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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59화 (59/110)

59화 감조유적(減竈誘敵) (2)

남궁율.

나이 스물.

별호는 검화(劍花).

정도십오주의 한 축인 남궁세가의 적통.

무림맹 최고의 교육기관인 등천학관에서도 단 한 번도 수석을 놓쳐 본 적 없는 인재 중의 인재.

그녀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휘황찬란한 명예들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했다.

고귀한 대접들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가혹하게 단련했으며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격한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런 남궁율의 마음속에도 자그마한 오만은 존재했다.

앞서 말한 모든 명예들을 의식하지 않고 항상 겸손하게 노력하는 자신.

그런 자신에 취해 저도 모르게 품은 거만함.

‘나 정도면 강호행을 나가도 문제없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그녀 자신조차도 모를 정도로 깊숙한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막상 강호에 나와 보니 모든 것이 그녀의 예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노력과 수행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

아무리 반복해서 경험하고 또 경험해도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것.

그것들은 너무나도 사소하고 시시콜콜해서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던 것들이었다.

추운 비바람, 흙먼지, 풍토병, 설사, 땀, 갈아입을 옷, 날벌레, 배고픔, 비위생적인 음식과 잠자리, 상인들의 불친절, 사기꾼, 갑자기 마려운 똥오줌, 더러운 화장실…….

강호 무림의 세계는 무(武)와 협(俠), 장쾌하게 부딪치는 창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을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단연코 이번 추격행.

바로 삼칭황천이라는 인물을 뒤쫓는 여정에서였다.

“허억…… 허억…… 허억…….”

남궁율은 비 오듯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산봉우리를 올랐다.

태곳적 이래 사람이 한 번도 오지 않았을 것만 같은 숲속.

풀과 넝쿨, 나뭇가지들로 뒤얽혀 있는 바위들은 올라오지 말라고 하는 듯 높게 솟구쳐 있다.

이름도 없는 이 산자락을 타 올라가며, 남궁율은 생각했다.

남궁세가와 등천학관에 있었을 때의 자신을.

그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수행’이라고 생각했었던 과거의 자신을.

때 되면 깨끗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때 되면 깨끗한 온수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깨끗한 음식을 먹고, 정해진 시간 동안 무예와 학문을 닦다가, 또다시 깨끗한 음식을 먹고, 깨끗한 온수로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깨끗한 이부자리에서 잠들었던 나날.

그런 나날들은 그저 축복이었다.

감히 수행이라는 말을 갖다 댈 수도 없을 만큼 안락한 요람에서의 생활이었다.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으로 통했든, 등천학관의 수재로 통했든, 그런 모든 것들은 이곳 산속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그녀는 요람에서 나왔고, 이제는 모든 것을 야생에서 직접 조달해야 했다.

발바닥이 터져 피가 나도 계속 걸어가지 않으면 그날 밤은 비바람을 맞아야 하는 삶.

국그릇에 날벌레 몇 마리쯤 떠다니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식사.

토악질 나는 냄새가 나는 변소조차 그리워지게 만드는 풀숲에서의 일처리.

그 과정에서 깨끗한 이부자리는 낙엽과 삭정이를 깔아 놓은 구덩이가 되었고, 깨끗한 목욕물은 며칠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개울가가 되었고, 깨끗한 옷은 일주일에 한 번 빨아 입을 수 있으면 감지덕지하는 마음이 되었다.

만약 자월특작조의 무사들이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암암리에 수발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남궁율은 삼칭황천을 잡기는커녕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으리라.

그 점이 못내 부끄러웠던 남궁율은 이를 악물고 산을 올랐다.

삼칭황천을 만난다면 당당하게 ‘내 힘으로 그대를 뒤쫓아왔고, 이제 원수를 갚으려 하노라!’ 라고 외치기 위해, 발바닥이 터져 피가 나는 것도 모른 채 바위를 기어올랐다.

이쯤 되면 오기와 독기, 악만 남아 버린 그녀는 정신력만으로 계속 삼칭황천의 뒤를 쫓고 있었다.

바로 그때.

남궁율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르릉!]

산봉우리 전체를 쩌렁쩌렁 떨어 울리는 소리.

그것은 산중 깊은 곳에 있는 범이 내지르는 노호성이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맹수의 포효에 남궁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바윗골 사이에 몇 겹으로 메아리치는 범 소리를 피해 남궁율은 발걸음을 옆으로 틀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앙상한 나뭇가지들 사이에 혼자서만 꺾여 있는 나뭇가지.

야영지에서 같이 출발했던 무림맹의 무사가 남긴 표식이다.

그것은 동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은 그가 이미 찾아봤고 이제는 동남쪽으로 수색 범위를 넓히겠다는 뜻이다.

‘아, 남의 수색 구역에 들어왔구나.’

남궁율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범의 포효가 들려왔던 반대편을 향해 올라가려 했다.

바로 그때.

“어딜 가나?”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남궁율은 뒷목의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 목소리를 어찌 잊겠나.

꿈에서도 몇 번, 몇십 번을 반복해서 들었던 목소리이거늘.

“……!”

남궁율은 재빨리 몸을 돌려 허리춤의 칼을 뽑으려 했다.

그때.

“아앗!?”

그녀는 발바닥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너무 오래 걸어서 발이 부르터 터진 것이다.

동시에 그녀의 칼이 바닥에 떨어져 바위틈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헉!?”

남궁율은 재빨리 손을 뻗었지만 칼은 이미 돌 틈으로 들어갔다.

게다가 너무 서둘러서 손을 뻗는 바람에 손등이 바위 아래 툭 튀어나온 곳에 부딪쳐 파랗게 멍까지 들었다.

“으으으으…….”

남궁율은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토록 고대해 왔던 순간에 이렇게 한심한 모습의 연속이라니.

고개를 들자 눈앞에 적의 모습이 보인다.

삼칭황천.

늑대 배 속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입술을 빼앗아 갔던 그때의 그 얼굴 그대로다.

까닥-

적이 이쪽을 향해 손바닥을 움직였다.

“얌전히 잡혀라.”

그럴 수는 없다.

남궁율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바위 위에서 뛰어내렸다.

…타탁!

적은 남궁팽생을 죽인 자.

일대일로는 맞붙어서 승산이 없다.

남궁율은 목에 건 호각을 들어 올려 힘껏 불었다.

자신의 위치로 증원을 보내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피시시시식-

호각은 바람 소리만 낼 뿐이었다.

적이 던진 마름쇠 한 조각이 호각에 박혀 구멍을 내 놓았기 때문이다.

‘큰일 났다!’

남궁율은 호각을 버리고 뛰었다.

이렇게 된 이상 처음의 야영지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 가면 수색을 마치고 돌아온 자월특작조의 조원들이 한둘쯤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궁율의 기대는 또 한번 부서졌다.

야영지에 도착했을 때 그녀가 본 것은 모닥불가에 축 늘어져 있는 세 명의 자월특작조 조원들이었다.

“도망은 무의미하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닥불 너머로 적의 모습이 유령처럼 일렁거린다.

이윽고, 적의 손아귀가 이쪽을 향해 날아 들어왔다.

남궁율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그녀는 등천학관 최고의 수재들 중 하나였으나, 적의 손길은 고작 피하는 것이 전부일 정도로 빨랐다.

부욱-

그녀의 앞섶 옷고름이 찢어져 나갔다.

남궁율은 가슴 쪽을 가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 색마 놈! 이런 식으로 치욕을 주다니!”

그러자 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표정에서 ‘?’라는 생각이 너무 적나라하게 읽혀서 남궁율조차도 머쓱할 정도였다.

이윽고, 적은 말했다.

“너는 젖가슴이 드러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동시에. 곤이 휘둘러졌다.

“내장이 쏟아지는 것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시커먼 곤.

길고 흉악스러운 몽둥이.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남궁율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

…퍼퍼퍼펑!

남궁율은 수치스러움이고 뭐고 따질 겨를도 없이 바닥을 굴렀다.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당나귀가 진흙탕을 뒹구는 수.

그녀는 곤을 피해 바닥을 굴렀고 자신의 뱃가죽이 붙어 있는지를 확인해 보았다.

하얀 배 위에 붉은 자국이 길게 생겨나 있었다.

곤에 맞지도 않았는데도 말이다.

비로소 남궁율은 생각했다.

예전 삽혈맹세의 제단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적(敵)은 자신을 여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적(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동시에 남궁율은 깨달았다.

자신이 왜 눈앞에 있는 남자를 그토록 잡고 싶었는지.

그것은 단지 굴욕과 수모를 겪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경, 성별, 외모 등등을 배제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를 만났다.

그와 다시 마주해서, 그를 제압하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것이 지금 남궁율을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팟!

남궁율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그리고 모닥불가에 있는 잿더미를 발로 걷어찼다.

풀썩-

아직 뜨거운 재가 적의 얼굴을 향해 확 끼얹어졌다.

적이 저것을 피하는 틈에 재빨리 기절한 무사의 칼을 집어 들어 반격한다.

그것이 남궁율의 계획이었다.

‘뿌리쳤나?’

바닥에 떨어진 칼을 잡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적은 그녀의 생각을 읽듯이 대답했다.

“아니.”

남궁율의 계획은 또다시 어긋났다.

퍼-억!

적의 손아귀는 뜨거운 잿가루를 그대로 뚫고 들어왔다.

그러고는 조금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이 남궁율의 목줄을 잡아챘다.

작은 병아리가 맹금(猛禽)의 발에 채이듯, 그녀는 또다시 적의 손아귀에 멱을 내주게 되었다.

“……! ……! ……!”

남궁율이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 앙탈에 불과한 몸부림이었고 그마저도 적은 허용치 않았다.

콰직!

적은 남궁율의 가녀린 몸을 세차게 내팽개쳤고 그대로 바닥에 찍어 눌렀다.

“끄으으으으윽…….”

남궁율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동시에, 그녀는 울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남궁율의 평소 얼음장 같은 표정을 알던 등천학관의 사람들이 지금 그녀의 얼굴을 보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 것인가.

하지만 적에게 있어서 그것은 조금도 궁금한 사항이 아니었다.

꽈드드득……

남궁율은 목을 조르는 악력을 느끼며 겨우겨우 말했다.

“……죽여라.”

이렇게 되려고 이 고생을 해 가며 먼 길을 왔는가.

이렇게 허무하게, 아무도 모르는 오지산간에서 죽게 되다니.

겁이 덜컥 나기도 했지만 남궁세가의 기개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끝까지 당당하게, 오연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다.

비록 손발이 덜덜 떨리고는 있었지만.

하지만.

“아니. 안 죽인다.”

적은 남궁율의 목을 조르고만 있을 뿐, 결정타는 날리지 않았다.

“네 몸은 아직 쓸모가 있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남궁율의 눈이 또다시 확 커졌다.

언젠가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강호무림을 주유할 때에 특별히 조심해야 할 몇몇 음적(淫賊)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 이 색마 놈! 뭘 하려는……!”

그녀는 크게 당황하며 저항했지만 혈도를 짚어 오는 적의 손놀림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픽-

결국 그녀의 시야가 또다시 흐릿해진다.

삽혈맹세의 제단 때에는 피칠갑이 되어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적의 맨얼굴을.

“이…… 악적…… 두고 보…….”

기억에 또렷하게 새기면서.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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