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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54화 (54/110)

54화 참척(慘慽) (5)

무림공적(武林公敵). 화산파 최악의 오명.

사망매화 오자운이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추이가 말했다.

“원래 합의했던 시기보다 다소 늦은 감이 있군.”

“말했잖나. 꽃이 피는 데는 원래 시간이 좀 걸린다고. 자네는 원예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나 보군.”

오자운의 대답을 들은 추이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느긋한 어조의 목소리와는 달리 오자운의 안색이 상당히 파리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도 여기까지 도달하는 동안 우여곡절을 상당히 많이 겪었으리라.

이윽고, 오자운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굳이 확인사살을 할 것도 없었다.

당초 이곳에 도달했던 서른둘의 특급위사들은 모두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바닥에 뒹굴어 다니고 있었다.

모두 다 매화의 비료가 된 것이다.

도막생이 말했다.

“……네놈이 사망매화로구나.”

오자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했네, 회주. 이것들을 하나하나 죽이면서 오자니 오늘 안에 회주의 얼굴을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그냥 틈에 섞여들었다가 한 방에 처리해 버렸지.”

“비열한 놈. 명색이 정파의 협객이었던 놈이 이따위 치졸한 짓을 하느냐?”

“이게 다 회주 얼굴을 빨리 보고 싶어서 그리한 것이니 너무 다그치지 마시게. 굳이 따지자면 수줍음을 너무 많이 타서 부하들 뒤에 꼭꼭 숨어 있었던 회주에게도 잘못이 있어. 사람이 낯을 왜 그렇게 가리나?”

“외팔이 놈이 주둥이 터는 재주 하나는 천하일절이구나.”

“자네 부하들 목숨 털어 가는 재주도 그렇지. 한 팔로도 충분했다네. 자- 보시게.”

오자운은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며 하나 남은 오른손을 펼쳐 보였다.

도막생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자운은 추이를 향해 말했다.

“아직 버틸 만한가?”

“이제 막 몸이 풀린 참이야.”

“좋군. 그럼 나눠서 하겠나?”

“도막생을 맡지.”

“그럼 내가 저쪽의 처자로군.”

패가 나뉘었다.

추이는 그대로 도막생을, 오자운은 해백정을 맡게 되었다.

이 중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는 끝까지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       *       *

월광마저 붉게 물들었다.

누각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

반쯤 부서진 기암괴석들이 솟구쳐 있는 장원 중앙에 오자운과 해백정이 마주섰다.

오자운은 하나 남은 오른팔에 일곱 개의 붉은 보석이 박힌 검을 들었다.

해백정은 체구에 비해 너무 크고 무거운 손도끼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해백정이었다.

“정도의 대협이라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거야? 패도회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어떤 명분으로?”

“하하하- 이상한 말을 하는구나.”

오자운은 옅은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내가 정도의 대협이었으면 어째서 무림의 공적으로 낙인찍혀서 사형제들에게 쫓기고 있겠는가? 나는 정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니 장차 마도에나 귀의하여 그쪽의 거두가 될 생각이다.”

“그러면 조용히 마교가 있는 천산산맥으로나 갈 일이지 왜 패도회에서 이런 지랄난장을 쳐?”

“맨 처음에는 조용히 가려고 했었지. 그런데 이곳의 회주라는 자가 무고한 여자들을 납치해서 창기로 만들지를 않나, 쓸모가 다했다고 제멋대로 수적들에게 팔아넘기질 않나, 저희들 흉을 본 백성들의 혀를 썩둑썩둑 자르지를 않나, 그것도 모자라서 제 부하들까지 기분따라 퍽퍽 죽여 대는데 어찌 그 꼴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지 않겠나?”

“…….”

해백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정이 있어 도막생과 손을 잡기는 했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은 해백정으로서도 거부감을 가질 만한 것이었다.

오자운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이곳 패도회의 부자(父子)는 지금껏 무고한 여자들을 납치하여 그녀들을 강제로 범했고 또 각지로 팔아넘겨 부모, 형제, 친척, 친구들과도 생이별을 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늙고 병들 때까지 착취한 뒤에 흉악한 도당들에게 팔아넘기는 식으로 부를 축적해 왔지. 내가 마두가 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놈들은 오늘 죽어 마땅하다. 이들과 손을 잡았던 너희 수적들 역시도 마찬가지고.”

“패도회에서 폐기들을 샀던 것은 내 부하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라 조금 억울한데. 나도 그 녀석을 처단하려던 길이었거든.”

“그렇다면 왜 우리의 뒤를 쫓는가?”

“내가 해야 할 일을 빼앗겼잖아. 대가리들에게는 명분이라는 게 생각보다 중요하거든. 그래서 말인데…….”

해백정은 오자운을 향해 씩 웃었다.

“우리 쪽으로 오지 않을래?”

“뭐라?”

“장강 생활 말이야. 생각보다 할 만하거든. 우리 채에 합류하겠다고 한다면 내 밑의 백두 하나를 죽인 것쯤은 눈감아 줄 수도 있어.”

수적패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은 오자운은 헛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해백정은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마교가 있는 천산산맥까지 가려면 엄청나게 멀고 험한 길이 될 거야. 또 거기 갔는데 막상 그쪽에서 안 받아 주면 어떡하려고? 그럴 바에는 자유로운 수적 생활이 훨씬 나을걸? 우리도 사파인 만큼 정파 놈들을 혐오해.”

“나는 화산에게 쫓기고 있다. 장강수로채가 화산을 감당할 여력이 되는가?”

“되지. 화산의 도사 놈들이 모조리 몰려와도 우리 장강수로십이채를 어찌할 수는 없어. 그랬다가는 바로 정사대전(定私大戰)이 벌어질 테니까.”

“화산의 뒤에는 무림맹이 있다.”

“장강수로채의 뒤에는 사도련이 있는데?”

화산과 장강수로채. 무림맹과 사도련.

둘 다 세력의 우위를 딱 잘라 논하기 힘든 양대산맥들이다.

하지만 오자운은 여전히 옅은 미소만을 머금고 있을 따름이었다.

“평소였다면 꽤나 혹했을 제안이다. 나는 실제로 사도련을 찾아가 보기도 했었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장강수로십이채는 지금 차기 채주를 정하는 시국을 맞아 혼란스러운 것으로 알고 있다.”

“……!”

오자운의 말에 해백정의 표정이 변했다.

딱딱한 표정으로 오자운을 노려보는 해백정.

그녀를 향해 오자운은 말을 계속했다.

“현재 채주가 곧 물러나고 나면 열두 명의 천두(千頭)들 중에서 다음 채주가 정해지겠지. 그런 마당에 천두 하나가 부하를 죽인 자를 쫓아서 이런 먼 곳까지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야 부하를 너무 사랑하고 아껴서겠지?”

“방금 전에는 네 손으로 처단하려고 했다면서?”

“…….”

“그게 아니라면, 부하를 죽이고 도망간 흉수를 처단해서 수하들의 사기를 드높이려고? 뭐, 그것도 있겠지만 너무 지엽적인 이유지.”

해백정은 입을 다물었다.

오자운은 말했다.

“만약 네가 채주 쟁탈전에서 멀찍이 떨어져 이곳까지 온 것이 다른 강력한 천두들의 경계망에서 일찌감치 벗어나기 위함이라면, 그리고 장강의 세력권 밖에서 외부 인력들을 영입해 채주 쟁탈전에 다시 참여할 생각이라면. 그렇다면 너라는 줄을 잡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도박이지 않겠는가?”

“……솔직히, 거기까진 나도 생각 못 하고 있었는데.”

“그런가? 사망매화와 삼칭황천을 포섭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고?”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지만, 채주님께서는 그런 의도셨을지도 모르겠군.”

해백정은 손으로 턱을 짚은 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젠장. 대체 무슨 꿍꿍이야, 그 늙은이. 나한테 채 밖으로 나가라고 그렇게 닦달을 하더니만. 그게 설마 그런 뜻에서였다고? 아냐. 그럴 리가…….”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중얼거리던 해백정.

그녀는 이내 고개를 들어 저 멀찍이 서 있는 추이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해백정은 다시 오자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당신이 틀린 게 있어.”

“뭐냐?”

“나는 누구 눈치를 보면서 도망 다니는 성격이 못 되거든.”

동시에, 해백정은 손에 든 손도끼를 빙글빙글 돌리던 것을 뚝 멈췄다.

…콱!

도끼날이 붉은 월광을 받아 섬뜩한 예기를 뿜어낸다.

“다른 천두 새끼들 눈치 같은 건 안 봐. 내가 여기 있는 건 그냥 삼칭황천을 산 채로 잡아 오라는 채주의 명령 때문이라고.”

“현재 삼칭황천을 쫓고 있는 남궁세가의 추격대 역시도 자네와 비슷한 목적인 것으로 아네.”

“남궁세가? 걔네도 삼칭황천을 산 채로 잡아 가려고 한다고? 왜? 뭣 때문에?”

“나야 모르지. 하지만 짐작건대, 장강수로채의 채주가 자네를 시켜 삼칭황천을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한 것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검화 남궁율이 이끌고 있는 자월특작조라면 장강의 억새밭 건너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

검화의 얼굴을 떠올린 해백정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아무튼. 오자운은 검을 기울이며 말했다.

“장강수로채의 열두 천두들은 하나같이 무공이 고강하다고 들었다.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모두 말이야.”

“…….”

“그중 서열이 가장 말석인 해(亥), 돼지 백정인 자네는 아무래도 똥줄이 꽤나 타고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먼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채주 자리를 빼앗겨 버릴 테니까.”

오자운의 말을 듣고 있던 해백정이 결국 폭발했다.

“닥쳐라! 싸우기 전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그녀의 손도끼가 맹렬하게 회전하는가 싶더니 이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보며 오자운은 탄식했다.

“아쉽군. 주둥이를 털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내력을 완벽하게 회복했을 텐데.”

오자운은 특급위사들의 목을 단번에 베어 내는 과정에서 막대한 내력을 소모한 상태.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짐짓 여유 있는 척, 내력을 회복하고 있었다.

해백정은 그것을 눈치챈 것인지 더 이상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까-앙!

검과 도끼가 맞부딪치며 무수한 불똥을 자아낸다.

오자운의 검신에 흐르던 기체 형태의 검기가 어느덧 끈적한 액체의 형태를 한 검루로 바뀌었다.

키리리릭-

화려한 매화꽃 일곱 송이가 장원 곳곳에 피어났다.

그것을 본 해백정은 등골에 오싹 끼쳐 오는 소름을 느꼈다.

‘……과연. 이래서 사망매화(死亡梅花)로구나.’

저런 자를 밑에 셋, 아니 둘 정도만 거둘 수 있어도 능히 장강 전체를 접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쪽에서 단호하게 거부 의사를 밝혀 온 만큼 그것은 불가능했다.

해백정은 오자운의 매화꽃을 피해 움직이면서도 저 멀찍이 있는 추이를 곁눈질했다.

‘아니 잠깐. 채주께서 저놈을 산 채로 잡아 오라고 하신 이유가 정말로 포섭을 하기 위함이라면…… 내가 여기서 도막생 따위와 어울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바로 그 순간.

촤악-

매화꽃 한 떨기가 해백정의 허리춤을 얕게 베어 냈다.

해백정은 짐승 같은 움직임으로 허리를 틀어 오자운의 칼을 피해 냈지만 몇 개의 핏방울을 떨구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오호. 이것 봐라? 썩어도 매화검수다 이거지?”

피를 본 해백정의 눈매가 가늘게 좁아졌다.

그녀는 내빼려던 발걸음을 멈추고는 손도끼를 고쳐 쥐었다.

“재밌네. 역시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아. 채주님도 이래서 나보고 밖에 좀 나가 보라고 하신 게지.”

인생은 계산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꼭 손해득실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지산간 험지에 핀 매화꽃을 굳이 따려 드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자기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유독 눈이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여기의 해백정 같은 인물이 바로 그런 축이었다.

창귀무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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