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참척(慘慽) (3)
해백정(亥白丁).
돼지 백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는 장강수로채에 단 열둘밖에 없는 천두 계급이다.
그녀는 콧잔등의 상처를 씰룩이며 추이를 바라보았다.
“구당협곡(瞿塘峽谷)에서는 부하들이 신세를 졌다. 율강(溧江)에서도.”
“…….”
“나는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 말이야.”
해백정은 특이하게도 쌍검을 쓴다.
오른손의 적검과 왼손의 청검이 각기 다른 색깔의 검루를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패도회주 도막생에 이어 천두 해백정.
두 절정고수의 합공을 앞둔 추이 역시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도막생이 이상해졌던 건 이 여자 때문이었나?’
추이는 방금 전까지 도막생이 보였던 이해 못할 행동들을 해백정과 연관 지어서 생각했다.
하지만.
“꺼져라!”
도막생은 해백정에게 대뜸 고함을 쳤다.
누각의 지붕 추녀마루 위에 서 있던 해백정은 별안간 고함치는 도막생을 향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삼칭황천은 공동의 적이라고 했잖아. 협상했던 걸 잊었어?”
“쓸데없는 참견 말고 거기서 나오란 말이다!”
“……?”
해백정은 검지를 뻗어 관자놀이 근처에 대고 몇 바퀴 빙글빙글 저었다.
“머리가 헤까닥 했나. 갑자기 왜 지랄인지 모르겠네.”
이윽고, 그녀는 누각 지붕을 박찼다.
그러고는 도막생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착지한 뒤 추이와 대치하기 시작했다.
“……?”
한편. 추이는 지금 이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막생과 해백정이 전에 손을 잡았던 것은 분명한데, 도막생의 태도가 갑자기 이상해진 이유가 뭘까?
‘뭐, 상관없겠지.’
궁금한 것을 모두 해결할 수는 없다.
지금은 중요한 사실 하나에만 집중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웅- 퍼펑!
바로 이쪽을 향해 날아들고 있는 해백정의 칼 말이다.
쩌-엉!
추이는 곤을 들어 해백정의 쌍검을 막았다.
키리리리리리리릭-
해백정은 몸을 회전시키면서 두 개의 칼을 번갈아 놀렸다.
그 때문에 칼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횟수가 여타 검객들에 비해 두 배나 많았고 또 그만큼 빨랐다.
그 와중에 도막생 역시도 공격을 시작했다.
콰콰콰콰쾅!
그의 참격은 해백정을 피해서 추이에게로만 날아든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 보네.”
“흥! 똑바로 몰기나 해라!”
해백정과 도막생이 각자 쌍검과 도를 휘둘러 추이를 몰아붙였다.
어지럽게 오가는 환검과 강력하게 밀고 들어오는 패도가 시종일관 추이의 목을 노린다.
“…….”
날아드는 검을 곤으로 쳐내고 휘몰아치는 도를 피해 뒤로 물러나며, 추이는 호숫가로 향하고 있었다.
퍼-엉!
추이는 물로 들어가 곤을 휘저어 바닥을 쓸었다.
자욱한 물보라와 함께 자갈들이 산탄처럼 날아들어 해백정과 도막생을 노린다.
“치잇-”
해백정은 도포 자락을 휘둘러 물을 막아 냈으나 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따따다다다다다다다닥!
결국 그녀는 날아드는 자갈들을 피해 바위 뒤로 몸을 숨겨야 했다.
하지만.
쉬리릭-
그것을 놔둘 추이가 아니었다.
해백정이 근처에 있는 큰 바위를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바로 그 위치로 추이의 곤이 내리꽂혔다.
쩌-엉!
쇠붙이가 대립하는 소리.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두 자루의 쌍검이 저 멀리 호수를 향해 날아갔다.
“망할!”
검을 놓친 해백정이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렀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도막생의 거구가 채웠다.
“뒈져라!”
도막생은 거대한 덩치와 칼을 앞세워 밀고 들어왔다.
추이가 또다시 곤을 놀려 물보라와 자갈 소나기를 일으켰지만 그것이 도막생의 돌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퍼-엉! 콰콰쾅!
도막생이 도를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두르자 물이 두 갈래로 쪼개지며 그 아래의 바닥에도 깊은 균열이 생겨났다.
촤악-
추이의 곤이 물살을 갈랐다.
시야를 뿌옇게 가리는 물보라와 자갈들의 너머에서 흑색의 궤적이 독사처럼 날아들어 도막생의 목을 노린다.
그러나.
쩌-엉!
갑자기 옆에서 날아든 도끼에 의해 곤의 궤도는 빗겨나갔다.
어느새 돌아온 해백정이 커다란 손도끼를 주워 와 휘두르고 있었다.
촤악-
해백정은 손도끼를 빙빙 돌리더니 도끼날의 무게에 원심력까지 실어 추이를 내리쳤다.
추이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도끼날의 차가움이 뺨 속으로 얇게 저며든다.
핏방울 몇 개와 귀밑머리 한 움큼이 허공에 휘날렸다.
추이는 볼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물었다.
“그렇게 투박한 것도 쓰나?”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다 쓰는 편이지. 수적이잖아?”
해백정은 죽은 패도회 위사의 시체에서 주워 온 손도끼를 빙글빙글 돌렸다.
손잡이 부근에 쇠로 된 큼지막한 고리가 있어서 그녀의 손목이 들어가면 딱 알맞았다.
붕붕붕붕붕- 콰직!
해백정은 손도끼의 손잡이 고리를 손목에 감아 돌리다가 그대로 내리찍었다.
추이는 곤을 기울여 그것을 막았다.
…쾅!
해백정의 내력이 도끼날에 맺어 형장의 이슬처럼 뚝뚝 떨어져 내린다.
검에 맺힌 내력의 이슬이 검루(劍淚)라 부른다면 이것은 부루(斧淚)라고 부를 만한 것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해백정은 계속해서 도끼를 회전시켰다.
그리고 기세 좋게, 연달아 내리찍어 추이의 무릎을 반이나 구부러지게 만들었다.
추이는 옅게 웃었다.
“장작이라도 패는 것 같군.”
“쪼개지 마라. 잘생겨서 마음 약해지잖아.”
해백정이 말을 마치고는 홱 물러났다.
그 위로 펄쩍 뛰어오른 도막생이 또다시 칼을 내리긋는다.
콰-지지지직!
추이의 두 발이 자갈밭에 무릎까지 파묻혔다.
도막생이 곧바로 뒤로 빠졌고, 또다시 해백정이 뛰어들었다.
절정고수들쯤 되니 처음 합을 맞춰 봄에도 불구하고 연격이 착착 이루어진다.
추이는 곤을 바닥에 꽂고는 그 힘을 이용해서 무릎을 빼냈다.
그리고 곤을 잡은 채로 허공으로 펄쩍 뛰어올라 물러나는 도막생의 턱을 걷어찼다.
“컥!?”
도막생은 입에서 핏물과 함께 이빨 몇 개를 뱉어 냈다.
하지만 추이는 그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빙글-
추이는 아래에 있는 해백정을 향해 품속의 마름쇠들을 우수수 떨어트렸다.
“앗 따가!”
해백정이 뒷목과 등에 꽂힌 마름쇠들을 털어 내며 물러나는 사이, 추이는 도막생을 향해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퍼-억!
도막생은 코앞까지 날아온 망치를 두툼한 손바닥으로 막아 냈다.
하지만.
…뿌욱!
곧바로 뒤이어 날아든 송곳은 막지 못했다.
송곳의 날이 손바닥 가죽을 뚫고 들어올 때의 따끔한 충격은 날끝이 손등을 뚫고 나올 때쯤 불에 덴 듯한 작열통으로 바뀌었다.
“망할!”
도막생은 재빨리 손을 털어 냈다.
하지만 송곳의 날에는 작은 미늘들이 수없이 돋아나 있어서 단순히 손을 터는 것만으로는 빼낼 수 없었다.
결국 도막생은 뒤로 물러나서 칼을 내려놓고 난 뒤에야 손에 박힌 송곳을 뽑아낼 수 있었다.
뿌득-
송곳이 뽑히자 손바닥에 난 구멍에서 핏물이 줄줄 흐른다.
도막생이 물러나는 것을 확인한 추이는 그제야 곤을 회수하여 후퇴했다.
“햐- 이걸 살아나오네.”
해백정이 감탄했다.
도막생 역시도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었다.
이윽고, 도막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전원 집합!”
그 말에 추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
어느새 이렇게 모여들었을까.
패도회의 위사들이 동쪽 다리를 건너 섬에 당도해 있었다.
스르릉…… 차앙! 창!
칼 빼 드는 소리가 요란하다.
검은 피풍의를 걸친 서른두 명의 위사들이 추이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금실로 수놓아진 ‘특급위사(特級衛士)’라는 글귀가 반들거리고 있었다.
추이는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패도회원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송사리들은 아니군.’
이들은 예전에 부차루에서 죽였던 ‘패도육호(佩刀六虎)’보다도 강해 보였다.
하나하나가 정예, 실력 있는 칼잡이들이라는 뜻이다.
“후우-”
추이는 작게나마 한숨을 내쉬었다.
두 명의 절정고수.
그리고 서른두 명의 특급위사.
“식후 운동치고는 다소 과한데.”
추이의 관자놀이가 식은땀 한 방울을 머금는다.
그 시점에서 도막생의 명령이 떨어졌다.
“죽여라!”
그는 직접 나서기보다는 부하들을 조종하여 추이를 잡을 계획인 듯했다.
해백정 역시도 굳이 그 흐름에 합류하지 않고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아후- 따가워라. 그럼 나도 이만.”
그녀는 뒷목에 살짝 박힌 마름쇠 하나를 제거하며 사태를 관망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저벅- 저벅- 저벅-
특급위사들이 붉은 도를 뽑아 들고 추이를 향해 거리를 좁혀 왔다.
“좋다. 덤벼라.”
추이는 맨 앞에 있는 위사를 향해 손짓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자 뒷열에 있던 위사 하나가 조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나선다.
그는 도막생만큼이나 커다란 체구를 가진 칼잡이였다.
“애숭이 놈이 까불기는. 그 몸으로 뭘 하겠다는 거냐?”
바로 그 순간.
“이렇게 하지.”
추이의 곤이 움직였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만으로 잡은 곤 끝.
그리고 앞으로 곧장 뻗어 나간 반대편의 곤 끝이 정확히 특급위사의 코끝을 짓뭉개 놓았다.
“크학!?”
위사는 코를 감싸 쥔 채 코피를 뿜었다.
추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원래는 두개골을 부수려 했는데…… 그 순간 고개를 뒤로 젖혔군.’
특급위사 정도 대우를 받는 놈들이다 보니 마냥 쉽게 죽어 주지는 않을 모양이다.
“먼저 치자!”
“간다!”
“핫!”
반대편에 있던 위사들이 칼을 들고 우르르 덤벼들었다.
추이는 곤을 휘둘러 그들을 밀어냈고 가장 앞쪽에 있는 자의 귀를 잡아당겼다.
“으윽!?”
귀를 잡힌 위사가 추이의 손에 끌려온다.
푹찍-
추이는 곧바로 그의 눈알에 송곳을 꽂았다.
“끄아아아아아악!”
눈에서 피를 뿜으며 절규하는 위사.
추이는 그의 몸을 방패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퍽! …퍼억!
옆으로 돌아서 들어오던 위사 두 명이 추이가 휘두른 망치에 맞아 고꾸라진다.
하지만 그들은 죽지 않았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여전히 추이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었다.
머리가 터진 곳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눈빛이 살아 있는 것을 보니 훈련이 잘된 사냥개들이었다.
심지어 아까 송곳에 눈알에 꿰인 놈 역시도 반대편 눈알로 추이를 쏘아보고 있었다.
추이는 말했다.
“……주인 고르는 안목이 없는 개들이군. 이전에 일도(一刀)라는 놈도 그렇더니.”
“주인을 골라 섬길 줄 알면, 그게 개더냐?”
위사들의 포위망 너머에서 도막생이 이죽거렸다.
그는 위사들을 향해 지엄한 명령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가서 포를 떠 와라! 내 아들의 영전에 바치겠다!”
그 말에 위사들의 눈빛이 더더욱 흉흉해졌다.
핏빛으로 물들어 있는 그들의 칼날이 어느새 떠오르기 시작한 월광을 받아 더더욱 밝게 빛났다.
한편. 추이는 생각했다.
‘……오히려 좋다.’
추이에게 죽은 자는 창귀로 변한다.
창귀를 흡수한 추이는 더더욱 강해진다.
여기 있는 서른둘의 검호들을 모조리 죽인 뒤 창귀로 만들어 부린다면 지금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들어와.”
물론 그 전에 이 시뻘건 칼침의 늪에서 살아남는 것이 먼저겠지만.
창귀무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