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수성수자지명(遂成豎子之名) (6)
남궁율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입을 반쯤 벌렸다.
오자운의 머리카락이 최후의 몇 걸음을 내딛는 사이에 노인의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너희들 덕분이다.”
추이가 어느새 남궁율의 뒤에 서 있었다.
“너희들이 계속해서 추격해 왔기에 머리카락이 저렇게 변한 것이겠지. 격심한 과로와 슬픔, 억울함 때문에 말이야.”
“그, 그건…….”
남궁율은 쩔쩔맸다.
그녀 뒤에 있는 무림맹의 무사들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추이는 혀를 한번 쯧 하고 찼다.
그러고는 곤을 들어 올려 비무극의 시체를 가리켰다.
“혈도가 눌려 있는 동안 대충 들었을 것이다. 저들 사이에 어떤 악연이 있었는지 말이야.”
“…….”
“이만하면 사망매화라는 인물에 대한 누명은 벗겨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추이의 말에 무림맹의 무사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에는 화산파 출신의 도사들도 다수 끼어 있었다.
이윽고, 추이는 남궁세가의 자월특작조원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어쩔 거지? 나와 한번 더 붙어 볼 텐가?”
“…….”
추이의 말에 그들은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삼림 속에서 이미 한번 호되게 당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렇다.
그때. 남궁율이 앞으로 나섰다.
“사망매화가 무림공적으로 몰린 것은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썼기 때문이라는 사실, 확실히 인지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이자 진범인 비무극의 수급을 무림맹으로 전달하겠습니다. 진상규명은 처음부터 다시,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동시에 비무극이 최후의 순간 저를 살인멸구(殺人滅口) 하려 했다는 사실 역시도 화산파 측에 엄중하게 항의할 계획입니다.”
그녀의 말에 화산파 무인들의 고개가 더더욱 떨구어졌다.
하지만 추이의 표정은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너희들의 안위를 위한 조치지.”
“……예?”
“진상규명이라는 것은 임무에 실패한 네놈들이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는 과정일 뿐이잖나. 진짜 피해를 입은 자에 대한 조치가 아니라.”
“…….”
추이의 말에 남궁율의 미간이 찡그러졌다.
그녀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추이를 향해 말했다.
“저는 사망매화 사건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화산과 무림맹의 소관이지요.”
“남궁세가 역시 정도십오주의 하나가 아닌가? 무림맹의 추격조 중 남궁세가 출신이 하나도 없진 않을 텐데?”
추이의 말을 들은 몇 명인가의 무림맹 무사가 고개를 슬쩍 떨어트린다.
그들은 남궁세가 출신이었다.
남궁율이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그녀는 오자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자운 선배님께 이 무림말학이 감히 용서를 청합니다. 저희 남궁세가는 물론 무림맹 역시도 선배님의 명예를 복구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을 약속드리는…….”
“됐다.”
가만히 서 있던 오자운이 별안간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린 그의 눈빛은 전보다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맑고 잔잔한 그 눈빛을 제대로 맞받을 수 있는 이는 이곳에 추이 하나밖에 없었다.
아무도 오자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한다.
어떻게 감히 그러겠는가.
자신들이 지금껏 애꿎은 사람에게 칼을 들이밀고 죽일 듯 쫓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오자운이 하는 말은 모두의 눈에 눈물이 핑 돌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럴 수 있는 것이었다. 몰랐으니까.”
그 말에 남궁율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가, 감사합니다. 선배님. 제가 돌아가게 되면 책임지고 선배님의 명예를 회복…….”
“단.”
오자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는 따듯하게, 하지만 단호한 말로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이니까.”
“…….”
“그리고 인격이라는 것은 그것을 책임지고 수습하는 과정에서 결정되는 법.”
“……?”
“그렇기에 나는 마교로 넘어간다.”
“……!”
남궁율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오자운은 그들의 앞에서 쐐기를 박았다.
“나는 중원을 등질 것이다. 그리고 처음에 마음먹었던 대로 마교에 귀의할 것이야.”
“…….”
“너희들을 뉘우치게 만들 생각도, 용서할 생각도, 명예를 회복할 생각도 없다. 그저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뿐.”
오자운의 말을 들은 좌중들 사이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는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도 없다.
완전히 파국이 난 사이,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된 감정.
오자운은 남궁율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들에게 최후의 양심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마교로 가는 내 뒤를 더 이상 쫓지 말아라. 단지 그뿐이다.”
“…….”
남궁율은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도무지 할 말이 없었다.
정도의 걸출한 인재, 차세대 거목이 될 떡잎이 뿌리채로 마교로 넘어가게 되었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을 악적으로 몰아넣은 정파의 수뇌부 탓이었다.
“…….”
“…….”
“…….”
오자운의 인품과 무위를 알고 있는 화산파의 무사들은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장차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었을지도 몰랐을 영웅을 이제 적으로 삼게 생겼다.
안타깝고 또 절박한 일이었지만, 어떻게 손쓸 방도가 없었다.
결국. 남궁율은 추이에게 중재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오 선배가 다시 정도로 돌아오시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다만 마교로 가시는 것만은 조금…… 혹 이 점을 전달해 주실 수는 없으실까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추이의 반문에 남궁율은 잠시 고민했다.
이윽고, 긴 침묵 끝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만약 당신이 오 선배를 설득하는 것을 도와주신다면, 남궁세가는 당신에 대한 원한을 모두 잊어버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자운을 설득하여 마교로 귀의하는 것을 막아 준다면 남궁세가는 더 이상 추이를 쫓지 않겠다.
이것이 남궁율의 조건이었다.
하지만 추이는 그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잊지 않아도 된다.”
“……뭐라고요?”
“기억하고 싶으면 기억해라. 쫓아오고 싶으면 쫓아와라. 남궁세가가 무엇을 할 수 있나?”
그 말에 남궁율의 미간이 와락 찡그려진다.
하지만 추이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당장 추이가 이곳에서 살수(殺手)를 쓴다면 살아서 이 산을 내려갈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으리라.
추이는 남궁율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남궁천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내가 남궁세가에 잡힐 일은 없다. 그러니 그런 제안은 들을 가치도 없지.”
“…….”
모욕에 가까운 지적이었지만 현실을 깨닫는 것에는 즉효약이었다.
결국, 남궁율은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달려 이런 오지산간까지 왔건만,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추이에게 생포당했을 때만큼이나 절망적이었다.
남궁율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추이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당신은 도대체 누군가요? 왜 남궁세가에서 그런 일을 벌였고, 왜 오 선배를 도왔던 건가요?”
“네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추이는 남궁율을 철저히 무시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남에게 이런 무시를 받아본 적 없는 남궁율은 이제 분노를 넘어 거의 멍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남궁율에게 추이가 한마디 했다.
“너는 안락한 네 집으로 돌아가서 맡은 역할이나 똑바로 수행해라.”
“맡……은 역할?”
남궁율이 황당하다는 듯 되묻자 추이는 마지막으로 짧게 첨언했다.
“촉새 역할 말이야.”
즉,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니기나 하라는 말이었다.
* * *
남궁율이 이끄는 추격대가 먼저 산에서 내려갔다.
이제 그들은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과 무림맹이 있는 하남으로 향할 것이다.
산봉우리 위에는 추이와 오자운만이 남았다.
그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가파른 절벽을 타 넘고 드넓은 호수를 건넜으며, 북적이는 인파 속을 뚫고 가기도 했고 사람 하나 없는 사막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이윽고. 천산산맥으로 통하는 잔도가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끝없이 뻗어 있는 외줄다리였다.
추이는 이곳에서 오자운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가라.”
“…….”
오자운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는 추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같이 가지 않겠나?”
“같이 가지 않겠다.”
“그런가.”
“그렇다.”
권유와 거절, 모두 짧았다.
오자운은 입가에 건조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지막으로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그래라.”
추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오자운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때 말이다. 어떻게 비무극이 실토할 것을 알고 증인들을 미리 깔아 놨었나?”
그는 그것이 못내 궁금한 모양이었다.
추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원래 범죄자들은 자신의 범행을 숨기고 싶어 하면서도 은근히 드러내고 싶어 하는 양가적인 심리가 있지. 그래서 판을 깔아 줬을 뿐이다.”
“흐음. 그래도 놈이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나. 그랬으면 어떻게 했을 텐가?”
오자운의 반문을 들은 추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그냥 다 때려죽이는 거지 뭐.”
그 대답을 들은 오자운은 웃음을 터트렸다.
단장애의 물안개가 저 뒤로 밀려날 정도로 크게, 그리고 시원하게.
“역시 자네는 미쳤어.”
“칭찬 고맙군.”
이윽고, 오자운은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약속하지. 내가 마교에 귀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자네가 어디에 있든 간에 자네의 편을 들겠네.”
“그것 고맙군.”
추이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자운은 전생에서도 마교의 좌신장차사(左神將差使)까지 올라갔었던 인물이니 이번에도 알아서 잘 해낼 것이다.
이제 정말로 작별의 시간이 되었다.
저벅- 저벅- 저벅-
오자운은 왼팔의 소매를 펄럭이며 잔도 위를 나아갔다.
추이는 멀찍이 떨어진 절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때 가장 스승이라는 존재에 가까웠던 그의 뒷모습을.
……바로 그때.
“어이!”
다리 위로 얼마간 걸어가던 오자운이 갑자기 추이를 향해 돌아섰다.
이윽고.
홱-
오자운이 추이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그것은 허공을 빙글빙글 날아와 추이의 발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푹!
추이는 땅바닥에 박힌 것을 보며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칼자루가 없는 칼날.
일곱 개의 붉은 보석이 북두칠성의 모양처럼 박혀 있는 보검의 날이었다.
매화검수.
화산파의 최고 기재, 차세대를 이끌어 나갈 걸물들에게만 수여되는 보검 중의 보검이다.
추이는 왼손으로 검날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묘하게도 오른손에 들려 있는 곤 묵죽과 서로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오자운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때는 내 보물이었으나 이제는 필요 없는 것이네! 나보다는 자네에게 더 필요하겠더군!”
그는 안개 너머로 서서히 사라져 간다.
“자네는 역시 곤보다는 창이 어울려!”
후련한 미소만을 남긴 채로.
* * *
한편.
산을 내려온 남궁율은 곧장 남궁세가로 향하고 있었다.
자월특작조의 조원 하나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가씨. 본가에 해당 사실을 보고하고 나신 뒤 무림맹으로 가시렵니까?”
“…….”
잠시 무언가를 고민하던 남궁율.
그녀는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는 무림맹으로 안 돌아갑니다.”
“네? 그럼 계속 본가에 계실 계획이십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본가로도 가지 않습니다.”
“네에? 그, 그럼 어디로 가시려고요?”
남궁율의 말에 모두가 당황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할아버님의 지엄한 명령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예? 명령이라 하심은…….”
“삼칭황천 생포.”
“……!”
무사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진다.
하지만 남궁율은 진지했다.
그녀는 의지 넘치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돌아가세요. 무림맹 분들은 무림맹으로 가시면 되고, 본가의 사람들은 본가로 가시면 됩니다.”
힘에서도 밀렸고 명분에서도 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패배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궁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작정,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하기로 결정했다.
“저는 기필코 그자를 잡아서 본가로 데려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저 혼자만의 힘으로요.”
스무 살 인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품은 결의(決意)였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