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수성수자지명(遂成豎子之名) (2)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진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마치 쇠구슬처럼 느껴졌다.
“…….”
오자운은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날도 지금처럼 비가 내렸다.
무술대회에서 우승한 뒤 맞이한 아내 강아.
그녀와 처음으로 밤을 보내던 날에도 이처럼 비가 내렸었다.
고즈넉한 밤, 어둠 속에 울려 퍼지던 빗소리, 아른거리던 화촉.
그날은 밤이 가는 것이 원망스러웠었다.
세상을 두들기던 빗줄기가 영원하기만을 바랐던 어린 날이었다.
“…….”
그녀를 떠나보내던 밤도 이처럼 비가 내렸다.
피를 토하며 가 버린 아내.
작별인사조차 하지 못했던 그날의 밤.
아내의 무덤 앞에 지은 초막 속에서 오자운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남은 삶을 다 바쳐서라도 아내를 독살한 흉수를 찾아내리라.
기필코 놈의 심장을 꺼내 씹어 원수를 갚으리라.
그렇게 이를 부득부득 갈던 어느 날 밤.
누군가가 초막의 거적때기를 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비에 축축하게 젖은 죽립을 벗어 던지자 드러난 얼굴은 사매 맹영의 것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죽은 사람은 잊어버리라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만약 평범한 사내였다면 이 절세의 미녀가 울며 호소하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애절함과 황홀함에 넋을 놓아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자운은 달랐다.
그는 아내가 아니면 이 세상 천지간에 자신이 사랑할 사람은 없다고 했다.
그러자 사매는 더더욱 섧게 울었다.
그녀는 오자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자신을 불쌍히 생각해서라도 그만 복수를 단념해 달라고 했다.
자신이 죽은 아내를 대신할 테니 기회를 달라며 그의 발치에 엎드려 울었다.
오자운은 그녀의 마음을 거절했다.
아내 강아가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녀의 묘 앞에서 다른 여자의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사매 역시도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걸치고 있던 옷을 한 겹 한 겹 벗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새하얗게 드러난 나신으로 오자운의 몸을 끌어안았다.
비바람에 식은 사내의 육신은 차갑게 벼려진 칼날과도 같았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여인의 몸은 그것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녹였다.
……하지만.
세상의 여느 칼날들과 다른 어떠한 칼날이 하나 있어, 그것은 용광로에서도 녹지 않았다.
오자운은 끝끝내 사매의 몸과 마음을 밀어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
그는 초막을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사내가 돌아오지 않았던 그날 밤.
여인 역시도 두 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사매 맹영은 누군가에 의해 겁간당했고 목숨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
지나간 나날들을 떠올려 주듯, 비가 쏟아진다.
오자운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빗방울이 잎사귀를 때리는 소리만이 그의 목소리를 대신하여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오자운은 지금 보고 있는 것들이 과거의 편린인지 아니면 지독한 현실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초막에서 봤던 사매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서 일렁거린다.
자신을 끌어안았던 몸.
그 뜨거운 울음.
하지만 그것을 뿌리치고 춥고 어두운 길로 외로이 뛰쳐나왔던 자신.
그때 초막에서 사매의 몸을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아니, 그 전에 화산을 떠나지 않고 사매의 옆에 남기를 택했다면 앞날이 바뀌었을까?
아니, 아니, 그 전에 화산에 입관하지 않았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애초에 화산에 먼저 입관하여 아내보다 사매를 먼저 만났다면?
수많은 가정들이 과거와 현실 사이에 뒤엉켜들며 모든 것이 혼탁해진다.
“…….”
그리고 지금, 오자운은 차가운 비를 맞으며 풀숲 위에 홀로 서 있다.
폭우 속, 비무극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울려 퍼졌다.
“……너도 알겠지만. 사매는 너를 연모하였다.”
“…….”
“네가 일찍이 맞이하였던 아내 때문에 자신을 거부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
“…….”
“그래서 사매는 자신답지 않은 짓을 했다. 그뿐이야. 단지 그뿐.”
비무극의 말이 끝났다.
그 뒤로 또다시 한참의 침묵이 이어졌다.
…콰릉! 우르릉-
밤하늘에 천둥이 두어 번 지나가고 난 뒤, 오자운의 입이 열렸다.
“내 아내를 죽인 자가 사매였다고 치자.”
“…….”
“그렇다면 사매를 그렇게 만든 자는 누구냐?”
오자운은 지금껏 아내를 죽인 자와 사매를 죽인 자가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본능적인 감에 의지한 것이었다.
하지만 비무극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 사매를 그렇게 만든 흉수는 네놈이 아니던가.”
“나는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잘라 낸 내 왼팔에 걸고.”
“허허- 색마 놈의 왼팔에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나머지 그 오른팔도 마저 걸어 보거라. 그러면 온 세상천지가 너를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만은 너를 믿어 주마.”
비무극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오자운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음을 알고 다시 한번 칼을 들어 올렸다.
까-앙!
쇠와 쇠가 부딪치며 불똥이 튄다.
폭우 속에서 또다시 붉고 푸른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제 칠 초식 매화빈분(梅花頻紛).
매화가 어지럽게 피어난다.
그전까지 온 사방에 피어났던 매화들에게 어느 정도 규칙이 있었다면, 그것들이 떨구기 시작하는 꽃잎에는 따로 규칙이 없었다.
제 팔 초식 매화혈우(梅花血雨).
그렇게 흩뿌려지는 꽃잎들은 마치 피의 소나기처럼 떨어져 내린다.
꽃잎 한 장이 능히 사람의 살덩이 한 주먹을 베어 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제 구 초식 매화구변(梅花九變).
매화가 아홉 번의 변화를 거치며 모습을 변화시킨다.
그것은 풋풋한 새싹처럼 피어나 영글은 열매처럼 색을 띄기 시작했고 이내 화려함과 풋기가 공존하는 봉오리가 되었다가 곧 농염한 성체로 탈바꿈했다.
제 십 초식 매화만개(梅花滿開).
매화가 드디어 완연한 모습을 보이며 꽃잎들을 폈다.
이때부터는 꽃들이 서서히 향기마저 내뿜기 시작했다.
제 십일 초식 매화인동(梅花忍冬).
겨울을 맞아 스러지던 매화들이 별안간 봉오리로 변하는가 싶더니 다시 한번 피어날 기회를 얻었다.
끊긴 줄로만 알았던 칼의 궤적이 다시 선명해지며, 목숨을 건져 안도하던 적에게 또 한번 절망과 공포를 선사하고 있었다.
제 십이 초식 매화점개(梅花漸開).
매화가 점점 피어난다.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붉게.
계속해서 연달아 흐드러지고 있었다.
비무극이 외쳤다.
“어떠하냐!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흉수가 진작에 죽었음을 안 소감이! 흉수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결국 너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음을 안 소감이 어떠냔 말이다!”
그의 칼이 맹렬하게 움직인다.
비무극의 칼끝에서 피어나는 서슬 퍼런 매화잎이 오자운의 목을 노리고 피어났다.
“나는…… 나는…….”
오자운의 눈빛이 힘을 잃었다.
그의 칼끝이 망설이는 동안 생겨난 단 한 차례의 빈틈.
그것을 노련한 매화검수는 놓치지 않았다.
핏-
비무극의 칼이 날았고.
쩌-억!
오자운의 복부에 박혔다.
…촤악!
순간, 흩뿌려지는 핏물과 쏟아지는 비 때문에 비무극은 오자운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놈의 오른팔은 확실히 피했고, 왼팔은 진작에 잘려 나가고 없었으니까.
‘됐다.’
비무극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분명 손에 쪼개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실제로 오자운의 몸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 뒤에 있는 고사목을 향하고 있었다.
콰쾅!
오자운은 나무등걸에 부딪쳐 힘없이 쓰러졌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떨궜는데 마치 누군가가 목을 베어 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였다.
“허억…… 헉…….”
비무극은 허리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숨을 몰아쉬었다.
아까 베인 상처가 더욱 크게 벌어진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느낌이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의 칼끝은 오자운의 늑골을 쪼개고 그 안쪽의 심장을 반으로 갈라 놓았다.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 증거로 손가락 끝에 아직도 찌릿한 감각이 느껴진다.
검날이 단단한 뼈를 쪼개고 들어갔을 때 특유의 감각이었다.
‘……죽었나?’
비무극은 숨을 몰아쉬며 정면을 살폈다.
오자운은 고사목에 기대어 꼼짝도 하지 않는다.
‘……죽었겠지?’
비무극은 침을 삼켰다.
마치 납덩어리를 삼키는 듯 뻑뻑하다.
‘……죽었을 거야.’
칼침이 제대로 들어갔고 단단한 것을 쪼개는 느낌도 왔으니 틀림없다.
‘……죽었어야만 해.’
비무극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꾸구구국……
힘을 주자 허리의 근육이 상처를 조여 더 이상의 출혈을 막았다.
‘목을 잘라 놔야 한다. 그게 아니면 죽지도 않을 놈이야.’
그는 초인적인 인내심과 의지를 발현하여 몸을 일으켰고 이내 오자운의 시체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목을 잘라 놓기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불안이 가시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비무극은 오자운의 앞에 섰다.
“……형제여. 참으로 지긋지긋한 추격길이었다.”
자신보다 한 살 어린 동기를 향해, 비무극은 칼을 높게 들어 올렸다.
“우리의 인연도 이만 끝내도록 하자.”
그리고 크게 앞으로 한 발을 내디디며 칼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아니, 내리그으려 했다.
쩍-
크게 내디딘 앞발에서 별안간 느껴지는 격통만 아니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
비무극은 비명을 필사적으로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오자운의 칼.
그것이 풀숲 사이 진흙에 박혀 있다.
검날은 마치 작두처럼 날카로운 면이 위로 간 채 진흙에 쓰러져 있었다.
하필 그 위를 향해 진각을 내디뎠던 비무극은 마치 작두 위에 맨발을 디뎌 놓은 모양새가 되었다.
신발코를 포함, 오른발의 발가락이 몽땅 잘려 나간 것이다.
“끄아아아아악!”
비무극은 오른발을 붙잡은 채 진흙탕으로 넘어졌다.
잘려 나간 신발 속에서 핏물을 펑펑 뿜어내고 있는 발이 보인다.
새끼발가락만이 절반이 남아 있을 뿐, 나머지는 죄다 잘려 나가 있었다.
“으으…….”
비무극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오자운의 모습이 보인다.
기분 탓일까?
고목에 기대어 앉아 있는 그의 몸이 갑자기 태산처럼 거대하게 느껴졌다.
놈이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나 자신을 향해 칼을 내리칠 것만 같았다.
“으으…… 으으으으…….”
비무극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났다.
허리와 오른발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는 폭우에 번지면서도 전혀 붉은 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비무극.”
어둠 너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무극.”
귓가로 울려 퍼지는 기이한 메아리.
그것은 빗소리에 섞여 들릴 듯 말 듯 환청처럼 일렁거린다.
“비무극.”
세 번째로 이름을 불렸을 때, 비무극은 자신의 뒤에 무언가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검은 머리. 검은 피풍의. 검은 곤.
오로지 눈동자만이 새빨간 소년 하나가 비를 맞으며 비무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