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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61화 (61/110)

61화 수성수자지명(遂成豎子之名) (1)

알알이 떨어진 빗방울이 풀잎을 때리는 소리.

과거에 베어 버렸던 범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광경에 비무극은 일순간 눈을 끔뻑였다.

“……아.”

그것이 착각임은 곧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있는 적은 감히 범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닌, 실로 무시무시한 맹수였기 때문이다.

비무극은 오자운의 멀끔한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잔머리를 굴릴 줄도 알았는가?”

“나의 기지는 아니었네만, 그래도 좋은 스승이 있어 옆에서 많이 보고 배웠지.”

오자운 역시도 비무극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감조유적(減竈誘敵)이라는 말이 있다.

군사를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밥을 지을 부뚜막의 수를 줄여, 뒤쫓아오는 추격대로 하여금 아군 병력의 규모를 잘못 판단하게 만드는 속임수.

추이는 산을 넘으며 야영지의 수를 늘리고, 식량과 물을 버리고 갔으며, 마지막에는 핏자국을 만들어 몸 상태가 점점 악화되고 있는 것으로 속였다.

그리고 그 결과, 비무극은 이렇게 팔팔한 상태의 오자운과 일대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비무극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그는 허리춤의 칼을 뽑아 들며 말했다.

“오는 길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베었다네.”

“…….”

“문득 자네 생각이 나더군.”

비무극과 오자운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마주한다.

비무극이 말을 계속했다.

“줄기는 너무 울퉁불퉁하여 먹줄로 쓸 수 없었고, 작은 가지들은 너무 휘어져 있어서 곱자나 그림쇠에도 맞지 않았지. 그래서 베어 버렸어. 너무 커도 쓸모가 없다는 뜻일세.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그러자 오자운의 입가가 옅게 휘어졌다.

“살쾡이는 작고 빨라서 쥐를 잘 잡지만 소는 크고 느려서 쥐를 못 잡지. 하지만 살쾡이를 데리고 산을 밭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

“자네는 큰 나무가 쓰일 곳이 없다고 말하는데, 그 나무를 만약 마을의 입구나 중앙에 옮겨 심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린아이들이 와서 그네를 매달고, 농사꾼들은 땡볕을 피해 그늘로 들어올 것이며, 길 가던 나그네가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평상도 갖다 놓을 수 있을 테지.”

그 말을 들은 비무극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문답(問答)은 결국 무용(無用)한 것이로군. 하기야, 살쾡이와 소 사이에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나.”

“꼭 자네를 살쾡이에 비유한 것은 아니네. 다만.”

오자운의 눈이 빛났다.

“나는 소가 맞아. 능히 산을 깎아 내어 밭으로 만들 힘이 있는 소지.”

“…….”

“내가 만약 마교로 가게 되면, 그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되면, 제일 먼저 밭으로 만들어 버릴 산이 하나 있다네.”

“……!”

오자운의 말을 들은 비무극의 두 눈이 커졌다.

“이노옴! 네가 감히 화산을 능멸하느냐!”

“하하하- 나는 그저 산을 하나 일궈서 밭을 매겠다고 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내가 언제 화산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라 말하기라도 했는가?”

동시에, 비무극이 칼을 휘둘렀다.

오자운 역시도 하나 남은 오른팔을 들어 칼을 휘둘렀다.

까-앙!

빗방울이 이제 막 후둑후둑 떨어지는 하늘에 조금 일찍 뇌성이 울린다.

두 날붙이가 사납게 맞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터져 나오고 있었다.

오자운의 검과 비무극의 검이 서로를 향해 곤두서며, 화산파의 절기인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의 진수가 펼쳐졌다.

제 일 초식 매화노방(梅花路傍).

길가에 상서롭게 피어 있는 매화처럼, 둘의 칼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안하게 흔들린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태연해서 마치 상대가 이쪽을 향해 조금의 적의도 품고 있지 않은 듯한 모양새였다.

제 이 초식 매화접무(梅花蝶舞).

매화잎은 나비처럼 춤추며 서로를 향해 다가간다.

칼끝은 겉으로 보기에 조금도 위험하지 않은, 오히려 가까이 다가가 어루만지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유려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제 삼 초식 매화토염(梅花吐艶).

나비처럼 하늘거리던 매화잎들은 농염한 빛으로 상대를 유혹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손을 뻗어 움켜잡고 싶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미색이었다.

제 사 초식 매개이도(梅開利導).

아무리 아름답다고는 하나 이 매화잎들은 모두 칼끝으로 그려낸 것.

미색에 이끌려 다가온 상대에게 비로소 날카로운 본색을 드러나는 단계가 바로 이 단계였다.

제 오 초식 매화낙섬(梅花落暹).

매화잎은 떨어지는 햇살처럼 온 사방에 있다.

아름다운 미색에 홀려 가까이 다가온 이들은 어느새 자신의 주위를 꽉 채운 매화들을 보며 이미 물러날 곳이 사라졌음을 깨닫는다.

제 육 초식 매화낙락(梅花落落).

매화가 떨어지고 떨어진다.

매화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다.

매화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오자운과 비무극은 하염없이 흐드러지는 매화들의 사이로 서로를 직시하고 있었다.

회산파 최고의 기재들만이 받을 수 있는 ‘매화검수’의 칭호.

여기에서 목숨을 건 도박을 벌이는 둘이 바로 그 매화검수다.

후둑- 후두둑-

어느덧 빗줄기가 꽤 굵어졌다.

길게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들의 사이로 비무극이 여섯 번째 초식을 거두었다.

오자운 역시도 칼을 뒤로 물렸다.

그는 비무극에 비해 반 보 더 뒤로 밀려나 있는 상태였다.

비무극이 말했다.

“매화잎이 고르게 떨어지지 않는군.”

“…….”

오자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팔이 없다는 것은 균형감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실제로 양쪽의 매화가 기세를 다투며 피어나는 동안, 오자운의 칼이 움직인 곳에서는 미세하게도 오른쪽의 매화들이 더 고르게 피어나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비무극의 입이 열렸다.

“나는 금의검(金義劍)의 검(劍)이었지.”

……

오자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무극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자네는 금의검(金義劍)의 금(金)이었고.”

“…….”

비무극은 아주 오래전, 화산파에 막 입문했을 당시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화산파의 도복을 입는 방법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었고 그 세 가지 길을 통틀어 금의검(金義劍)이라 불렀다.

첫 번째인 금로(金路).

그것은 막대한 기부금을 내고 들어오는 방법이다.

이 돈은 추후 검로(劍路)의 길로 들어오는 제자들을 키우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두 번째인 의로(義路).

그것은 의리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하여 화산의 도복을 입은 이들은 주로 화산파 내에 머물지 않는 관의 명사들이나 그들의 자제들이 대부분이었다.

세 번째인 검로(劍路).

그것은 실력으로 들어오는 방법이다.

돈도 없고 뒷배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순수하게 검에 대한 자질만으로 선별하여 화산의 도복을 입을 수 있게 해 주는, 어찌 보면 가장 정직하면서도 가장 통과하기 힘든 길이었다.

여기서 오자운은 금로를 통해, 비무극은 검로를 통해 화산파에 입문한 경우였다.

비무극은 오자운을 처음 만났을 당시를 회상했다.

비단옷에 좋은 검을 차고 있었던 더벅머리 소년.

가난한 농가의 자식이었던 비무극은 내심 그를 무시했었다.

부모 잘 만난 덕분에 이곳 화산파에 들어온 저 부잣집 소년과 달리, 자신은 오직 실력과 독기 하나로 여기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무극의 그 꼬장꼬장한 자존심은 그리 오래 지켜지지 못했다.

금로 출신인 오자운은 돈으로 들어왔다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검술 솜씨가 뛰어났다.

입문한 이후 화산파에 있던 모든 기록들을 갈아치워 버리며, 오자운은 위로 쭉쭉 뻗어 올라갔다.

하지만 비무극이 맨 처음부터 그런 오자운을 시기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오자운의 재능과 자질을 인정했으며 그를 부러워하고 동경했다.

그래서 초반에는 그와 잘 지내 보려고 애써 친하게 굴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무극은 오전 수련을 마치고 추가적으로 개인 수련을 하기 위해 연무장으로 향했다.

천(千)일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만(萬)일의 연습을 련(鍊)이라 하여 ‘단련(鍛鍊)’이라 하듯, 비무극은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한계까지 채찍질하고 있었다.

그날도 손가죽이 닳아 피가 흐를 정도의 단련을 거듭하고 있던 비무극.

그랬던 그가 본 것은 우물가의 나무 뒤에 숨어 낮잠을 자고 있던 오자운이었다.

아름다운 미모의 맹영 사매가 그런 오자운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는 광경을 보는 순간, 비무극의 마음 속에서 어떠한 감정이 끓어올랐다.

자신은 수련이 끝나고도 항상 죽을 각오로 단련하는데, 오자운은 늘 수련이 끝나는 즉시 낮잠을 자거나 산책을 나가 버린다.

그러고도 항상 자신은 오자운에게 뒤처지는 것이다.

“……너는 항상 그랬다. 수련이 끝나면 낮잠이나 퍼질러 자면서도 나를 비롯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지. 그래서 맹영 사매도 너에게 호기심을 갖기 시작했던 것이고.”

비무극은 과거를 떨쳐 내려는 듯이 칼을 휘둘렀다.

오자운은 그 칼을 받아 넘겼다.

까-앙!

아래에서 위로 뻗은 비무극의 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 오자운의 칼을 사납게 밀어냈다.

왼팔이 없는 오자운은 순간 들이닥친 강한 충격에 발을 헛디뎠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난 오자운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지만 상반신이 거의 뒤로 돌아가다시피한 상태였다.

그 틈을 타서, 위로 솟구쳐 올라갔던 비무극이 아래를 향해 쇄도했다.

마치 병아리를 발견한 매가 급강하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오자운 역시도 반격에 대비했다.

그는 상체를 뒤로 돌린 상태에서 칼을 자신의 몸 뒤에 숨겼다.

그리고 덮쳐 오는 비무극을 향한 되치기를 준비했다.

하지만.

“다 보인다!”

비무극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면서도 오자운의 몸 뒤에 숨겨져 있는 칼의 위치를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쏟아지는 비가 고여서 만들어진 물웅덩이 때문이었다.

오자운의 발밑에 생겨난 빗물의 웅덩이는 오자운의 몸 뒤에 숨겨진 칼날이 어떤 위치를 향하고 있는지 비무극에게 훤히 일러바쳤다.

비무극은 그대로 칼을 내리찍어 오자운의 몸을 두 동강 내 버리려 했다.

……바로 그 순간.

“!?”

비무극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왼팔이 있다.

오자운의 왼팔이 어느샌가 새로 돋아나 있었다.

그래서 오자운은 지금 새로이 돋아난 왼팔로 칼을 쥐고 반격의 되치기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안 돼!’

비무극은 황급히 칼을 옆으로 틀었다.

오자운에게 왼팔이 있다면 이 궤도로 들어갈 수 없다.

이대로 들어갔다가는 저 좌수검(左手劍)이 자신의 허리춤을 뚫고 들어와 몸을 두 동강 낼 것이다.

그래서 비무극은 칼을 아예 옆으로 틀어 버렸다.

바로 그 순간.

…후욱!

오자운의 칼이 휘둘러졌다.

본디 비무극의 검이 반 박자 빨랐으나, 도중에 칼을 물렀다가 다시 휘두르는 바람에 한 박자가 날아갔다.

오자운의 검보다 반 박자 느려진 것이다.

그리고 오자운의 칼이 그의 상반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비무극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왼팔이 없다.

검은 오자운의 오른손에 들려 있었다.

찰나의 순간, 비무극은 물웅덩이에 비친 오자운의 오른팔을 왼팔로 착각했던 것이다.

사뿍-

오자운의 칼이 비무극의 왼쪽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반 뼘 정도의 깊이로 난 칼자국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온다.

“큭……!”

비무극이 이를 악물었다.

뒤로 물러나는 그를 향해, 오자운의 검이 매섭게 뻗어 왔다.

천하의 매화검수조차도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살초(殺招)였다.

바로 그 순간.

오자운의 검극을 눈앞에 둔 비무극이 서둘러 외쳤다.

“흉수를 아느냐!?”

발악에 가까운 그 목소리에 오자운의 칼끝이 잠시 멎었다.

그 틈을 타 비무극이 다시 한번 외쳤다.

“네 아내 강아를 죽인 흉수가 누구인지 아느냔 말이다!”

오자운의 동공이 흔들렸다.

만약 방금의 이 말이 아니었다면 방금 휘둘러진 오자운의 칼에 비무극은 목을 떨궜을 것이다.

이윽고, 비무극은 오자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섰다.

피가 콸콸 쏟아져 나오는 옆구리를 꽉 움켜쥔 채였다.

“…….”

오자운은 칼을 거둔 채 뒤로 반 보 물러났다.

대답을 촉구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이내, 비무극은 토설했다.

“네 아내 강아를 죽인 흉수는…….”

오자운이 그토록 찾아 헤맸던 아내의 원수.

“너와 나의 사매. 맹영이다.”

그의 삶을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인물의 이름이었다.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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