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수성수자지명(遂成豎子之名) (4)
하늘이 더더욱 검게 물들었다.
먹구름은 너무나도 무거워서 금방이라도 지상을 향해 푹 꺼질 것처럼 보였다.
콰릉-
한 줄기 번개가 하늘을 희게 가로지른다.
쏟아지는 폭우 아래에서, 비무극은 찢겨 나간 왼뺨을 씰룩거렸다.
그는 남아 있는 오른쪽 입술을 말아 올리며 기괴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사매를 사랑했다.”
“…….”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지. 설사 사매가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해도, 먼발치에서 그녀의 앞길을 응원할 마음이었다.”
비무극의 눈에서 시퍼런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매는 오자운, 저놈과 맺어졌어야 했다. 그래야만이 그녀는 행복할 수 있었어. 그래서 나는…….”
“오자운의 아내를 독살했나? 사매가 오자운과 이어질 수 있도록?”
추이가 끼어들었다.
비무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녀를 위해서였다. 사매의 고운 얼굴이 상사병으로 인해 시름시름 말라 가는 것을 참을 수 없었어. 오자운, 저놈은 싫지만…… 저놈과 함께여야만 그녀는 살아날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아.”
“그럼 사매를 겁간하고 죽인 것은 누구냐?”
“흐흐흐흐…… 뭘 물어보느냐?”
비무극이 추이를 향해 으르렁거리듯 말을 계속했다.
“그날 밤. 초막에 있었던 사람은 사매와 나뿐이었다.”
그는 옛일을 회상했다.
몰아치던 비바람, 요란하던 천둥 번개,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삐그덕대던 초막.
여인의 마음을 거절하고 떠나버린 남자.
떠나 버린 남자의 등을 보며 구슬프게 울던 여인.
그리고 그런 여인을 멀리서 훔쳐보던 또 다른 남자.
비무극은 초막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엎드린 채 서럽게 울던 맹영을 향해 외치고 또 외쳤다.
찢어진 입술이 뒤틀리며, 비무극의 미소가 한층 더 기괴하게 변했다.
“놈의 아내를 죽였지만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오자운, 저놈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꼴통이었어. 사매는 여전히 말라죽어 가고 있었다. 그날 초막에서 저놈이 쐐기를 박았지! 사매는 저놈의 초막 안에서 자결하려 했다!”
“…….”
추이는 곤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비무극을 쳐다보았다.
비무극은 구역질을 하듯 자신의 감정을 토해 놓았다.
“사매는 너무했다! 내게 너무했어! 두 남자의 인생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고도 자기는 마음 편하게 이승을 뜨겠다고? 그러면 나는!? 남겨진 나는! 아내를 잃은 저놈은!? 남겨진 저놈은! 이 얼마나 무책임한 여인이더냐! 남자를 홀려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거든 최소한 본인이 행복하게 살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니더냐! 어찌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들어! 어!? 그게 대체 무어냔 말이야!”
하늘이 노했을까?
또다시 천둥이 친다.
그것은 비무극의 바로 옆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쾅!
비무극의 주변이 일순간 하얗게 물들며, 옆에 있던 고사목에서 시뻘건 겁화가 피어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비무극은 계속해서, 아예 오자운의 시체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소리 지르고 있었다.
“네놈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여인의 치마폭에 휘감겨 모든 걸 잃어버린 몸이야! 머저리 오자운아! 가엾은 오자운아! 나는 너의 형제 비무극이다! 너는 거기에 죽어 있지만! 나 역시 여기에 죽어 있도다! 오오! 사매! 맹영 사매!”
감정은 점점 격해진다.
들불처럼 부글부글 끓어 곧 폭발할 것처럼 보였다.
그때. 비무극의 격정에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있었다.
“알겠고.”
추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비무극의 사연에는 조금도 관심 없다는 듯, 그저 고요한 눈으로 비무극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묻는 말에 대답이나 똑바로 해라.”
“…….”
“그 맹영 사매라는 여인을 겁간하고 죽인 게 너란 말이지?”
“…….”
비무극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는 입을 다물었다.
“…….”
“…….”
쏟아지는 비. 말 없는 두 남자.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비무극의 입이 열렸다.
“겁간은 아니었다.”
“그럼 뭐냐?”
“그날 밤. 사매는 내게 제안했다.”
비무극의 눈이 붉게 물들어 간다.
실핏줄이 터져서 뜨거운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룻밤. 단 하룻밤. 나를 오자운으로 생각하겠다고. 자신을 안아 달라고.”
“…….”
“그리고 그 대신…… 자신의 목숨을 끊어 달라고…….”
비무극의 목소리는 작아서 빗소리에 묻힐 뻔했다.
추이가 그 끝을 잡아 분명히 하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공감도 안 되는데 자꾸 감성 팔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좀 해 봐라.”
“뭘 말이냐?”
“너는 합의하에 했다. 그렇게 주장하고 싶은 거잖나.”
“그렇다.”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추이의 질문에 비무극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면 뭘 어떻게 증명할까? 오자운, 저 바보 놈처럼 자기 왼팔이라도 끊으란 말이냐?”
“증거는 없다는 말이로군.”
“그렇다. 하지만 맹세한다. 내 말에는 한 점의 거짓도 없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끝까지 그녀를 위했다. 결코 겁간을 한 것이 아니야.”
“네 말이 사실이라고 치자. 하지만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던 맹영이라는 여인의 정신이 또렷한 상태는 아니었을 것 같군. 아마 너에게 안긴 것도 그저 자포자기하는 마음에서였겠지. 이른바 심신미약이라는 것이다.”
“그래. 그럴 수 있었겠지. 그날 밤 초막에 있었던 이들 중 제정신인 이는 없었다. 나도, 그녀도, 저놈도.”
“아니지.”
“……?”
추이는 비무극의 말을 끊고는 친히 정정해 주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 다른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자. 정상.”
“…….”
“사랑하는 남자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아서 비관하는 여자. 정상”
“…….”
“그런 상태의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그 대가랍시고 그녀를 죽인 남자. 비정상.”
추이의 고요한 눈동자가 흔들리는 비무극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한다.
“고로. 다 정상인데 너만 비정상인 것이다.”
“후후…… 후후후후…….”
비무극은 웃었다.
그의 광소(狂笑)는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와 뒤섞였다.
“그래! 그렇다! 결국 글러먹은 것은 나 하나뿐이지! 하지만 어떠냐! 지금 이곳에 살아 서 있는 것은 나다! 다 죽었어! 사매도! 오자운도! 정상인들은 다 뒈져 버리고 여기 비정상인만 살아 숨 쉰다!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이냐!”
하지만 추이는 웃지 않았다.
다만, 그저 조용히 고개를 들어 관목 너머를 응시할 뿐.
“……들었지?”
순간, 추이의 말을 들은 비무극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뭐, 뭘 들어? 무슨 말이냐?”
“너에게 한 말 아니다.”
추이의 대답이 더욱 섬뜩하다.
비무극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리고 추이가 바라보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옮겨 놓았다.
“……!”
그곳에는 어느새인가 다른 사람 한 명이 서 있었다.
남궁율.
그녀는 이곳저곳 찢어진 옷으로 몸을 가린 채 비무극을 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은 짧게 잘려 나가 단발이 된 채였다.
추이는 남궁율을 향해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
“점혈을 약하게 했나. 그새 혈도가 풀려 버렸군.”
“…….”
남궁율은 추이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충격을 받은 듯, 멍한 표정으로 비무극을 바라보고 있었다.
“낭와진인…… 그럼 당신이…….”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달싹였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비무극 역시 한동안 굳어 있었다.
이윽고, 그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쉬익-
비무극이 칼을 휘둘렀다.
독사처럼 쏘아진 칼끝이 향하고 있는 곳은 바로 남궁율의 목젖이 있는 곳이었다.
“꺄악!?”
그녀는 자신의 코앞까지 날아들어온 참격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살초였다.
“안 되지.”
그녀의 앞을 태산처럼 가로막은 추이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까-앙!
추이는 곤을 가로로 뉘였고 칼끝을 곤 끝으로 받아쳐 튕겨 냈다.
하지만 비무극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보금자리를 침범당한 맹수처럼 사납게 외쳤다.
“비켯!”
그의 검신에서 시퍼런 검루가 폭사되었다.
그것은 추이를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남궁율만을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가씨!”
덤불숲 뒤에서 수십 개의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윽고, 자월특작조의 무사들이 달려와 비무극의 참격을 걷어 냈다.
차차차차차착-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남궁율을 감쌌다.
그들 중에는 무림맹의 추격조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
“…….”
모든 이들이 비무극을 바라본다.
하나같이 추이에게 혈도가 짚인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이들이었다.
자신을 향하는 수많은 시선들을 마주한 비무극이 뒤로 비틀비틀 물러났다.
“아, 아니야. 이건 오해다.”
오자운과 추이에게 집중하느라 풀숲 아래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는 생기를 감지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었다.
범을 잡고 운기조식을 마쳤을 때 동료들의 칼이 한 곳에 꽂혀 있었던 것을 본 것도.
그래서 그들이 이미 죽었을 것이라 섣불리 단정 지었던 것 역시도 말이다.
“오해야! 다 저놈! 저놈의 평정심을 깨트리기 위한 심계였다! 사실이 아니야! 정말이다!”
비무극은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
“…….”
“…….”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싸늘하다.
애초에 비무극의 말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남궁율을 향해 살초를 몇 번이나 전개했던 시점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셈.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궁세가와 무림맹의 추격조들은 이제 추이와 오자운을 바라보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은 오로지 단 한 명, 비무극만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듯이.
바로 그 시점에서, 추이가 곤을 들어 올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결국 매듭은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
추이의 시선은 여전히 물처럼 고요하게 흘러가 비무극의 얼굴에 고였다.
남궁율을 비롯한 이들 역시도 홀린 듯 추이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추이는 딱 한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나는 이 이상 개입하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사건의 당사자들끼리 풀어라.”
“당사자? 하하하- 여기에 당사자가 또 누가 있단 말이냐?”
비무극이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대답은 추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여기에 있다.”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위태로운 목소리.
그것을 듣는 순간 비무극은 전신의 털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목뼈가 부러질 듯 고개를 돌린 그의 눈에 유령과도 같은 형체가 보였다.
“……!”
한번 졌던 매화가 다시 한번 새롭게 피어난다.
사망매화 오자운.
그가 칼을 짚고 일어나 마주하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뒤쫓아 왔던 진범(眞犯)의 얼굴을.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