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합(合) (1)
45-
추이와 오자운은 한 객잔을 찾아 들어갔다.
이곳은 패도회의 영역인지라 무당과 화산의 도사들도 출입을 거려하는 곳이었다.
간 크게도, 추이는 패도회의 장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객잔의 1층에 자리를 잡았다.
그것도 입구의 발을 걷고 들어가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는 위치였다.
태연한 표정으로 탁자 앞에 앉은 추이를 보며, 오자운은 탄성을 자아냈다.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배짱을 부리기도 힘들 걸세.”
실제로 추이는 얼굴을 가린다거나 숨어다닌다거나 하지 않고 백주대낮에 대로를 당당히 활보했다.
그것도 패도회의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구역을 말이다.
그래서일까? 오가는 이들은 추이를 지나치면서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점소이가 주문을 받으러 왔다.
오자운이 물었다.
“뭐가 맛있나?”
“저희 객잔에는 파는 것이 하나 뿐입죠. 그걸로 내오겠습니다요.”
점소이의 말은 퉁명스러웠으나 오자운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몇날 며칠을 제대로 먹지 못해 뱃가죽이 등가죽과 맞닿을 지경이었으니까.
이윽고, 음식이 나왔다.
시들시들한 푸성귀를 돼지기름으로 볶아낸 소채볶음.
그리고 채수(菜水)를 우려낸 국물에 만 소면이었다.
뽀얀 김이 올라오는 멀건 국물 위에 기름기가 둥둥 떠 다닌다.
오자운은 젓가락을 들었다.
후루룩-
국물이 배인 소면을 한 젓가락 크게 집어 입안에 욱여넣는다.
우적- 우적- 우적-
미치도록 맛있었다.
비록 별다른 간도 되어있지 않아 그저 뜨거운 맛에 먹는 국물이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실로 오랜만에 먹어보는 요리였다.
오자운은 젓가락으로 소채볶음도 집었다.
마음 같에서는 젓가락 따윈 부러트려 내던져 버리고 손으로 한 웅큼 크게 쥐어 움썩움썩 씹어먹고 싶으나, 이것은 오자운에게 남은 최소한의 인간성이었다.
돼지기름에 볶은 각종 채소와 나물들이 입안에서 씹힌다.
웅취(雄臭). 눅진한 돼지 비린내.
만약 예전 같았다면 잡내를 잡지 못했다며 표정을 찡그렸겠지만, 지금 이 순간 오자운에게는 그 어떤 조미료보다도 감미롭게 느껴졌다.
짜디짠 소금기가 온몸, 살점과 내장 사이사이로 배어든다.
오자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소면과 채수 국물, 그리고 소채볶음을 완식해 버렸다.
게가 마파람에 눈을 감추는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였다.
그때쯤 해서.
“여기 요리 나왔습니······ 오잉?”
점소이가 다른 요리를 가지고 나왔다가 깜짝 놀란다.
오자운이 이미 모든 음식을 먹어치워 버렸기 때문이다.
“······!”
오자운은 점소이가 내온 요리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돼지의 뒷다리살을 크게 깍뚝깍뚝 썰어서 정육면체 모양으로 만든 뒤 묘한 맛이 나는 간장에 푹 재웠다가 통째로 쪄낸 것.
별다른 이름도 없는, 이 객잔의 하나뿐인 요리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커다란 놋그릇이 놓였다.
여기저기 찌그러진 이 커다란 놋쇠 사발 속에는 푸르스름한 빛깔이 도는 탁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오자운이 점소이를 보며 물었다.
“이 술은 이름이 뭔가?”
“의록주(蟻綠酒) 입니다요. 좁쌀로 담근 술입죠.”
점소이는 탁주가 담긴 놋그릇을 옆에 있는 화로의 숯불 위에다 올려놓았다.
이윽고, 술이 보골보골 소리를 내며 끓는다.
그릇 중앙에서 끈적한 거품이 일어나며, 술 위에 둥둥 떠다니던 개미와도 같은 부유물들이 놋그릇 가장자리로 퍼지고 있었다.
한편, 추이는 꼬치에 꿴 매실을 숯불에 구운 뒤 입으로 가져가 씹는다.
오자운은 데운 술을 한잔 들이켰다.
“크- 이건 밍밍해서 술 같지가 않군. 데우니까 더욱 그런 것 같으이.”
“차게 먹으면 독 때문에 배탈 나. 뎁혀 먹어.”
추이의 말에 오자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돼지고기 찜을 먹었다.
검게 졸아붙은 돼지고기 깍두기들 역시도 금새 오자운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추이는 음식에는 손대지 않은 채 매실만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오자운이 추이에게 물었다.
“매실을 좋아하나?”
“어렸을 적에 자주 먹었다.”
“으음. 이렇게 술을 데우며 매실을 먹고 있으니 옛 고사가 떠오르는군.”
자주논영웅(煮酒論英雄).
유비와 조조가 매실을 안주 삼아 술을 데우며 천하의 영웅을 논했다던 옛날 이야기.
오자운이 화산파의 매화검수로 있을 당시 좋아하던 고사이기도 했다.
그는 추이에게 물었다.
“자네는 이 세상에 영웅이 몇이나 있다고 생각하나?”
“몰라. 관심 없다.”
“내 생각에는 셋이야.”
오자운은 부글부글 끓는 의록주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 말했다.
“나. 자네. 그리고 자네를 키운 스승.”
“······.”
그 말을 들은 추이는 웃었다.
오자운은 인상을 썼다.
“왜 웃나? 나는 진지하네.”
그는 자신을 영웅이라 자칭하는 것 때문에 추이가 웃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추이가 웃은 이유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럼 마지막은 빼라. 둘인 것으로 하지.”
“음? 자네 스승이 영웅이 아니라는 소리인가? 스승과 사이가 별로 안 좋았었나 보군. 하긴, 나도 그렇다네.”
“그게 아니라. 겹치기 때문이야.”
“?”
오자운은 추이의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가 추이에게 이런저런 궁금증들을 토로하려는 순간.
옆 탁자의 호사가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네 그 소식 들었나? 불타버린 부차루 말이야.”
“못 들었네. 무슨 일이 또 있나?”
“별 건 아니고. 부차루의 기녀들이 다들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다더군. 더는 일할 곳이 없다면서 말이야.”
“허어- 참. 그럼 우리는 이제 앞으로 어디서 노나?”
“그러게 말일세. 이게 다 어떤 못된 놈이 부차루를 불태워서 그런 것이지. 천하의 나쁜 놈 같으니라고.”
두 명의 사내는 부차루가 불타버려서 더는 놀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 아쉽다는 듯 투덜거리고 있었다.
오자운은 그 말을 듣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원래 협(俠)이라는 것은 선량한 약자를 위해 사악한 강자와 싸우는 것이 아니지.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약자들을 위해 유식하고 탐욕스러운 강자들과 싸우는 것이야. 그래서 세상에 협객이 드문 것이고.”
추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하기 전, 오자운을 따라다니던 시절의 일이 떠오른다.
그 당시의 오자운은 무림맹의 추격조를 피해 도망가는 와중에도 의와 협을 잊지 않았었다.
파락호들에게 돈을 뜯기고 있던 상인들을 구해주었고, 물에 빠진 아낙을 건져주었으며, 사파 무인들에게 죽을 뻔한 정파의 무인들을 살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오자운이 보답을 받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거의 대부분은 은혜를 원수로 돌려받아야만 했다.
파락호들에게서 구해주었던 상인들은 오자운의 목에 걸린 현상금을 탐내 관아에 밀고했고, 물에 빠진 아낙은 오자운을 색마로 몰았으며, 사파 무인들을 물리친 정파 무인들은 되려 오자운을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자운은 간난과 곤란에 빠진 이를 마주하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사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다른 사람의 간난(艱難)을 덜어주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곤란(困難)에 빠진 이를 구해주는 것을 용(勇)이라 부른다 하지.’
지난밤 그가 한 말 그대로 말이다.
한편, 옆 탁자의 호사가들은 계속해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부차루가 타버린 건 안타깝게 됐지만 말일세. 그거 하나는 좀 통쾌하더군.”
“뭐 말인가?”
“아, 그거 말이야. 그거.”
“아 그거~”
두 사내는 낄낄 웃으며 각자 자신의 사타구니를 주먹으로 탕탕 내리친다.
“패도회의 도 공자가 반병신이 된 것 말이지?”
“하하하- 이제는 공자가 아니라 고자라고 해야 맞겠지. 부차루의 미녀들을 저 혼자만 쭈물딱거리던 그 색마 놈. 번루(樊樓)에 그놈의 개기름 번드르르한 얼굴이 안 보이니 속이 다 시원하구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도 고자, 그 치 아주 못쓸 놈이었어.”
“맞네. 그놈 등쌀에 초장현 처자들이 밖에 돌아다닐 수가 없었으니 말 다한 셈이지.”
“눈에 띄는 여자는 죄다 잡아다가 겁간을 하질 않나, 제놈 호위무사들까지 데리고 와서는 아주 떼루······”
“겁간만 하면 다행이게? 아예 먼 곳에 팔아넘기기도 했잖은가. 듣자하니 몇몇 처자들은 장강 너머의 수적들한테까지도 팔아넘겼다더구만.”
“끔찍한 일이지. 아 막말로, 딸자식 밖에 내보내고 별 생각 없이 기다리고 있었을 부모들 마음은 어쩌란 말인가? 어느 날 산책 나갔던 딸이 그대로 영영 실종되었는데 알고 보니 이역만리 장강의 수적들에게 팔려가 노리개가 되었다고 하면? 속 터져 죽는거지 뭐.”
“잘 죽었다, 잘 죽었어.”
“예끼, 이 사람. 죽기는 누가 죽어? 팔다리가 모조리 불구가 된 채 고자가 된 거지. 죽은 건 아닐세.”
“어휴.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구만. 그렇게 목숨을 부지할 바에야······”
그러자 주변에서도 호사가들의 대화에 동조하는 목소리들이 나온다.
옆 탁자의 술꾼들과 윗층의 호사가들이 각자 한마디씩 보탰다.
“나는 오늘 여기에 그 색마 놈이 고자 된 기념으로 술 먹으러 왔네! 왜냐면 그 고자 새끼가 내 부인을 건드렸었거든!”
“도좌윤, 그 발정난 개 같은 놈이 내 딸도 건드렸네!”
“심지어 내 손녀까지 건드렸어! 그 어린 것을!”
객잔 안에 있던 술꾼들 사이에서 고함 소리가 연이어 터져나온다.
그만큼 도좌윤의 엽색 행각이 도를 넘어왔다는 뜻이리라.
바로 그 순간.
···콰쾅!
객잔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입을 막아버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저벅- 저벅- 저벅-
오동나무 문짝이 종잇장처럼 찢어지며 한 거구의 사내가 객잔 안으로 들어왔다.
장판파의 장익덕이 살아 돌아오면 이런 모습일까?
그는 팔 척에 육박하는 키에 떡 벌어진 기골을 가지고 있는 무인이었다.
눈은 퉁방울처럼 크고 부리부리했고, 눈썹은 숱이 너무 많아서 구레나룻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턱 밑으로 자라난 수염이 배꼽에 닿을 만큼 길었다.
등에는 자신의 몸집만큼이나 커다란 태도를 짊어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 입을 놀리던 놈들이 어떤 놈들이냐.”
거구의 사내가 객잔 안의 술꾼들에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도좌윤을 욕하던 술꾼들은 코를 탁자에다 박은 채 죽은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자.
“네놈이렷다?”
사내는 손뚜껑 만한 손을 뻗더니 제일 큰 목소리로 떠들던 호사가 하나의 머리통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뿌드득! 뿌작!
손아귀에 잡힌 그의 머리통을 마치 박 터트리듯 으깨버렸다.
그 끔찍한 참사에 객잔의 분위기는 더더욱 차갑게 얼어붙는다.
이윽고, 사내가 말했다.
“들어라. 버러지들아. 본좌는 패도회주 도막생이라 한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리춤에 긴 칼을 찬 패도회의 무사들 수십 명이 객잔 안으로 들이닥쳤다.
객잔 전체가 패도회에게 포위되었다.
“······.”
“······.”
“······.”
얼어붙었던 분위기는 이제 아예 처형장의 그것처럼 변해 있었다.
방금 전까지 패도회를 욕하던 술꾼들은 감히 살려달라는 말조차도 못하고 그저 덜덜 떨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내, 패도회주 도막생의 입이 열렸다.
“나오라.”
그의 살기등등한 시선이 객잔 전체를 훑었다.
“여기 있는 것 다 알고 왔다.”
바야흐로, 혈겁(血劫)의 전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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