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감조유적(減竈誘敵) (3)
비무극.
화산파의 매화검수이자 무림맹 등천학관의 교관.
그는 현재 무림공적 사망매화를 쫓는 추격대의 수장을 맡아 이곳 이름 모를 삼림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숲속은 마른 풀과 넝쿨들로 울창하다.
뾰족한 침엽수들 사이로 사람 키보다 높게 자라난 관목들, 그 아래에는 조금만 잘못 밟아도 엄청난 기세로 무너지는 자갈의 경사로가 있었다.
…와르르르르!
때때로 발을 디뎌 놓을 때마다 경사로 아래에서 발생하는 산사태는 비무극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때.
“……!”
비무극은 단단한 암반으로 이루어진 봉우리 중턱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거목(巨木).
수령이 얼마나 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봉우리 아래로 굳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잔뿌리 하나하나가 집채만 했고, 줄기는 건장한 사내 수십 명이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굵었으며, 가지들은 흘러가는 구름의 통행을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높게 뻗어 있었다.
이 산맥이 아직 흙과 돌로만 이루어져 있을 시절, 만약 이곳에 최초로 돋아난 새싹이 있다면 지금쯤 바로 이 거목과도 같이 자라났으리라.
“…….”
비무극은 이 거목을 얼마간 올려다보았다.
수천, 아니 수만 년은 살아왔음 직한 나무.
그것을 향해 비무극은 칼을 뽑아 들었다.
번-쩍!
그의 칼에서 서슬 퍼런 예기가 뿜어져 나왔다.
…쩌억!
나무의 밑동이 잘려나갔다.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나무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콰콰콰쾅! …푸슉! …푸슉! …푸슉!
피처럼 붉은 수액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사람의 피만큼이나 뜨거워서 대기 중에 뿌연 김을 뿜어냈다.
비무극은 쓰러진 거목을 보며 말했다.
“혜자(惠子)왈, 재대난용(材大難用)이라.”
지나치게 큰 나무는 쓸 곳이 없다.
줄기는 크고 울퉁불퉁해서 먹줄로 쓸 수도 없고, 작은 가지들은 구불구불하여 곱자나 그림쇠에도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무꾼들은 지나치게 큰 나무를 보면 발걸음을 돌린다.
베어 내는 데 드는 수고로움에 비해 결과가 시원찮기 때문이다.
비무극은 허리가 잘린 나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교에서 너를 선뜻 품어 줄 듯싶으냐, 오자운.”
사망매화(死亡梅花). 그것은 현재 중원을 떠들썩하게 뒤흔들어 놓고 있는 마명.
그것은 마교가 품기에도 상당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너는 어딘가에 새로 들어가기에는 너무 큰 재목이야.”
오자운 정도 되는 실력자가 갑자기 마교에 투신하게 된다면 그 안에서도 온갖 암투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를 품기 위해, 혹은 그를 품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새로운 싸움이 벌어질 것이고 새로운 명분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오자운 정도의 실력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해치고 없던 풍파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
그런 위험을 기존 세력들이 굳이 감수할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오자운. 너는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리라.”
비무극은 칼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베어 버린 거목을 향해 말했다.
“변방의 마두들에게 목을 떨구느니…… 차라리 내 칼 아래 져라.”
그때, 비무극의 혼잣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크-아아악!]
거목 저 아래에서 뇌성과도 같은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불덩이가 이글거린다.
비무극은 순간 그것을 오자운의 두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으로 착각했다.
이윽고, 거목의 뿌리 아래에 있던 굴에서 그곳의 주인 되는 자가 걸어 나왔다.
범. 거대한 몸집을 가진 대호(大虎).
이 일대 봉우리들을 지배하는 산군이 비무극의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비무극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손에 쥔 칼을 옆으로 치우고 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을 뿐이다.
“범이었나.”
눈앞에 있는 적의 얼굴과 원래 쫓고 있던 적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저 이글거리는 눈빛, 사나운 기세, 모든 것이 서로 닮았다.
“잘됐구나. 내 너를 잡아서 예행연습을 하리라.”
비무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이 그를 향해 도약했다.
[크르릉!]
앞발에 돋아난 날카로운 발톱이 비무극의 가슴팍을 노린다.
…쫘아아악!
비무극의 도복이 순식간에 너덜너덜 찢어졌다.
그러자 그 안으로 어마어마하게 단련된 근육이 드러난다.
촤악- 푸슈슉!
범의 발톱에 의해 갈라진 피부 밑에서 뜨거운 핏물이 다섯 갈래로 뻗어 나온다.
후욱-!
비무극이 한번 숨을 참자 터져 나오던 피가 뚝 멎었다.
근육의 힘만으로 지혈을 한 것이다.
그의 강철 같은 몸에 새겨져 있는 다섯 개의 혈선이 순간 근육들 사이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비무극의 칼이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쌔애애액-
오자운만 아니었다면 화산파 최고의 기재, 최연소 매화검수로 칭송받았을 그의 칼이 범의 배를 가르며 지나갔다.
…팟!
허공에 새빨간 매화 한 송이가 피어났다.
핏물을 먹고 자라난 혈매화(血梅花)였다.
[카학!?]
범이 뒤로 물러섰다.
그것이 내디딘 바위 위로 핏물과 함께 내장의 일부가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르르르르르르르……]
산중의 호걸이 격분했다.
그것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 만한 강적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대바늘처럼 곤두선 털, 날카롭게 튀어나온 발톱,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꼬리, 이글거리는 눈알.
이윽고, 상처입은 맹수는 시뻘건 아가리를 벌려 비무극의 머리를 씹으려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입에 거품을 물고 졸도할 만한 광경이었으나, 비무극은 오히려 호구(虎口)를 향해 한 발자국을 내뻗었다.
쌔애액!
비무극은 칼을 내리쳤다.
그것은 쩍 벌어진 범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갔고 뱀처럼 꿈틀거리던 혓바닥을 꿰어 버렸다.
동시에.
콰-직!
범의 날카로운 이빨이 비무극의 검신을 단단히 물었다.
꾸우우우욱……
사람과 범이 힘 싸움을 한다.
범은 입에 문 칼을 깨물어 부러트리려 했고 사람은 그 칼을 힘주어 젖힌다.
이윽고. 힘의 대치가 깨졌다.
삼척 칠촌의 칼.
그것을 한평생 휘둘러 왔던 검호(劍虎)의 팔 힘은 장작에 도끼를 살짝 가져다 댄 뒤 그것을 지그시 눌러서 쪼갤 수 있을 정도였다.
쫘아아아악!
쪼개졌다.
지금껏 산중의 수많은 짐승들을 잡아먹었을 새빨간 아가리가 두 조각으로 찢어지며 자욱한 피분수가 안개 속에 번진다.
비무극은 거대한 대호의 몸을 그대로 두 조각 내 버렸다.
…쿵! 와르르르르-
범의 몸은 그대로 바위 아래로 굴러떨어졌고 이내 자갈들에 쓸려나가 산기슭 저 아래로 사라졌다.
“후우…….”
비무극은 긴 숨을 내쉬고는 전신에 들어가 있던 힘을 풀었다.
그러자 비로소 비무국의 가슴팍에 난 다섯 가닥의 흉터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도 아직 멀었군.”
비무극은 가슴팍에 대각선으로 남은 혈선(血線)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이윽고, 그는 격전의 흔적을 뒤로하고 봉우리 위를 올랐다.
사아아아아아……
눈앞에서 안개와 구름이 뒤섞여 흐른다.
나뭇가지들이 서로 스치며 나는 소리만이 귓가에 요란했다.
주변에는 살아 있는 것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가 살기에는 너무 높고 외로운 곳이었다.
털썩-
비무극은 높게 솟구쳐 있는 한 바위 앞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금창약을 꺼내어 가슴팍에 뿌렸다.
흰 가루가 붉은 핏덩이들과 엉겨 끈적하게 변했다.
그것은 갈라진 살덩어리 틈을 메꾸고 피를 멎게 만든다.
“…….”
비무극은 그대로 가부좌를 틀고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내력을 몸속 혈관 구석구석까지 뻗는다.
그것은 손상된 기혈을 수복하고 들끓는 정념을 가라앉힌다.
자연스럽게. 심상세계 속 무의식 너머에 있던 상념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오랜 시간 함께 검을 수련했던 사형제.
이제는 온 무림의 공적이 되어 버린 사내.
그리고 한때는 형제였던 이의 목을 잘라 사매의 영전에 가져다 바쳐야 하는 숭고하면서도 비정한 임무.
자신의 사명을 떠올린 비무극은 표정을 찡그렸다.
녹아내린 쇳물 같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구렁이 같은 힘줄이 꿈틀거렸고 쇳덩이 같은 근육에 힘이 들어간다.
일주천을 마치기까지는 반 시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비무극은 감았던 눈꺼풀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순간.
“……!”
비무극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눈앞에 서 있는 바위에 세로로 쓰인 글귀가 있었다.
-費無忌 死在這裏-
비무극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
“……비무극은 이곳에서 죽는다?”
획의 끝마다 새빨갛게 흘러내리고 있는 것은 분명 핏물이다.
그리고 그 앞에는 이 빠진 칼들이 어지럽게 박혀 있었다.
자신과 함께 왔던 무림맹 추격대원들의 칼이었다.
* * *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는 산중.
비무극은 황급히 집합 장소로 돌아왔다.
꺼진 모닥불이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곳.
이곳은 산중턱에 있는 넓은 평지였다.
“누구 없느냐!?”
비무극은 다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하나도 없었다.
비무극은 서둘러 야영지를 돌아보았지만 인기척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림맹의 부하들도, 남궁세가의 특작조원들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직감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불길한 종류의 것이었다.
그때. 비무극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꺼져 가는 모닥불이 가느다란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곳.
그곳에 전투의 흔적이 보였다.
사람을 패대기친 자국, 잿가루를 뿌린 자국, 그리고…….
“……!”
비무극은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 끝에서 찢어진 의복과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남궁율의 것이었다.
바닥에 남겨져 있는 희미한 핏자국을 본 비무극은 미간을 찡그렸다.
“……당했나.”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종종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벌어지고는 한다.
비무극에게는 방금 중얼거린 한마디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러했다.
“당했지.”
잿더미에서 피어오르는 희미한 연기 너머.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혼잣말에 대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지금껏 그토록 기다려 왔던 대답일지도 모른다.
…차앙!
비무극은 재빨리 칼을 빼 들어 정면을 겨누었다.
칼끝에서 둘로 갈라지는 연기 사이로 유령처럼 어른거리는 형체가 있었다.
길게 풀어 헤친 머리, 섬뜩하게 번지는 안광, 소슬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왼팔의 소맷자락.
죽음의 매화가 이글거리며 피어난다.
“오랜만일세, 친구.”
오자운이 그곳에 있었다.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