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수성수자지명(遂成豎子之名) (5)
졌다가 다시 피어나는 매화.
사망매화 오자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칼자루가 단단히 잡혀 있었다.
칼날이 빠진 채, 세로로 깊게 쪼개져 있는 칼자루.
마지막 순간, 비무극의 칼이 쪼개 놓은 것은 오자운의 늑골이 아니라 그가 쥐고 있었던 칼자루였던 것이다.
…툭!
오자운은 손에 꽉 쥐고 있었던 칼자루를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칼날을 맨손으로 집어 들었다.
꽈악-
칼날이 살갗을 파고들어 뼈에 가 닿았다.
손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오자운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칼날을 들어 올렸다.
“…….”
비무극은 귀신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오자운을 마주했다.
이윽고, 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래. 자네가 귀신이든 사람이든, 이제 결착을 낼 때가 되었지.”
오래된 악연. 질긴 원한. 이제 이 모든 것들을 끊어 낼 순간이 왔다.
비무극이 비틀거리며 칼을 들었다.
오자운 역시도 비틀거리며 칼을 뻗었다.
날카롭게 곤두선 두 개의 검극이 서로의 심장을 향해 아름다운 매화를 피워 냈다.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총 스물네 개의 초식에 울고 울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간다.
서서히 그쳐 가는 빗속에서 휘날리는 꽃잎.
붉고 푸르게 흐드러지는 한 장 한 장에 이슬처럼 맺힌 젊은 시절, 좋았던 나날들.
하지만 결국에는 다 옛날 일이다.
바람이 불면 홍진(紅塵)은 쓸려 가고, 해가 뜨면 항해(沆瀣)가 사라지듯,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을 떠나보낼 때였다.
제 일 초식 매화노방(梅花路傍), 제 이 초식 매화접무(梅花蝶舞), 제 삼 초식 매화토염(梅花吐艶), 제 사 초식 매개이도(梅開利導), 제 오 초식 매화낙섬(梅花落暹), 제 육 초식 매화낙락(梅花落落), 제 칠 초식 매화빈분(梅花頻紛), 제 팔 초식 매화혈우(梅花血雨), 제 구 초식 매화구변(梅花九變), 제 십 초식 매화만개(梅花滿開), 제 십일 초식 매화인동(梅花忍冬), 제 십이 초식 매화점개(梅花漸開), 제 십삼 초식 매화점점(梅花漸漸), 제 십사 초식 매화난만(梅花爛漫), 제 십오 초식 낙매분분(落梅紛紛), 제 십육 초식 낙매성우(落梅成雨), 제 십칠 초식 매영조하(梅影造河), 제 십팔 초식 매인설한(梅忍雪寒).
스친다.
맞지 않는다.
비무극의 칼과 오자운의 칼은 서로를 마주하지 않은 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분명 같은 공간에서 같은 궤도로 휘둘러지고 있지만 둘의 칼은, 둘의 운명은 조금의 교차점도 없이 그저 덧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둘 사이에서는 지금껏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매화잎들이 하염없이 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
“…….”
“…….”
남궁율을 비롯한 이들은 멍한 표정으로 둘의 결전을 바라본다.
칼과 칼은 이제 서로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진한 향(香)을 자아내고 있었다.
제 십구 초식 매향성류(梅香成流).
매화의 향기가 물결을 이루어 넘실거린다.
그것은 두 매화검수의 칼끝이 피워 내는 매화가 더 이상 환상 속의 존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영역까지 닿고 있다는 증거였다.
제 이십 초식 매향침골(梅香浸骨).
매화의 향기는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뼈까지 스며들 정도로 진해지고 있었다.
만약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왔다면 이곳이 전설 속에 등장하는 도원경(桃源境)이 아닌가 착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이십일 초식 매향취접(梅香醉蝶).
남궁율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매화 향기에 취했다.
그들은 꽃잎에 홀린 나비처럼, 저도 모르게 격전지를 향해 조금씩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제 이십이 초식 매유청죽(梅遊靑竹).
그리고 그 와중에도 두 명의 매화검수는 청죽처럼 꼿꼿하게 선 채 계속해서 검법을 전개해 나가고 있었다.
둘 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로.
제 이십삼 초식 매향성류(梅香成流).
둘을 사이에 두고 매화의 향기는 새로운 흐름을 이루어 커다랗게 출렁거린다.
이는 열아홉 번째의 초식과 궤를 같이하고는 있으나, 그 규모 면에서 훨씬 더 광활하여 마치 붉은 용과 푸른 용이 뒤엉켜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 같았다.
휘이이잉-
감미로운 바람이 일어나 꽃잎을 흩날린다.
마치 꽃밭 사이를 노니는 신선처럼, 오자운과 비무극은 고아한 움직임을 보이며 주변의 모든 것들을 매혹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먼발치에서 보았을 때의 이야기.
정작 이 도원경의 중심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 두 도사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퍼억!
오자운의 어깨에서 핏물이 튀며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나왔다.
뎅강-
비무극의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잘려 나갔다.
피어나는 매화 꽃잎 한 장이 몸에 닿을 때마다 어김없이 선혈이 낭자하며 살점과 뼛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비산하고 있었다.
강한 것이 약한 것을 누른다.
빠른 것이 느린 것을 깎아낸다.
날카로운 것은 부드러운 것을 베어 가른다.
그것은 꽃잎의 아름다운 빛깔과 향기에 가려져 있는, 냉혹하면서도 무시무시하며 처절하기까지 한 현실(現實) 그 자체였다.
그때.
문득, 오자운의 입이 열렸다.
“……그래. 너는 검로(劍路). 나는 금로(金路). 옛날 일이라 잊고 있었군.”
극도로 건조한 음성이 폐 속 깊숙한 곳에서 탄식처럼 흘러나왔다.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 흐드러지는 꽃잎 너머에서, 오자운은 비무극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무극이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 역시 가뭄을 맞은 논두렁처럼 쩍쩍 갈라져 있었다.
“나에게는 옛날의 일이 아니었다. 나는 늘, 언제나 너를 시기했다. 훈련이 끝나면 매번 낮잠만 자면서도 나보다 뛰어났던 너를.”
매일매일 피땀 흘려 가며 노력했는데도 상대는 어느새 저만치 앞서 있다.
심지어 게으름을 피우면서도.
비무극의 칼끝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 시점부터였다.
하지만 오자운은 비무극의 말을 부정했다.
“나는 게을러서 낮잠을 잤던 것이 아니야.”
“……?”
비무극은 미간을 찡그린다.
오자운이 말을 이었다.
“나는 매 훈련, 매 훈련을 실전이라고 생각했다. 연무장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칼을 들고 나를 노린다고 가정했지.”
“…….”
“매일매일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돌아다녔던 셈이야. 내가 빠르게 강해질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
“전쟁을 끝내고 나면 당연히 지쳐서 쓰러지듯 잘 수밖에 없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지. 숨어서 잤던 것 역시도 전쟁터를 날아다니는 눈먼 화살에 맞을까 봐 두려워서였다. 훈련은 끝났어도 암시에서는 바로 깨어 나오지 못했으니까.”
“…….”
비무극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자운 역시도 더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두 명의 매화검수가 서로를 지척에서 마주 보게 되었다.
일척도건곤(一擲賭乾坤).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는 마지막 승부수가 던져졌다.
진한 매화향을 머금은 칼날이 붉고 푸른 궤적을 그리며 서로를 향해 교차했다.
제 이십사 초식 매화만리향(梅花萬里香).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진수(眞髓)이자 오의(奧義).
매화의 향이 만 리 바깥까지 퍼질 정도로 진해진다.
지켜보던 이들은 환상 속의 향기를 맡으며 홀린 듯 눈을 감았다.
“…….”
“…….”
“…….”
눈을 감을수록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온통 색색으로 물든 공간 속에서 두 자루의 매화검이 뒤얽혔다.
오자운. 비무극.
같은 항렬의 두 매화검수가 서로를 마주 본다.
오랜 시간 같은 곳에서 자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것을 입고, 같은 훈련을 해 왔던 사형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
연무장에서 수도 없이 견식했던 서로의 검인지라 어떻게 피하고, 어떻게 받아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을 맞이하려는 이때, 딱 하나 달라진 것이 있었다.
비무극은 그대로였으되 오자운은 변한 것.
그것은 바로 스스로 잘라 낸 왼팔의 부재였다.
왼팔이 덜어낸 딱 그만큼의 무게.
아주 조금 더 가벼워진 오자운의 칼이 아주 조금 더 빠르게 뻗어 나갔다.
…핏!
소리는 작고 가늘었다.
오자운의 칼끝에서 피어난 매화잎이 비무극의 목을 스치듯 어루만졌다.
“…….”
“…….”
둘은 서로를 등진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서 있었다.
비가 천천히 멎어 간다.
기나긴 밤이 지나며 새벽의 여명이 비쳐 오기 시작했다.
‘…….’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소년.
한 살 터울의 믿음직한 형.
오자운의 눈에는 어린 시절, 화산에 막 입문하던 날의 비무극이 보인다.
‘…….’
맑은 눈을 가진 더벅머리 꼬마.
부잣집 자제면서도 권위의식 따위는 조금도 없이 명랑하던 동생.
비무극의 눈에는 어린 시절, 화산에 막 입문하던 날의 오자운이 보인다.
둘은 서로를 등진 채 서로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오자운은 울었고, 비무극은 웃었다.
이윽고. 비무극의 입술이 달싹였다.
“……마침내. 더벅머리 아이의 이름이 천하에 날리게 되었구나.”
동시에. 비무극의 목 아래가 붉게 젖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그대로 목 위에 얹어져 있었으되, 목젖을 중심으로 붉은 가로선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선 아래의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어 간다.
오자운의 검은 비무극의 목을 완전히 절단하고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목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던 것이다.
결국.
풀썩-
비무극은 그 자세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그때까지도 그의 머리는 목 위에 그대로 올려져 있었다.
붉게 번지는 매화향을 뒤로한 채, 오자운은 비틀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걸음걸이.
이윽고, 오자운은 손아귀를 파고들었던 칼날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땅그랑-
붉게 갈라진 손아귀 틈으로 하얀 뼈가 드러나 보인다.
피가 폭포수처럼 줄줄 쏟아져 내리고 있었으나 오자운은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 그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궁율이 저도 모르게 오자운을 향해 한마디 했다.
“진인(眞人)…….”
이윽고. 무림맹의 추격자들이 오자운의 앞에서 비켜섰다.
무리가 두 갈래로 갈라지며 가운데로 길이 트였다.
그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서 지나가는 오자운에게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
“…….”
걷혀가는 먹구름 사이, 드리워지는 새벽의 광명이 그를 비춘다.
그 아련한 빛무리 너머에 강아와 맹영의 얼굴이 보인다.
그들은 오자운을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오자운은 울면서 웃었다. 웃으면서 울었다.
피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동시에, 환하게 번져오는 햇살 아래에 오자운의 모습이 훤히 드러난다.
남궁율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며 경악했다.
“머, 머리카락 색이……!”
오자운의 머리카락이 어느덧 하얗게 새어 있었던 것이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