤을 비틀었다.

묵죽의 반대쪽 끝이 위로 올라가 해백정의 도끼날에 부딪쳤다.

따앙- 빠각!

추이의 곤에 맞아 궤도가 틀어진 도끼날이 추이의 어깨 위로 떨어져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도끼날이 곤 끝을 스치며 옆으로 비틀어져 있었기에 추이의 어깨를 때린 것은 도끼날의 뒷면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직한 쇳덩이에 맞은 것인지라 고통이 상당하다.

추이의 왼팔이 밑으로 추욱 늘어져 버렸다.

해백정이 씩 웃었다.

“아깝다. 사망매화 아저씨처럼 외팔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는데.”

“…….”

“그래도 최소한 뼈가 빠졌을걸?”

하지만 추이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으득!

빠진 팔뼈를 반대쪽 손으로 다시 끼워 맞출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해백정은 약간의 오싹함을 느꼈다.

‘보면 볼수록 셋째 사형 같네.’

그녀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미증유의 찝찝함을 털어 내기 위해 짐짓 여유를 부렸다.

“……너는 날 절대로 못 이겨. 적어도 물 위에서는.”

그 말이 단순한 으름장은 아니었다.

출렁-

해백정이 또다시 배를 흔들었다.

그녀가 오른쪽 발과 왼쪽 발에 힘을 줄 때마다 배가 좌우로 크게 출렁거렸다.

장강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수적들은 배 위에서 무게중심을 잡는 데 도가 텄다.

해백정 역시도 이렇게 격렬하게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평지나 다름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부웅-

또다시 도끼날이 날아들었다.

추이는 곤을 들어 도끼를 막았다.

그리고 그것을 뒤로 밀어내려 했으나.

“안 된다니까?”

해백정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뱃전을 밟았다.

배가 거의 뒤집힐 듯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그 때문에 추이는 또다시 곤을 이상한 궤도로 뻗고 말았다.

쒜에엑-

해백정의 도끼날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든다.

그녀는 도끼자루 끝에 붙은 고리에 손목을 끼우고 그것을 빙글빙글 돌린 뒤 원심력을 실어 내리찍고 있었기에 훨씬 더 빠르고 강했다.

까-앙!

추이는 곤을 회수했지만 조금 늦었다.

…핏!

도끼날이 핥고 지나간 뺨에 얇은 상처가 나며 몇 방울인가의 선혈이 떨어졌다.

퐁당- 퐁-

맑은 물속으로 번져 가는 혈액.

뒤이어지는 해백정의 공세는 더더욱 매서워지고 있었다.

깡! 까-앙! 까가가가각!

도끼날은 점점 추이를 배 끝으로 몰아세운다.

추이는 곤을 휘둘러 도끼날을 막거나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이래서는 그냥 멍청하게 서 있는 과녁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바로 그때.

“……확실히, 물 위에서는 힘들겠군.”

추이가 입을 열었다.

해백정이 피식 웃으며 도끼를 휘둘렀다.

“그걸 이제 알았어?”

깨달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여기는 이미 강 한복판이고 다른 배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추이는 여전히 태연했다.

“그럼 물 위 말고.”

“……?”

“물속에서 싸워 보자고.”

“……!”

동시에, 추이가 곤을 휘둘렀다.

그것은 해백정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쩌-억!

추이의 곤이 배의 바닥을 뚫고 꽂혔다.

쑤욱- 푸슈슈슈슈슈슉!

곤이 뽑혀 나온 곳에서 물줄기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미친!?”

해백정이 입을 반쯤 벌렸다.

배가 맹렬한 속도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해백정이 배를 좌우로 흔들어 물을 퍼냈지만 소용없었다.

“들어와라.”

추이는 서서히 잠겨 가는 뱃머리에 선 채로 말했다.

그런데.

“……. ……. …….”

해백정의 태도가 조금 이상하다.

그녀는 마치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추이가 물었다.

“물에 빠지는 것이 무섭나, 수적 주제에?”

“개소리! 무섭긴 누가!”

해백정이 버럭 소리 지르는 동안에도 추이는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이윽고, 배가 거의 일자로 서다시피 했다.

추이는 물속에 가라앉은 채로 곤을 뻗었다.

촤아아아악!

물결 때문에 일그러져 보이는 곤이 해백정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바로 그 순간.

…팟! 우지끈!

추이의 곤이 반대쪽 뱃머리를 부숴 버리는 것과 동시에, 해백정이 뱃머리를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녀가 뛰어오른 반동으로 인해 배는 완전히 물에 잠겨 버렸다.

“……!”

추이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해백정이 뛰어오른 방향 저 멀리 무언가가 보인다.

펄럭-

돼지 문양의 깃발을 휘날리고 있는 배 한 척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팟! …탁! …첨벙! …첨벙! …첨벙!

해백정은 물 위에 솟아올라 있는 바위와 유목 토막을 밟고는 배를 향해 나아갔다.

배 위에는 이미 여러 명의 수적들이 활을 들고 나와 있었다.

해백정이 추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안됐구나! 내가 물에 빠지지 않아서!”

“…….”

그러는 동안 추이는 천천히 강물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으니 당분간은 강바닥에 붙어 있는 것이 가능하다.

곤이 워낙 무거운지라 추이는 위로 떠오르지 않고 강바닥에서 자세를 잡을 수 있었다.

‘예전에 패도회에서 써먹었던 수를 다시 한번 써야 하나.’

강바닥에서 곤을 있는 힘껏 휘둘러 파도를 일으키는 수법.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이곳의 물이 너무 맑아서 몸을 숨길 수가 없다는 것 정도랄까.

바로 그때.

“……!”

추이의 눈에 이상한 장면이 보였다.

맑은 물 너머로 이변이 벌어진다.

배 위에 선 수적들이 화살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물이 워낙 맑아서 화살이 어디로 쏘아지는지도 또렷하게 보였다.

핑! 피융! 펑!

수적들이 쏘아 대는 화살은 분명 해백정을 향하고 있었다.

“……!?”

해백정은 허공으로 뛰어오르자마자 자신의 귓불 아래를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에 깜짝 놀라야 했다.

“뭐, 뭐야!? 오발이냐!?”

안타깝게도 아니었다.

…퍼퍼퍼퍼퍽

그녀가 방금 전에 내디뎠던 나무토막에 화살 십수 대가 틀어박혀 호저처럼 변해 버렸다.

쉬익-

화살 한 대가 그녀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짜각!

해백정은 도끼를 휘둘러 화살을 쪼개 버렸으나 결국 경공술을 유지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녀는 날아드는 화살들을 연거푸 쳐냈고 그러느라 배에는 거의 다가가지조차 못했다.

…풍덩!

결국 해백정은 물에 빠지고 말았다.

“허윽!?”

그녀는 기겁을 하며 물을 토해 냈다.

그러고는 배 위에서 낄낄거리는 수적들을 향해 외쳤다.

“이, 이놈들아! 어딜 쏘는 거야! 나다! 천두 해백정이다!”

그러자 배 위의 수적들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우리도 눈이 있습죠.”

“보면 압니다, 천두 나으리.”

“거기 그렇게 허우적대고 계시니 퍽 보기 좋습니다요.”

그들은 배 위에 걸린 깃발을 내려 버렸다.

펄럭-

돼지가 그려져 있던 기가 강바람에 떠밀려 저 멀리 사라졌다.

“안 그래도 계집년 밑에 있기가 쪽팔렸는데, 잘됐다.”

“이참에 인백정(寅白丁)님 밑으로 들어가서 인정받는다.”

“궁수! 사격 개시! 저 암퇘지를 잡아 죽여라!”

활시위를 당기는 수적들의 눈에 독기가 잔뜩 올라 있는 것이 보인다.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선상반란(船上叛亂)이었다.

창귀무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