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월담 (4)
43-
···와장창장!
고가의 미술품, 값비싼 비단 장식, 그 외의 온갖 비싸고 사치스러운 가구들이 죄다 박살이 났다.
추이는 방과 복도의 모든 것들을 싸그리 다 몽둥이로 때려부순 뒤 거기에 불을 싸질러 버렸다.
화르르륵!
높은 누각에서 피어오른 불길이 점점 아래로 번져가고 있었다.
“으으······ 으으으으······”
도좌윤은 부차루가 불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오줌 바닥에 납작 엎드려 덜덜 떨 뿐.
추이는 곤을 들어올렸다.
“네 부하의 의기를 봐서 목숨은 거두지 않겠다.”
“고, 고맙습······ 아아아악!”
추이를 향해 엎드리려던 도좌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흑색의 곤이 그의 어깨를 부숴버렸기 때문이다.
···와직! ···빠직! ···우드득!
도좌윤의 왼쪽 팔 전체의 뼈가 잘게 부서졌다.
아마 평생 쓰지 못할 것이 분명해 보였다.
추이는 곤을 옆으로 움직여 도좌윤의 오른쪽 팔 역시도 똑같이 만들어 주었다.
그 다음은 오른쪽 다리, 그 다음은 왼쪽 다리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있군.”
추이는 품에서 망치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팔다리를 모두 잃어버린 도좌윤의 사타구니를 향해 힘껏 내리찍었다.
뻐-적!
고기가 으깨지는 소리와 함께, 도좌윤이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추이는 옆에 쓰러져 있는 일도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약속은 지켰다.”
죽이지는 않았으니 일도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말했던 소원은 이루어진 셈이다.
“분수에 맞지 않는 부하를 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지.”
추이는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도좌윤의 입을 발로 꾹 눌러 벌렸다.
똑-
추이의 손끝에서 피 한 방울이 떨어져 도좌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 * *
부차루 위에서 너울거리는 화염이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다.
거대한 촛불처럼 이글거리는 누각들을 뒤로하고, 추이는 밖으로 나왔다.
그곳에서 추이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한 무리의 기녀 떼였다.
추이가 밖으로 나오자 기녀들 무리 중 몇몇이 추이를 성토했다.
“이곳은 우리들의 터전이오!”
“우리들은 여기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어! 빚도 거의 다 갚아가고 있었고!”
“그런데 당신 때문에 일할 곳도, 머물 곳도 잃어버렸어!”
"당신은 당신이 정의로운 줄 알지? 아주 큰 착각이야!"
“영웅놀이에 심취하려거든 다른 데 가서 할 일이지, 왜 하필 여기에서 지랄이냐고!”
기녀들은 추이를 향해 그릇이나 비녀 등등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
그러자.
부-웅!
추이가 곤을 휘둘렀다.
곤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등등한 바람에 기녀들은 겁을 집어먹고 일제히 엉덩방아를 찧었다.
추이는 얼빠진 얼굴로 앉아있는 기녀들의 면면을 쭈욱 톺아보았다.
파시에서 만났던 파등선의 기녀들이 떠오른다.
폐기(廢妓)가 되어 폐기(廢棄)처분 된 여자들.
그리고 이곳에서 아직 멀쩡하게 현역으로 일하고 있는 여자들.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들과 눈앞에 보이는 얼굴들을 비교하며, 추이는 말했다.
“정의니 뭐니, 나는 모른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 건조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나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살 터이니 너희도 너희 마음 가는 대로 살아라.”
그 말에 기녀들의 표정이 멍하게 바뀐다.
추이는 곤을 빗겨들고는 불길 너울거리는 부차루를 떠났다.
정의니 영웅이니 하는 것은 별로 관심 없는 주제였다.
다만, 오직 한 사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벽리향이라는 이름의 기녀 한 명만이 그런 추이의 등 뒤에 절을 올리고 있을 뿐.
* * *
초장현의 성문 소관(昭關).
이곳의 경비대장 원월은 멀리서 아스라이 번져오는 화광에 깜짝 놀라 막사 밖으로 뛰쳐나왔다.
“저게 무슨 일이냐?”
하지만 경비병들 역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원월은 성문 근처에 있던 화산파와 무당파의 무인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고개를 저었다.
“저곳은 사파의 영역인지라 저희도 순찰을 제한적으로만 돌고 있었습니다.”
“패도회와 마찰을 일으키면 자칫 문제가 커질 수 있으니까요.”
결국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때.
순찰을 나갔던 경비병들이 헐레벌떡 뛰어오며 외쳤다.
“불입니다! 부차루에 불이 났습니다!”
“술값 때문에 시비가 붙은 왈패들이 불을 낸 것 같답니다!”
“누각들 너머로 불이 번지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화재 사건이 났다.
원월은 이마를 짚었다.
“어떤 미치광이가 감히 부차루에······ 일단 병사들을 풀어서 우물물을 길어와라. 바람이 세니 불이 번지지 않게 조기에 진압해야 한다.”
성벽이 분주해졌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 대부분이 화재 진압을 위해 뛰쳐나갔다.
그때, 원월은 성문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두 남자를 발견했다.
한 명은 소년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방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큰 키의 남자였다.
원월은 그중 하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아, 일전의 그 의원이시군. 이름이 뭐였지?”
“동고공입니다.”
“맞네. 동고공. 패도회로 갔던 정력제 장수.”
원월의 말을 들은 동고공 의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성문을 좀 열어 주십시오.”
“뭐? 성문은 왜?”
“짐이 무거워서 밖에 버리고 왔던 약재들이 있습니다. 그 약재들이 급히 다시 필요해졌습니다.”
원월은 가당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어명이 아니고서야 성문을 움직일 수는 없다. 그것이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했을 때부터 줄곧 지켜져 내려오는 법이다.”
성문을 열려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았다.
그리고 철저한 수색과 꼼꼼한 조사 없이는 그 누구도 통과시킬 수 없는 일.
하지만 동고공 의원은 계속 같은 말을 했다.
“성문을 열고 약재를 더 가져와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정말로 큰일이 납니다.”
“무슨 큰일?”
“지금 귀하신 분이 아파서 몸져누워 있습니다. 그 약재를 가지고 오지 않으면 분명 돌아가실 겁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란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매우 지체높은 인물이라면?
원월의 얼굴에 약간의 머뭇거림이 깃들었다.
“그 귀하신 분이 누군데?”
“패도회의 도좌윤 공자입니다.”
동고공 의원의 말에 원월은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때, 아까 부차루의 이상을 보고했던 경비병들 몇몇이 원월에게 달려와 속삭였다.
“저 의원의 말이 맞습니다. 패도회의 도 공자가 지금 중태랍니다. 팔다리가 다 부러진 데다가 사타구니도 으깨졌고······ 게다가 무슨 이상한 독에 중독되었는지 정신도 오락가락 하고 있다더군요.”
“패도회라······.”
부하의 보고를 받은 원월은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패도회주의 아들 사랑은 끔찍하기로 유명하지. 만약 내가 규율을 운운하며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도 공자의 치료가 늦어질 것이고, 그러다가 만약 도 공자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패도회주의 원한을 꼼짝없이 나 혼자 뒤집어쓰게 되겠군.’
원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동고공 의원이 말했다.
“지금 성문을 열어주시면 약재를 가지고 와 도 공자를 치료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경비대장께서는 패도회의 은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
원월은 생각했다.
지금 눈 딱 감고 문을 열어주면 그는 패도회의 은인이 된다.
하지만 원리원칙을 고집하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는 패도회의 원수가 된다.
첫 번째 경우에는 온통 좋은 일뿐이다.
패도회에서 두둑하게 뒷돈을 찔러줄 것이고, 그것이면 처자식들을 한동안 살뜰하게 보살필 수 있다.
이후 진급에 필요한 여러 공적들을 세울 때 패도회의 힘을 빌릴 수도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경우에는 온통 나쁜 일뿐이다.
제아무리 나라의 녹을 먹는 관인이라고 해도 토착 세력들과 불화를 일으키면 미래가 고달픈 법.
그가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패도회가 어깃장을 부리며 협조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업무가 몹시 고달파진다.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지, 재수없으면 퇴근길에 눈먼 칼에 맞을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원월은 끙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을 조금만 열어줘라. 의원이 지나갈 수 있게.”
“옙!”
병사들이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도 상관이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던 모양이다.
이윽고,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소관의 철문이 살짝 열렸다.
딱 한 사람만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틈이었다.
동고공 의원은 원월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잰걸음으로 돌아섰다.
그때, 원월이 동고공 의원을 불렀다.
“잠깐. 뒤에 그 친구는 뭔가?”
원월의 시선은 동고공 의원의 뒤를 따르고 있는 큰 키의 남자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자 큰 키의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방립을 벗었다.
검댕에 잔뜩 그을려 있는 그의 얼굴은 원월을 비롯한 모든 병사들이 아는 이의 것이었다.
“뭐야. 부차루의 점소이 황눌(訥)이잖아.”
“너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
“아, 부차루에 불이 나서 탄 모양이구만.”
병사들이 한마디씩 했다.
녀석은 이곳 초장현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토박이이니 굳이 신원을 확인할 것도 없었다.
동고공 의원이 말했다.
“제가 밤눈이 어둡고 힘도 없어서 급한 대로 데려왔습니다. 이놈이 밤길을 안내해주고 짐도 들어줄 것입니다.”
“알겠소. 어서 가보시오. 성문을 닫아야 하니.”
원월은 점소이 황눌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는 열린 성문을 다시 닫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몹시 조급해 보였다.
이윽고, 동고공 의원과 점소이 황눌은 성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잠시 뒤.
동고공 의원과 점소이 황눌은 약초가 잔뜩 실려있는 지게를 들고 성문으로 되돌아왔다.
동고공 의원은 성문을 통과하려다 말고 원월에게 물었다.
“도 공자의 상태는 어떻답니까?”
“더 안 좋아졌다더군. 그러니까 어서 가보게. 괜히 내가 시간을 빼앗았다고 할지 모르니.”
원월은 인상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병사들 역시 방금 나갔다가 들어온 두 사람을 새삼 다시 검문하려 들지는 않았다.
동고공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얼굴에 그을음이 잔뜩 묻어있는 점소이 황눌이 그 뒤를 바삐 따랐다.
경비병들은 두 사람이 곁을 지나가는 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화재를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만, 그 중에도 눈썰미 좋은 병사 몇몇이 있어.
“어라? 황눌 저 녀석, 덩치가 좀 더 커진 것 같지 않아?”
“그런가? 어두워서 못 봤네.”
“지게도 이상하게 들고 가는구먼. 왼팔을 뭐 저리 흐느적거려?”
“신경 끄고 우리도 물이나 뜨러 가세. 이쪽으로 번질라.”
멀어지는 둘의 모습을 보며 대수롭지 않게 떠들고 있을 뿐이다.
* * *
소관 밖. 성벽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
점소이 황눌은 어둠 속에 혼자 남아 덜덜 떨고 있었다.
옷과 방립은 빼앗긴 지 오래.
내일 아침에 성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여기서 밤이슬을 맞고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 남자와 옷을 바꿔 입어라. 그리고 내일 진시초(辰時初)까지는 성문 안으로 들어올 생각일랑 말도록. 만약 말을 듣지 않는다면······ 패도회의 도가놈처럼 될 줄 알아라.’
황눌은 다짜고짜 기루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자신의 뺨을 때린, 그리고 자신을 잡아와 이곳 숲속에 떨궈버린 소년을 떠올리며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씨발새끼.”
욕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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