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참척(慘慽) (1)
50-참척(慘慽) (1)
추이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리를 건넜다.
섬에 도착하자 황춘의 창귀가 속삭인다.
[탄수(灘水)의 팔진(八陣)······ 탄수의 팔······ 탄수······]
추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계속 무슨 말을 속삭이나 했더니만.”
황춘의 창귀는 추이를 위해 경고하고 있었다.
바로 이 섬에 설치되어 있는 진법(陣法)을 말이다.
“······.”
추이는 섬에 배치되어 있는 기암괴석과 그 사이를 흐르고 있는 물안개에 주목했다.
내원으로 향하는 길은 미로처럼 설계된 진 안에 숨겨져 있다.
저 안의 수많은 통로들은 방문객을 각자 다른 문으로 안내할 것인데, 그중 대부분은 사문(死門)일 것이요, 극소수의 몇 개만이 생문(生門)이리라.
추이는 황춘을 비롯한 패도회의 위사들을 모조리 창귀로 만들어 심문했다.
창귀들은 제각기 진법에 대해 아는 바를 떠든다.
[진(陣)의 이름은 팔궤(八簋)에 육십사라.]
[천충(天衝)의 십육진은 양쪽 끝으로······]
[지축(地軸)의 십이진은 중간에······]
[천전충(天前衝)의 사진은 오른쪽······]
[후충(後衝)의 사진은 왼쪽······]
[지전충(地前衝)의 육진은 앞쪽에······]
[후충(後衝)의 육진은 뒤쪽에······]
[풍(風)의 팔진은 천(天)에 대어 붙이고, 운(雲)의 팔진은 지(地)에 대어 붙여서 도합 팔진이라······]
[천충은 전후충(前後衝)을 아울러 이십사진, 풍 팔진을 합하여 천(天)에 대어 붙여 삼십이양(陽)······]
[지축은 전후충을 아울러 이삽사진, 운 팔진을 합하여 지(地)에 붙여 삼십이음(陰)······ 유병(遊兵) 이십사진은 육십사진의 뒤로······]
[전충(前衝)은 호익(虎翼), 풍(風)은 사반(蛇蟠), 호랑이와 뱀은 모두 음의 서북녘으로······]
창귀들이 말해주는 정보는 파편화된 것이었으나 한데 모으면 꽤 쓸만한 것이었다.
덕분에 추이는 마치 산보를 하듯 한가하게 걷는 것만으로도 진법 속의 함정들을 모조리 피해 생문(生門)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아아아아아아······
활로(活路)를 통해 빠져나오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물안개가 걷히자 호수 위의 섬이 비로소 본모습을 드러냈다.
악양루를 작게 만들어 옮겨놓은 듯한 화려한 누각이 세 채.
그 사이로 보이는 연무장과 정원, 작은 연못들.
그곳에는 시비들만이 분주히 오가고 있을 뿐 칼 찬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추이는 기암괴석들 사이를 빠져나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비들 몇몇이 경계 어린 시선을 보내 왔으나 추이의 복장을 보고는 이내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일급위사 님이신가요? 어려 보이시는데······”
“진 너머 다리에서 있었던 소란은 뭐죠? 비명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무서워요.”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아까 나가셨던 분들은 다 어디 가시고 혼자 돌아오셨나요?”
시비들이 달려와 추이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묻는다.
지금껏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보면 그녀들은 진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인 모양이었다.
추이는 그런 시비들에게 딱 한 마디만을 되물었다.
“패도회에 납치당해 온 여자들. 손을 들어 봐라.”
“······?”
그러자 시비들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추이가 한번 더 말했다.
“괜찮으니 말해라. 이곳에 있게 된 것이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던 이들이 있다면······”
하지만 드물게도, 추이는 말을 중간에 하다가 말았다.
시비들 전원이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가.”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 모두 다 납치된 여인들이었다.
이윽고, 추이는 자기 갈 길로 발걸음을 옮겨놓았다.
“아앗!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회주님께서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시비들은 그런 추이를 붙잡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추이는 그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거나 말거나 계속해서 장원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추이는 가장 안쪽에 있는 누각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끼기기긱······
정문을 열자 위층으로 통하는 중앙 계단이 보인다.
패도회에서 수거한 위사들의 창귀가 그곳을 향해 일제히 피투성이의 손가락을 뻗었다.
그곳이 바로 도막생이 있는 곳이었다.
* * *
나무 난간이 오래된 신음소리를 낸다.
삐걱- 삐걱- 삐걱-
추이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누각의 꼭대기인 5층에는 그윽한 향 냄새가 퍼져 있었다.
우아하게 서 있는 병풍들의 벽 너머로 희미한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生死路隱 此矣 有阿米 次肸伊遣
-죽고 사는 길이 여기 있으매 두렵고
吾隱去內如辭叱都 毛如云遣去內尼叱古
-나는 간다 말도 못 하고 가는가
於內秋察早隱風未 此矣彼矣浮良落尸葉如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 저기 떨어질 나뭇잎처럼
一等隱枝良出古 去如隱處毛冬乎丁
-한 가지에 나고도 가는 곳 모르겠구나
阿也 彌陀刹良逢乎吾 刀修良待是古如
-아, 미타찰(彌陀刹)에서 만날 나는 칼을 닦으며 기다리겠다
노래가락에 맞추어 들려오는 시구를 들으며, 추이는 곤을 들었다.
빠-가가가각!
시커먼 몽둥이가 휘둘러져 병풍들을 찢어발겼다.
그러자 몇 겹으로 쳐진 상중의 장막 너머로 한 거한의 모습이 보였다.
패도회주 도막생.
그가 목어(木魚)와 향로 앞에 앉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윽고. 도막생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움푹 꺼진 볼.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
하지만 오직 눈에서만큼은 생기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다만 그 생기라는 것은 다소 이질적이었다.
마치 갓 도축한 소의 뱃속에서 간을 꺼내어 썰었을 때의 느낌, 그 날것 그대로의 생기.
그것이 시뻘겋게 물든 도막생의 눈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저 만만한 것은 부처와 원시천존이었다.”
도막생은 건조한 목소리로 추이를 향해 말했다.
“죽이고 또 죽이고, 억겁에 걸쳐 고쳐 죽여도 모자란 것들. 그것들이 내 아들을 데려갔다고 생각하면 눈을 뜨고 있어도 감은 것이고, 눈을 감고 있어도 뜬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일어났다.
거력패도라는 별호답게, 그의 몸집은 천장에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도막생은 추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왔다. 살아있어 주어서 고맙다. 너를 증오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그리고 내 손으로 직접 너를 찢어 죽일 수 있게 해 주어서, 내 아들의 제삿상에 네 살점으로 만든 육젓을 올릴 수 있게 해 주어서,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를 주리 참듯 꾹꾹 누르고 있었다.
치받치는 통곡, 영원한 극형, 원초적인 증오.
휘몰아치는 생명 본연의 포악성이 성성하게 곤두선 눈알 속의 핏발에 끈적하게 배어나온다.
도막생은 생간을 씹을 때 뚝뚝 떨어지는 핏물처럼 목소리를 흘렸다.
“‘맹자(孟子)’에 ‘환과고독(鰥寡孤獨)’이라는 말이 나온다.”
추이 역시도 이 구절을 안다.
‘환(鰥)’은 아내를 잃은 남자를 뜻한다.
‘과(寡)’는 남편을 잃은 여자를 뜻한다.
‘고(孤)’는 부모를 잃은 아이를 뜻한다.
‘독(獨)’은 자식이 없는 부모를 뜻한다.
그래서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환부(鰥夫)라 칭한다.
그래서 남편을 잃은 여자를 과부(寡婦)라 칭한다.
그래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고아(孤兒)라 칭한다.
“······여기에 자식을 잃은 부모를 뜻하는 말은 없다. 그렇지 아니한가?”
독부(獨夫)나 독부(獨婦)는 원래부터 자식이 없는 남자, 여자를 가리킬 뿐.
있던 자식을 잃어버린 남자나 여자를 뜻하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어가 가지는 의미를, 그 슬픔의 뜻을 온전히 담아낼 만한 그릇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추이는 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을 뿐이다.
“감성 팔지 마라.”
“······.”
“너희 부자 둘 다 똑같다. 남의 부모, 아들, 딸 눈에서 피눈물을 수없이 뽑아내지 않았던가. 이 정도 값이면 싸게 먹힌 셈이지.”
“······.”
추이의 대답을 들은 도막생이 천천히 일어났다.
이윽고, 그가 바닥에 있던 커다란 칼을 집어 들었다.
츠츠츠츠츠츠츠······
절정의 고수들만 뿜어낼 수 있다는 액체 형태의 강기(罡氣).
칼의 눈물이라 불리는 ‘검루(劍淚)’.
그것이 도막생의 칼끝에서 꿀처럼 끈적하게, 핏물처럼 붉게, 뚝뚝 방울져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추이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정말로 잘 와 줬다. 만약 네놈들이 그냥 초장현을 지나갔다면 내가 사냥개들을 끌고 황천 끝까지라도 쫓아갔을 것이야.”
“······.”
추이는 조용히 턱을 한번 쓸었다.
호북성의 성벽을 넘기 전에 패도회를 정리하고 가겠다고 결정한 것은 다시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들을 후방에 그냥 두고 갔더라면 필시 무림맹의 추적조들과 야합했을 것이고, 만약 그랬다면 전략을 수립하기가 배로 까다로웠을 것이다.
만약 야합하지 않았더라도 정도와 사파의 사냥개들을 한꺼번에 떨궈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차라리 지금 서로의 존재를 모르고 떨어져 있을 때가 가장 처리하기 쉬운 순간인 것이다.
한편, 도막생은 칼을 꺼내 들며 으르렁거렸다.
“네 몸에서 발라낸 살점으로 편육을 만들고 네 뱃속에서 끄집어낸 내장으로 젓갈을 담글 것이다. 그것을 내년 내 아들의 제사상에 올리리라.”
지금껏 갈 곳을 잃었었던 아비의 분노가 정확하게 한 곳을 향해 집중되고 있었다.
이윽고, 도막생의 칼이 우에서 좌로 길게 그어졌다.
···번쩍!
시뻘건 빛과 함께 초승달 모양이 참격이 폭사되었다.
“······!”
추이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위로 날아드는 절삭의 궤도를 벗어났다.
쩌-억!
추이 뒤쪽에 서 있던 벽이 두 조각으로 갈라졌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콰콰콰콰쾅!
창문 건너편에 있던 다른 누각이 통째로 잘려나갔다.
그 안쪽의 벽, 기둥, 지붕, 그 안의 집기들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과연.’
추이는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몸을 낮추었다.
높은 누각 하나를 통째로 베어버리는 것을 보니 거력패도(巨力覇刀)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다.
과연 젊었던 시절에 도왕의 호적수로 통했던 사내다웠다.
‘······하지만 그것은 거력패도와 도왕이 아직 풋내기였던 시절의 이야기. 지금의 둘은 하늘과 땅의 차이겠지.’
도왕(刀王)과 검왕(劍王)은 현재의 호적수.
그리고 추이는 그 중 검왕 남궁천과 겨뤄봤던 경험이 있었다.
-第 五手-
남궁천과 주고받았던 마지막 공격을 떠올린 추이가 몸에서 기세를 내뿜었다.
···후욱!
창귀들이 시뻘건 피눈물을 흘리며 추이의 단전 속 깊숙한 곳에서 기어나왔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그저 붉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는 것으로 보일 뿐이었다.
“······!”
도막생은 추이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날카로운 살기에 움찔했다.
증오와는 별개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눈빛.
대체 어떻게 저렇게 어린 나이에 이런 수준의 무공을 보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추이는 단전 속의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남궁천.
그런 강적에게서 살아남은 추이의 경지는 현재 이올(彛兀)의 제 2층계에 이르러 있었다.
추이와 도막생이 대치하는 가운데.
···우르릉! 콰쾅!
창문 너머, 도막생의 칼에 쪼개진 누각이 완전히 내려앉았다.
쩌적- 쩌저저저적-
그리고 두 사내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재의 누각 역시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웠다.
이대로라면 둘 다 무너지는 건물의 잔해에 깔릴 위기였다.
이윽고, 도막생이 내뱉은 침음이 먼저 침묵을 깼다.
“나가자.”
넓은 곳에서 한 판 뜨자는 말.
추이 역시도 긴 무기를 다루는 만큼 협소한 공간에서의 싸움은 여러모로 불리하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추이는 도막생을 따라 누각 밖의 장원으로 향했다.
바야흐로, 물러설 곳 없는 절정고수들의 생사결(生死決)이 이루어지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