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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57화 (57/110)

57화 걸해골(乞骸骨) (2)

…쿠르르르르륵!

거대한 불꽃이 패도회의 장원을 집어삼킨다.

호수 위의 섬에서 시작된 불길은 점차 장원 전체로 번져 가 종국에는 담벼락까지 시커먼 연기로 뒤덮어 버렸다.

…뿌직! …뿌직! …뿌직! 와르르르르르르-

불똥들에게 쥐파먹힌 서까래가 뚝 부러지자 지붕 위에 올라가 있던 기와들이 한꺼번에 주저앉았다.

잿가루와 흙먼지가 뒤섞여 주변을 새까맣게 물들이고 있었다.

“으아아! 불이야!”

“모두 피해! 끌 수 있는 게 아냐!”

“불이야! 불! 모두 피해!”

“관에 협조 요청을 해야 돼!”

“어서 원월 님을 모셔 와!”

하인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여기저기서 물동이를 든 사람들이 튀어나왔지만 다른 곳으로 번지는 불길을 막는 것이 고작이었다.

콰르르르르륵! 뿌직! 뿌지직! 콰쾅- 우르르릉……

하늘 높이 시뻘건 불과 시커먼 연기가 치솟았다.

텅 빈 패도회의 장원은 그대로 화마의 먹잇감이 되었다.

“…….”

추이는 무너지다 만 누각의 잔해 위에 서 있었다.

불이 번져 가는 장원을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저 멀리 섬 중앙의 누각이 조용히 불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제사상의 향로에 꽂혀 있는 하나의 긴 향(香)처럼 보였다.

휘-이이이이잉……

도막생과 도자윤 부자의 몸을 태운 연기는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장원 안을 얼마간 떠도는가 싶더니 이내 바람에 떠밀려 호숫가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호숫물의 중앙으로 빨려드는 듯 사라져 버렸다.

오자운이 말했다.

“악인의 최후치고는 참 허망하군.”

“모든 최후는 허망한 거야. 사람이라면 누구든.”

추이는 별다른 감흥 없다는 듯 병장기를 품속에 갈무리했다.

두 자루의 송곳, 한 자루의 망치, 두 뭉치의 잠사(蠶絲), 작은 항아리에 반쯤 찬 강족의 독, 이제는 수가 많이 줄어든 마름쇠들.

그리고 곤귀를 죽이고 빼앗은 묵죽곤(墨竹棍)까지.

이것이 추이가 가진 무기들의 전부였다.

패도회를 쓸어버리는 동안 무기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남아 있는 것들의 상태도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추이는 끝이 뭉툭해진 송곳과 옆으로 미미하게 휘어진 망치 머리를 보며 말했다.

“조만간 무기를 더 장만해야겠군.”

“전에 쓰던 무기들은 어디서 조달했는가? 꽤 잘 만든 것들이던데.”

“안휘성에 은거하고 있던 장인을 찾아갔었지. 그가 만들어 준 창은 잃어버렸지만.”

“그러고 보니 자네도 창날이 필요하겠군. 곤보다는 당연히 창이 더 나을 테니.”

오자운이 추이의 곤을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때.

…뚝!

그들이 서 있던 지붕 아래의 대들보가 불에 타 무너져 내렸다.

오자운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기와들을 연달아 밟으며 허공을 건너갔다.

이윽고, 그는 담벼락 위로 뛰어내리며 추이를 돌아보았다.

“우리도 이제 가야겠…… 엇?”

뒤를 돌아본 오자운은 깜짝 놀라야 했다.

뒤에는 아무도 없었고, 추이는 어느새 그의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가자. 무림맹의 개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지.”

“원…… 말이나 좀 하고 움직이게. 움직이는 걸 보면 사람인지 귀신인지 모르겠구만.”

오자운이 혀를 내둘렀다.

천하의 남궁천조차도 추격할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추이의 경공술이다.

이윽고.

추이는 재투성이가 된 패도회의 정문 앞에다가 방(榜)을 붙였다.

조가장을 멸문시켰을 때와 같이, 내용은 간단했다.

一. 사도(私道)가 선을 넘었다. 무고한 여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고 장강의 도적들에게 팔아넘겼다.

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대신해 벌을 내린다.

三. 뒤를 쫓아오는 이들은 패도회를 옹호하는 악적(惡敵)들로 간주할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조가장에 붙인 방과 비슷했으나 세 번째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특정 집단에만 전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       *       *

객잔.

한 점소이가 술과 음식들을 내온다.

죽립을 쓴 여인 하나가 객잔 구석에서 조용히 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채수(菜水)를 우려낸 국물에 만 소면.

시들시들한 푸성귀를 돼지기름으로 볶아낸 소채볶음.

돼지의 뒷다리살을 크게 깍뚝깍뚝 썰어서 정육면체 모양으로 만든 뒤 묘한 맛이 나는 간장에 푹 재웠다가 통째로 쪄낸 요리.

그리고 놋쇠 사발 속,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탁주.

여자는 돼지고기와 야채, 소면을 몇 젓가락 집어먹고는 내려놓았다.

그리고 옆에 있는 놋그릇 속 탁주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옆 탁자에서 들려오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의록주(蟻綠酒) 몇 사발을 퍼 마시고 얼큰하게 취한 호사가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패도회의 혈사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일세.”

한 사내가 말했다.

그는 탁자를 탕 치며 분연히 일어났다.

“그간 패도회 놈들이 한 악랄한 만행들은 이 고을 사람들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어.”

“암. 나도 그놈들에게 딸을 잃었네. 빚을 갚지 못했다면서 눈앞에서 끌고 가는데, 저항했다가 불구가 된 이 오른쪽 무릎이 아직도 비만 오면 욱신거려서 잠을 못 자.”

옆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때, 옆에 있던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험. 그래도 도막생, 그자의 마지막은 조금 안됐어. 아들을 먼저 보내고 그 뒤를 따라 목숨을 잃은 셈이니…….”

“이봐. 노인장! 안됐기는 뭐가 안됐단 말인가! 그 흉신악살 같은 놈이 지금까지 이 일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패악질을 부려 왔는데!”

“아니 나는 그저 부모의 마음에서 말했을 뿐인데…….”

“진짜 부모의 마음이거든 아들 잃은 도막생 놈에게 공감할 것이 아니라 그 도막생 놈에게 수많은 딸자식들을 잃은 아비의 입장에서 공감을 해야지! 어디서 되도 않는 감성을 팔려 드는가! 그걸 누가 사! 호구도 아니고!”

극소수, 패도회에 닥친 불행을 동정하는 이가 있었지만 거의 절대다수는 속이 시원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때. 주방에서 나오던 한 여인이 말했다.

“그나저나. 방 붙은 거 봤어요?”

“암만. 봤지. 그거 보고 지금 다들 이 얘기하는 것 아닌가. 오죽했으면 어? 소관의 경비대장 원월 장군이 친히 와서 패도회의 잔해들을 뒤져서 장부를 압수 수색 했겠냐고. 이제 패도회 놈들의 만행이 온 천하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야.”

“저는 첫 번째랑 두 번째 내용은 이해가 되는데, 세 번째 내용은 잘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그건 뭘까요?”

“흠. 그건 나도 잘 모르겠더군. 뭘 위해 써 놓은 말인지.”

사람들은 방에 적혀 있는 세 번째 내용에 대해 저마다 이야기했다.

그러는 동안.

…탁!

죽립을 쓴 여인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그대로 탁자에서 일어나 객잔 밖으로 나갔다.

“어어? 손님? 술은 한 입도 안 드셨네. 이거 버리고 가시는 거면 제가 먹습니다요? 아이고, 이거 고기랑 소면도 다 남기셨네.”

점소이가 탁자를 치우며 소리쳤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은 채 바쁜 걸음으로 대로를 향해 걸었다.

“……민심이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이거.”

검화(劍花) 남궁율. 남궁세가의 자월특작조를 이끌고 있는 그녀는 현 전역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으고 있는 중이었다.

이윽고, 그녀는 약속 장소인 대나무숲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자월특작조의 조원들과 무림맹의 추격대원들이 모여 있었다.

“무엇을 좀 알아낸 게 있나?”

무림맹 쪽에서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한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낭와진인 비무극. 그는 사망매화를 추격하여 이곳 머나먼 호북성까지 온 인물이다.

남궁율은 등천학관의 교관이기도 한 그에게 예의를 차렸다.

“표적에 대한 민심이 상당히 좋습니다. 이번에 패도회를 전멸시킨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도 알아보았다. 삼칭황천과 사망매화, 둘이서 손을 잡고 패도회를 쓸어버렸더군.”

비무극은 옆을 향해 턱짓했다.

그쪽에는 비둘기 몇 마리를 어깨에 얹고 있는 무림맹의 무인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삼칭황천이라는 자 역시도 무림공적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기 위해 무림맹으로 전서구를 보낸 참이다.”

“무림공적의 도주를 도우면 무림공적이지요. 하물며 그들이 마교를 향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당연한 처사입니다.”

남궁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비무극에게 건의했다.

“이 시점에서 둘의 행방이 초장현을 지나간 것으로 확인되니 곧 증원 요청을 하겠습니다. 아버님께 연락을 취해 놓았으니 곧 저희 남궁세가에서도 지원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비무극은 남궁율의 말을 잘랐다.

“증원은 필요 없다. 우리는 이대로 놈을 추격하여 잡는다.”

“예? 아니 어째서입니까?”

“어째서긴. 놈의 꼬리를 붙잡았는데 어찌 이런 곳에서 시간을 죽이겠는가. 증원이 오기까지는 최소 삼 일 이상이 걸릴 터인데, 그동안 가만히 기다릴 수는 없지. 또한…….”

비무극은 찢어진 방문 하나를 집어 들었다.

一. 사도(私道)가 선을 넘었다. 무고한 여자들을 납치해 노예로 부리고 장강의 도적들에게 팔아넘겼다.

二.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대신해 벌을 내린다.

三. 뒤를 쫓아오는 이들은 패도회를 옹호하는 악적(惡敵)들로 간주할 것이다.

그가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은 바로 세 번째 글귀였다.

“자신들의 뒤를 뒤쫓아 오는 이들은 악적이라. 명분 싸움을 하는군. 사매를 간살하고 도망친 놈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지 모르겠어.”

비무극은 방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리고 차가운 낯빛으로 고개를 들어 남궁율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도발이나 다름없다.”

“도발이라면 더더욱 상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놈은 추격대를 유인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천라지망을 뚫느라 만신창이가 되어 곧 죽을 놈이다. 그 와중에 패도회와 전면전을 치르기까지 했으니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겠지. 아마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발악을 할 생각일 게야.”

“뭔가 사악한 꿍꿍이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남궁율의 말에 비무극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는 사망매화, 그는 사악한 흉계를 꾸밀 자가 아니다. 아마 마지막으로 분기를 토해 낼 생각일 게야.”

“…….”

“그리고 그놈의 목을 베는 것은 바로 나다.”

동시에 비무극은 허리춤의 칼을 빼 들었다.

일곱 개의 붉은 보석이 박힌 칼이 죽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난다.

“흙에 더렵혀진 매화잎은 깨끗한 매화잎으로 덮어야지.”

“…….”

화산의 오명은 화산의 칼로 덮는다.

남궁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무극의 말에는 약간의 무리함이 있었지만 그것은 대의명분이라는 것으로 충분히 덮을 만한 수준이었다.

이윽고, 비무극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사망매화 척살대는 들어라. 지금부터 한 시도 쉬지 않고 달려 놈들을 따라잡는다. 이틀이면 놈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사냥개들이 이빨을 드러냈다.

곧 물어뜯을 모가지에서 뿜어져 나올 뜨거운 핏물의 맛을 기대하면서.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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