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수성수자지명(遂成豎子之名) (3)
하늘이 온통 수묵(水墨)으로 물들었다.
소년은 검은색의 곤을 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을 칠해 놓은 먹빛을 그대로 지상까지 한 획으로 내리그은 듯한 외형을 하고 있다.
추이는 묵죽(墨竹)을 든 채로 비무극의 앞을 막아섰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칼을 짚고 선 매화검수를 향해, 추이는 짧게 말했다.
“끝까지 풀겠다면 놔두겠으나, 풀지 않고 도망가겠다면 막을 수밖에 없다.”
“…….”
비무극은 이를 악문 채 추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웬 새파란 어린놈 하나가 주제를 모르고 길을 막아서나 했다.
그래서 무시하고 가거나, 혹은 일검에 쳐 죽이려 했으나…… 막상 칼을 들고 대치해 보니 상대의 기개가 예사롭지 않다.
마치 거대한 흑산(黑山)을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위압감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이윽고, 비무극의 입에서 끊어질 듯 말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군. 네놈이 삼칭황천인가 뭔가 하는 놈이로구나. 남궁세가에서 말썽을 부렸다지?”
“말썽이라는 표현으로 끝날 일이었는지는 나중에 그 여자한테 한번 물어봐라.”
남궁세가의 ‘그 여자’가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뻔했다.
비무극은 칼을 가로로 뉘며 말했다.
“남궁율, 그 아이를 어떻게 했느냐?”
그러자 추이는 대답 대신 곤을 움직였다.
바닥의 풀 사이에서 긴 의복 자락이 곤에 걸려 나왔다.
펄럭-
피 묻은 옷자락이 비바람을 맞아 깃발처럼 나부낀다.
남궁율이 얼마 전까지 입고 있었던 경장의 일부분이었다.
비무극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위에 써 놓은 글귀도 네 작품이냐?”
“그렇다.”
“내 부하들은 어디에 있지?”
“여자와 같은 곳에 누워 있을 것이다.”
“그렇군.”
비무극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부하들은 하나하나가 강한 무인이었다.”
“…….”
“그들을 모두 죽였다면 필시 네놈도 몸이 성하지는 않을 터.”
“…….”
추이는 말이 없다.
비무극은 그런 추이를 향해 제안을 했다.
“나와 네가 싸운다면 둘 중 하나는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남은 하나도 성한 몸으로 산을 내려가기 힘들 것이야.”
“뭘 어쩌자는 거냐?”
“여기에서 서로 각자 갈 길을 가는 것이 어떠한가?”
비무극은 추이를 알지 못한다.
다만 어렴풋하게 짐작만 할 뿐.
‘저놈과 오자운이 만난 시점은 얼마 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마두 둘이서 포위망을 뚫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뿐이겠지. 서로 목숨을 바쳐 가면서 위해 줄 의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오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추이는 비켜 주지 않았다.
“헛소리는 이쯤 하지.”
추이는 곤을 휘둘러 남궁율의 옷자락을 털어 버렸다.
그러고는 비무극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네놈 검법의 약점을 말해 봐라.”
“……미쳤느냐? 너에게 약점을 왜 말해야 하지?”
“널 도와주려는 것이다.”
추이는 한 점의 웃음도 없는 표정으로 비무극을 응시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빨리, 덜 고통스럽게 죽여 줄 수 있으니까.”
“…….”
비무극은 웃지 못했다.
추이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 때문이었다.
비무극이 칼을 든 채 말했다.
“과연 무림공적과 어울려 다닐 만하구나. 네놈 역시도 마교로 가느냐?”
“아니. 나는 안 간다.”
“못 믿겠군.”
“믿든 말든 상관없다.”
추이의 대답은 여전히 짧았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비무극이 칼을 떨쳤다.
허리와 오른발에서 흩뿌려진 핏물이 칼끝을 붉게 물들인다.
그렇게 붉은 매화의 궤적이 추이의 눈앞을 현란하게 채웠다.
매화노방(梅花路傍), 매화접무(梅花蝶舞), 매화토염(梅花吐艶), 매개이도(梅開利導), 매화낙섬(梅花落暹), 매화낙락(梅花落落), 매화빈분(梅花頻紛), 매화혈우(梅花血雨), 매화구변(梅花九變), 매화만개(梅花滿開), 매화인동(梅花忍冬), 매화점개(梅花漸開)…….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다음 초식들이 뻗어 나간다.
제 십삼 초식 매화점점(梅花漸漸).
피어난 매화들이 번지고 번지며 색의 물결을 일으킨다.
그것은 추이의 검은색마저 물들여 버릴 듯한 기세로 사납게 밀려 들어왔다.
제 십사 초식 매화난만(梅花爛漫).
매화가 어지럽게 휘날리며 흐드러졌다.
비무극의 칼은 추이의 퇴로뿐만 아니라 나아갈 길마저 모조리 차단하고 있었다.
제 십오 초식 낙매분분(落梅紛紛).
어지러이 날리는 매화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것은 가만히 서 있는 추이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깎아내며 붉게 흐드러진다.
제 십육 초식 낙매성우(落梅成雨).
매화잎들은 비를 이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무수한 빗방울들마저 이 매화의 색깔로 진하게 물들어 있었다.
제 십칠 초식 매영조하(梅影造河).
그렇게 매화빛깔로 물든 빗물은 바닥에 떨어져 꽃잎의 강을 만든다.
그것 역시 추이의 전신을 뒤덮어 버릴 듯 세찬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제 십팔 초식 매인설한(梅忍雪寒).
추이가 곤을 휘둘렀으나 매화잎은 갈라지지 않았다.
추운 겨울을 견뎌 한층 더 붉어진 꽃잎들은 그대로 추이의 곤에 달라붙었고 허공에 나부끼며 살점을 베어 문다.
비무극이 외쳤다.
“겸사겸사 네놈의 목도 잘라 남궁세가에 가져다주리라!”
매화검수가 선보이는 고도로 숙련된 매화검법이 추이를 몰아붙인다.
그때까지도 추이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곤을 들어 올려.
부-웅
옆으로 세차게 한번 휘저었을 뿐이다.
“……!”
비무극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퍼펑!
초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몽둥이질 한 번에 무수한 꽃잎들이 스러져 간다.
비무극은 자신의 칼등을 때리는 폭력적인 일격에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욱신- 욱신- 욱신-
곤 끝에 검신이 스쳤을 뿐인데 손목이 미친 듯이 쑤신다.
까딱 잘못했으면 그대로 칼을 놓쳤을 것이다.
퍼엉-! 펑-! 부우웅!
추이는 묵묵히 몽둥이를 휘둘렀다.
흑색의 곤이 움직이는 방식은 딱 세 가지였다.
란(攔), 곤을 돌려 밖으로 밀어내고.
나(拿), 곤을 안쪽으로 당겨 누르고.
찰(扎), 곤을 앞으로 찌른다.
추이는 이 세 가지 동작만으로 이십사수매화검법의 대부분을 파훼해 버렸다.
“……! ……! ……!”
비무극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졌다.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자신의 절기가, 공들여 한올 한올 한잎 한잎 피워낸 매화잎들이 웬 미친 난봉꾼의 몽둥이질 패악에 당해 무참히 찢겨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충격에 의해 아주 잠시 드러난 빈틈으로, 추이의 곤이 인정사정없이 우격다짐으로 밀려 들어온다.
퍼-억!
휘둘러진 몽둥이 끝에 비무극의 뺨이 닿았다.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가며, 비무극의 왼쪽 어금니 치열이 훤히 드러나게 되었다.
“……!”
비무극은 얼굴 가죽이 밀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최후의 일검을 찔러 넣었으나, 그것은 추이의 곤에 막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까-앙!
무수히 튀는 불똥과 함께, 추이는 곤대를 들어 올려 비무극의 칼을 튕겨 냈다.
그리고.
퍼-엉!
비무극의 배에 반대쪽 곤끝을 꽂아 넣었고 그대로 위로 들어 올린 뒤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철퍽! 콰쾅!
비무극은 별다른 저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곤에 옷자락을 잡힌 채 끌려다녔다.
“꺼헉!?”
빗물 웅덩이에 처박힌 비무극이 피투성이가 된 채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 앞으로 또다시 추이의 곤이 떨어져 내린다.
콰쾅!
지면이 움푹 패이며 흙탕물의 파도가 일어난다.
비무극은 황급히 바닥을 굴러 추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허억…… 허억…… 헉…….”
그는 경계하는 시선으로 추이의 움직임을 살폈다.
하지만 추이는 비무극의 공격을 막거나 되치기만 할 뿐, 따로 밀고 들어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만 느긋한 태도로, 그저 비무극의 모든 도주로들을 가로막은 채 버티고 서 있을 뿐이다.
추이는 고양이가 쥐를 괴롭히는 것처럼, 비무극을 놀리고 있는 것이다.
비무극이 씹어 내뱉듯 말했다.
“이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게냐? 왜 들어오지 않고 서성거리기만 하지?”
“궁금해서.”
“뭐라?”
비무극이 묻자 추이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것은 너와 나뿐.”
“…….”
그 말에 비무극은 시선을 흘끗 옆으로 돌렸다.
고목에 기댄 오자운은 여전히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았다.
숨소리조차도 들려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진작 죽어 버린 모양.
추이는 말했다.
“어차피 이곳이 너와 오자운의 묫자리라는 말이다.”
“…….”
“숨겨 놓은 것이 있다면 털어놓고 가라. 어차피 이제부터는 너도 오자운도 백골이 진토될 때까지 함께 있어야 할 터. 서로 흉금을 터놓고 회포를 풀어도 문제 될 것이 없겠지.”
추이의 말에 비무극이 헛웃음을 지었다.
“뭘 털어놓으라는 거냐? 네놈은 오자운과 무슨 사이지?”
“그냥 길벗이다. 오면서 사정은 대충 들었지. 나도 궁금하더군. 진범이 누구일지 말이야.”
곤에 묻은 피를 털어 내는 추이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하기 그지없다.
정말로 가벼운 호기심 같아 보였다.
“그날 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 누가 두 여자를 죽였지?”
“…….”
애초에 오자운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고 묻는 질문이다.
여느 때와 달리, 비무극은 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쏴아아아아아-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진다.
모든 것을 지워 버리고 흘러가게 하려는 듯, 그렇게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윽고, 침묵을 지키던 비무극의 입이 열렸다.
“……그래. 어차피 다 끝났으니 상관없겠지.”
그의 입에서 오래전의 진실이 흘러나왔다.
“저놈이 얼마나 기구한 삶을 살아온 놈인지, 내 말해 주도록 하마.”
비무극은 죽은 오자운을 곁눈질하며 말했다.
조롱일까?
아니면 자괴감일까?
핏물과 빗물에 젖은 그의 입가는 오른쪽만 남아 기괴하게 비틀려 있었다.
“저놈의 아내를 죽인 사람은 사매가 아니야. 그리고 사매를 죽인 자도 저놈이 아니지.”
“오, 역시. 그럼 누군가?”
추이의 반응은 가벼웠다.
정말로 지나가는 호기심인 양.
비무극이 찢겨 나간 왼뺨을 씰룩거렸다.
그러고는 해묵은 숨을 토해 내듯 대답했다.
“나다.”
오자운이 평생에 걸쳐 쫓아왔던, 바로 그 대답이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