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걸해골(乞骸骨) (1)
추이가 말했다.
“칼 버려. 아들 두 번 죽이기 싫으면.”
보통 인질은 살아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래야 인질을 살리기 위해 피협박자가 뭐라도 할 것이 아니겠나.
인질이 이미 죽어 있는 이상 협상의 여지는 물 건너간 셈이다.
일반적이라면 납득되기 어려운 일.
……하지만.
죽은 자의 시신이 아들의 것이고 협박당하고 있는 이가 부모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다.
“그, 그만. 가엾은 아이다. 더는 욕되게 하지 말아라. 이미 죽지 않았더냐?”
도막생이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추이가 든 칼이 도좌윤의 목을 조금 더 깊숙이 베어 냈다.
추이의 목소리가 한결 더 싸늘해졌다.
“이대로 목만 잘라 내서 도망칠 수도 있다. 나 같은 야만적인 오랑캐가 이 목을 가지고 가서 무엇을 할 것 같나. 응?”
“…….”
도막생은 몸을 떠는 것을 멈추었다.
그의 칼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손에 단단히 붙들려 있었다.
추이가 말했다.
“마지막 경고다. 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아들의 목은 떨어진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되찾을 수 없게 될 거야.”
“…….”
도막생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여전히 칼을 쥔 손은 놓지 않고 있었다.
문득.
그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내 아들의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없게 되겠지.”
“꽤나 합리적이시군.”
“아니. 나는 합리랑은 거리가 먼 인간일세. 언제나 늘 그랬지.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가졌어. 그 어떤 비합리적인 방법이라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네.”
도막생의 자세가 낮아진다.
그는 도를 역수로 쥔 뒤 허리춤에 끼웠다.
그리고 발도(拔刀)의 자세를 취했다.
도막생은 추이를 노려보며 눈을 번뜩였다.
핏발이 성성이 곤두선 눈알에 추이의 얼굴이 가득 담긴다.
“세간에 대한 나의 평가를 들어 본 적 있나?”
“쓰레기라는 것 말인가?”
“……그것 말고. 도왕(刀王)의 호적수라느니, 그런 것 말일세.”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도회주 도막생이 젊었을 시절 하북팽가의 도왕과 호적수로 통했었다는 것, 그쯤이야 추이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도막생은 계속 말했다.
“호사가들은 말하지. 나와 도왕이 젊었던 시절에는 서로 호각지세를 이루었었다고. 그러나 지금은 도왕이 나보다 까마득하게 위에 있다고.”
“…….”
“하지만 그 말은 말이야. 반만 맞는 말이라네.”
“……?”
추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여전히 도좌윤의 목에는 칼이 살짝 파고들어가 있는 채였다.
도막생은 자세를 더욱 낮추었다.
그리고 칼 손잡이를 쥔 손에 더욱 더 힘을 주었다.
“지금 도왕의 경지가 나를 까마득하게 앞서 있다는 것은 진실. 하지만 그 전의 말은 사실이 아니지. 나와 도왕이 젊었던 시절에 호각지세를 이뤘던 호적수 사이라는 것 말이야.”
이윽고, 도막생의 칼끝에 끈적한 기운이 맺힌다.
엄청나게 농밀한 농도의 도루가 칼등을 타고 흘러내려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덧 딱딱하게 굳어, 종국에는 액체를 넘어선 고체의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초절정(超絶頂).
절정의 무위를 넘어야만 다다를 수 있는 지고의 영역.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
……무슨 심득을 얻은 것일까.
갑갑한 번데기를 벗어나려는 나비처럼, 도막생은 평생의 염원이었던 절정의 단계를 막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폐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른다.
그는 쇳물처럼 부글부글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시절. 도왕은 내 아래였어.”
“…….”
“젊은 패기였네. 나는 하북팽가를 방문했고 나보다 어렸던 도왕을 만났어. 그때는 도왕이라는 별호도 없었지. 아무도 보는 이 없던 연무장에서 나와 그 치는 오백여 합을 겨뤘어.”
“…….”
“그리고 내가 이겼지. 젊었던 날의 하루에 불과하지만, 그때는 분명히 내가 이겼어. 그는 내 발 앞에 무릎 꿇었고 패배를 인정했었으니까.”
이윽고, 도막생은 말을 이었다.
“그때 도왕을 무릎 꿇렸던 마지막 수. 그 한 수가 바로 이것이다.”
도막생의 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칼끝으로 모여든 도기(刀氣)가 점점 기체에서 액체, 액체에서 고체의 형태로 변해 간다.
절정을 넘어 초절정으로 접어든 고수.
그런 고수가 처절한 심경으로, 간절한 염원을 담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펼치는 비장의 한 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건곤일척(乾坤一擲).
힘은 가히 태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넘쳐 세상을 뒤덮을 만하다.
한 걸물이 몸 전체를 던져 내 하늘인지 땅인지를 결정하는, 그야말로 최후의 최후를 장식할 만한 일수(一手).
그것이 지금 도막생의 칼끝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는 것이다.
“너를 죽이고. 내 아들을 구하리라.”
마치 추이를 죽이기만 하면 죽은 자식을 되살릴 수 있다고 믿는 듯, 도막생의 두 눈에서는 기이한 열기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지랄하고 있네.]
도막생은 자신의 귓가로 들려오는 속삭임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목소리는 그저 귀로 들려올 뿐이다.
[킥킥킥킥- 꼴 좋게 됐구나. 애비와 애새끼가 쌍으로 뒈지게 생겼네.]
[산 부하들은 개처럼 죽이더니, 이미 뒈진 제 아들 시체는 보옥처럼 아끼는구나! 역겨운 놈!]
[막생아- 도막생아- 언제까지 뒈진 아들새끼 불알만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냐.]
[어차피 네 아들의 시체는 갈가리 찢겨서 똥간 똥물에 버무려지고 돼지 먹이로나 쓰이게 될 텐데.]
[오오! 내가 곧 천벌이다. 너와 네 아들을 벌하러 왔노라!]
[황금 요람에서 태어나 수많은 사람들이 떠받들어 줄 때는 몰랐겠지? 자기가 조각조각 찢겨 들개 먹이가 될 줄은. 이게 다 네놈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겠느뇨?]
[네놈의 아들은 지옥 구천에서도 가장 고통스럽다는 화탕지옥에 빠져 있다! 내가 봤지롱! 이히히히히히히히!]
창귀들이 흘리는 수많은 비웃음이 도막생의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있었다.
“너, 너희들이 어찌……?”
도막생이 눈이 흔들린다.
그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는 목소리들의 주인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들은 모두 패도회의 위사들이었다.
순간.
“커-헉!?”
도막생이 피 한 사발을 토했다.
그의 칼에 실려 있던 내력들이 불안정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빠르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츠……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내력들이 말라붙는 것을 느낀 도막생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어, 어째서!? 왜 하필 지금!?”
탈피하려던 나비가 급격하게 힘을 잃는다.
…푸슉!
가슴팍에서 피가 울컥울컥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느새 검게 변색된 피가.
“내 피는 독이거든.”
추이가 도막생의 가슴팍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까 찔렸지? 폐. 횡경막. 간. 췌장.”
추이는 누각에 들어오기 전 도막생의 가슴팍에 송곳을 몇 번 꽂아 넣었었다.
자신의 피를 바른 송곳을 말이다.
“덩치가 크다 보니 효과가 도는 것도 오래 걸리는군. 어때, 이제 취기가 좀 올라오나?”
“……! ……! ……!”
도막생은 비틀거렸다.
쿵-
육중한 대도가 바닥에 떨어졌다.
창귀들의 조롱 때문일까? 심상세계 속에 심마(心魔)가 찾아왔다.
나비가 가장 약해지는 순간은 번데기에서 막 탈피하고 난 직후이다.
초절정이라는 경지에 올라선 고수의 마음가짐도 이 순간만큼은 물러지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뿐인 아들을 잃은 마당에 그것을 조롱당하기까지 한다면 평정심을 유지하기란 불가능할 터.
그 시점에서 몸속에 돌기 시작한 추이의 독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카-학!?”
도막생은 입뿐만이 아니라 눈과 코, 귀에서도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기혈이 역류해 몸 안의 것들을 죄다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선 채로 부들부들 떠는 도막생.
그를 향해서 추이는 입을 열었다.
“도막생.”
“…….”
“도막생.”
“…….”
“도막생.”
“…….”
삼칭(三稱). 세 번 불렀다.
도막생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자신이 갈 수 있는 곳은 이제 황천(黃泉) 말고는 없다는 것을.
“……그런가. 삼칭황천인가.”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아래로 푹 떨구었다.
바로 그 순간.
쩌-억!
추이의 망치가 도막생의 머리를 강타한다.
움푹 파인 머릿가죽을 뼛조각 몇 개가 뚫고 나왔다.
뜨거운 피가 온천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푸슉! …푸슉! …푸슉!
간헐천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와 뇌수.
하지만 추이의 망치질은 멈추지 않았다.
쩍! 쩌억! 짜-각!
한 번의 망치질에 한 명의 얼굴이 떠오른다.
파시에서 만났던 여자들의 초췌한 얼굴.
그리고 여섯 살 소녀 벽리연의 눈망울.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부차루가 불탈 때 만났던, 어딘가 벽리연을 닮은 기녀의 감사 인사도 떠올랐다.
…퍽! …퍼억! …퍽!
회상과는 별개로, 망치질은 계속된다.
도막생의 머리통은 더 이상 구체의 형상을 이루고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잠.”
도막생의 입술이 뻐끔 달싹였다.
“깐…… 만…….”
추이는 망치를 잠시 멈췄다.
도막생이 끊어져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부…… 탁…… 마지…… 막…….”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그것은 들어 올린 것이 아니라 끌어올린 것에 가까웠다.
추이는 도막생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도좌윤의 시신이 있었다.
“내…… 아들…… 장례…… 수습…… 내…… 손으로…… 제…… 발…….”
도막생의 호흡이 점점 가빠진다.
“나…… 없으…… 면…… 아무도…… 내…… 아들…….”
그는 피로 범벅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된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추이의 발치를 향해 힘겹게 기어 왔다.
덥썩-
도막생은 추이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반쯤 부서진 해골을 부비며 애걸했다.
걸해골(乞骸骨). 먼 옛날, 해골을 빌려달라고 구걸하던 초부(樵夫)의 절실함이 이에 버금갈까.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내준 것이다.
비록 오래 내줄 생각은 없었으되 잠시 숨 고를 시간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었다.
“대신. 네가 지금껏 인생을 잘못 살았음을 인정해라. 그리고 네가 괴롭히고 죽인 모든 이들에게 사과해라.”
도막생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이윽고.
도막생은 시비들의 피로 물든 계단을 향해 힘겹게 일어섰다.
…쿵!
비틀거리며 일어서던 도중 옆으로 쓰러졌지만 결국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 번의 절.
도막생은 엎드린 자세에서 또다시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몇 번이나 넘어졌기에 결국에는 피범벅된 손으로 벽을 짚으며 일어나야 했다.
두 번의 절.
모든 힘을 쥐어 짜내어 자신이 죽인 이들에게 두 번의 절을 올린 도막생.
그 뒤에야 그는 아들에게로 갈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쓰러지기를 또 몇 번.
도막생은 쓰러져 있는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자는 듯 눈을 감고 있는 도좌윤.
“아들…… 아…….”
도막생의 입이 열렸다.
“사랑…… 한다…… 부디…… 그곳…… 에…… 서는…….”
그의 손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주르륵-
등잔 속에 있던 향유가 도좌윤의 몸 위로 뿌려졌다.
이윽고, 등불의 불이 도좌윤의 몸 위로 옮겨붙었다.
화르르륵!
붉게 타오르는 불길이 도좌윤을, 관짝 전체를, 이윽고 누각의 천장을 태운다.
곧 누각 전체로 불이 번지기 시작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잠든 아들을 보며, 도막생이 중얼거렸다.
“나뭇…… 가지가…… 가을…… 바람에…… 흔들려…….”
그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나온다.
그것은 분노일까, 후회일까, 속죄일까, 그리움일까, 아니면 단순한 생리 현상일까.
“나뭇잎…… 어디로…… 가…… 는지…… 몰…….”
망치를 든 추이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뻐억!
별로 관심도 없었고.
* * *
부차루 때처럼 활활 불타고 있는 패도회의 누각.
도좌윤의 시체 위로 엎어진 도막생의 시체 또한 한 개비의 장작이 되었다.
“…….”
추이는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화광을 뒤로한 채 누각 바깥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오자운이 기다리고 있었다.
추이가 물었다.
“해백정은?”
“도망갔다.”
“그렇군.”
간단한 상황 요약이었다.
오자운은 불타고 있는 누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부모로서의 의기는 가상하다만, 자기 자식 귀한 줄 알면 남의 자식도 귀한 줄을 알아야지. 결국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제 자식마저 망쳐 놓았구나. 어리석도다.”
하지만 추이는 이미 그곳에서 고개를 돌려버린 지 오래였다.
“감상에 취할 시간 없다. 빨리 움직여.”
“움직여? 무엇을?”
“방을 붙일 것이다.”
“아하. 패도회의 악행을 널리 알리자는 것이군.”
“그것도 있고.”
“……? 뭐 달리 목적이 또 있는가?”
오자운이 묻자 추이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림맹의 개들을 도발해서 몰살시킬 것이다.”
추이의 말을 들은 오자운이 무릎을 탁 쳤다.
“역시 미쳤군.”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