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월담 (2)
41-월담 (2)
삼경(三更)을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 울려퍼졌다.
“성문을 닫을 준비를 하라.”
경비대장 원월(薳越)이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문 앞에 줄 선 사람들의 발걸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저 성문이 언제 닫히느냐에 따라 누구는 성문 너머의 따듯한 집, 혹은 여관으로 들어갈 것이고 다른 누구는 묘시초(卯時初)가 될 때까지 꼼짝없이 밤이슬을 맞아야 하는 것이다.
한 병사가 원월에게 말했다.
“대장님. 오늘은 성문을 조금만이라도 더 열어두는 것이 어떨까요? 줄 선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다들 성벽 밖에서 밤을 지새우라고 하는 것은 좀······”
하지만 원월은 단호했다.
“어명이 아니고서야 성문을 움직일 수는 없다. 그것이 금릉(金陵)에 도읍을 정했을 때부터 줄곧 지켜져 내려오는 법이다.”
그는 원칙주의자였고 병사들도 그것을 알았다.
하여 병사들은 원월을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성문 검사를 더욱 빠르게 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소관 안으로 들여보내고자 했다.
“자 다음. 음. 용모파기와 다르군. 통행증은 있소? 알겠소. 통과.”
“이건 뭐요? 아, 부차루(夫差樓)에 납품할 비단이로군. 들어가시오.”
“말들을 이리로 데려오시오. 수레 속에 뭐 숨긴 것은 없겠지?”
병사들은 줄 선 사람들의 사정을 고려하여 검사를 빨리빨리 진행했다.
바로 그때.
한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가 소관의 문 앞에 섰다.
수레 위에는 건초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병사들이 물었다.
“이 수레는 뭐요?”
“소 여물입니다. 보시는대로 건초 뿐입죠.”
“그렇소?”
병사는 마부의 통행증을 확인하고는 수배서의 용모파기와 대조했다.
수배서에 나온 사망매화는 키가 크고 얼굴이 아주 잘생긴 사내였으나, 마부의 키는 작고 등은 굽었으며 입에는 곰보 자국이 가득했다.
“통과.”
병사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통과를 명령했다.
그때.
“잠깐만.”
뒤에서 병사를 제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화산파와 무당파의 무사들이었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저희가 한번 더 확인을 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리오.”
그들은 병사들에게 포권을 취해 보이고는 칼을 빼들었다.
쑤욱- 푸숙-
화산파와 무당파의 무인들이 칼로 건초 더미를 쑤셨다.
바로 그 순간.
“끄악!?”
건초 더미 속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순간, 경비병들이 창을 들고 수레를 포위했다.
“웬놈이냐!”
“건초 안에 숨어있는 놈이 있다!”
“포위해라! 절대 도망가지 못하게 막아!”
이윽고, 경비병들은 건초 더미 속에 숨어있는 두 명의 사내를 끄집어냈다.
“사, 살려주십시오!”
“다, 다 내놓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들은 보통 체격의 사내들이었고 각자 품에 금두꺼비 하나씩을 숨기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성문까지 내려왔던 경비대장 원월은 노한 표정을 지었다.
“패도회에 뇌물을 바치러 온 자들이구나. 떳떳하지 못한 일로 왔으니 이렇게 숨어서 들어오는 것이겠지. 아마 누굴 죽이려고 청탁하려 했던 모양이지?”
두 사내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이 없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질끈 감을 뿐이다.
원월은 보기 싫다는 듯 턱짓했다.
“감히 내가 지키고 있는 소관에 통행증도 없이 들어오려 했느냐? 끌고 가서 옥에 가둬라!”
두 사내는 경비병들에 의해 개처럼 끌려간다.
금두꺼비를 몰수당했음은 물론이었다.
화산파와 무당파의 무사들은 실망 반 안도 반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사망매화 놈이 정말 이쪽으로 올지 모르겠소.”
“솔직히. 놈은 무시무시한 악적이니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오. 다만, 만약에 만난다면 목숨을 걸고 그 악적을 해치우리다.”
그들은 칼을 허리에 찬 채 다시 사람들을 응시한다.
한 소년이 마지막으로 통과 심사대에 섰다.
경비병들은 소년의 통행증을 확인했다.
“이름은 동고공. 의원이시군. 방문 목적은······ 패도회에 정력제 납품이라?”
경비대장 원월이 직접 소년의 통행증을 확인했다.
소년의 얼굴과 머리칼에는 온통 흙먼지가 묻어있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키와 골격으로만 봐도 수배서의 사망매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원월은 소년의 짐을 한번 뒤져보았다.
지게 위에 실려있는 것이라고는 온통 약초들 뿐.
통행증을 소지했고, 짐에도 별 이상이 없는데다가, 용모파기 또한 수배서와는 다르니 통과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
“통과. 자, 이제 성문을 닫아라!”
원월은 소년 의원을 소관 안으로 들여보낸 뒤 경비병들을 향해 손짓했다.
쿠-구구구구구구······
문이 닫혔다.
이제 내일 첫닭이 울 무렵에나 다시 열리게 될 철옹성이었다.
* * *
“어디 있나······ 찾았다.”
추이는 성벽 안쪽을 따라 빙 돌던 끝에 찾던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묵죽(墨竹)이었다.
곤귀를 죽이고 빼앗은 이 곤은 길고 무거웠기에 어린아이가 들고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런 것을 소지하고 성문으로 들어가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었기에, 추이는 이 곤을 성벽 너머의 하늘로 냅다 집어던졌고 이렇게 문을 통과한 뒤 되찾은 것이다.
성벽을 넘어 날아온 곤은 근처의 땅에 움푹한 구덩이를 만든 채 단단히 박혀 있었다.
힘깨나 쓰는 장정 서너 명이 덤벼든다 해도 땅바닥에 단단히 박힌 이 곤을 빼기란 힘들 것이다.
하지만.
쑤욱-
추이는 너무나도 쉽게 이것을 뽑아들었다.
짊어지고 있던 약재들을 모조리 버린 추이는 곤을 어깨에 빗겨 맨 채로 초장현의 번화가로 향했다.
현의 번화가 동학로는 여러 장사꾼들로 왁자지껄했다.
짐승 잡는 자들이 널어놓은 곰 가죽, 사슴 가죽 따위가 줄지어 늘어져 있었고 고기를 사러 온 자, 비단을 끊으러 온 자, 술에 취한 자, 똥을 푸는 자, 분을 바르는 자, 묘기를 부리는 자, 마차를 모는 자, 그리고 공을 차며 노는 어린애들까지······ 실로 길이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도중, 추이는 길가에 서 있는 장정 하나를 마주했다.
장정은 이미 불콰하게 술이 올라 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거나 아무데나 대고 구토를 한다.
추이는 취객을 붙잡고 물었다.
“동학로에서 제일 비싼 기루가 어디지?”
“뭐야아? 이 섀애끼가- 으이? 대그빡에 인마, 아앙? 피도 안 말른 썌애끼가 벌써부터 까져서는······ 우욱! 씹······”
사내는 추이의 얼굴을 향해 토사물을 뿜어내면서도 연신 삿대질을 했다.
추이는 말없이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카락을 콱 움켜쥐고는 싸대기를 한 대 갈겼다.
짜-악!
턱이 바스러질 듯한 충격이 가해지자 사내의 눈동자에 약간이나마 초점이 되돌아왔다.
“동학로에서 제일 비싼 기루가 어디지?”
“좌측으로 쭉 가신 다음에 다시 우측으로 꺾으시면 세 갈래 길이 나오는데 중앙 대로로 직전하셔서 쭉 가시다 보면 오르막길이 나오고 거기서 빨간 간판이 있는 만두집을 끼고 첫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시다 보면 ‘부차루(夫差樓)’라는 기루가 나옵니다요.”
두 번 묻게 되지 않아 다행이다.
짜-악!
추이는 사내의 뺨을 한번 더 때렸다.
“길에다가 토해놓지 마라.”
기절한 사내를 뒤로하고, 추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들은 대로 길을 따라가자 눈앞에 커다란 건물이 보인다.
열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 높은 대각(臺閣)의 정문에는 ‘부차루(夫差樓)’라고 적혀있는 현판이 보였다.
추이는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술. 고기. 여자. 다 내와.”
그러자 입구 쪽에 있던 점소이 하나가 황당하다는 듯 이쪽을 바라본다.
추이의 남루한 옷차림을 확인한 점소이는 한숨과 함께 주먹을 꺾었다.
“별 미친 거지새끼 하나가 나의 고아한 삶에 어지러운 방점을 찍으려 드누나. 아이야. 지금이라도 문에 난 발자국 닦고 얌전히 돌아간다면 내 너를 녹신녹신하게 두들겨 패려던 계획을 지금이라도 다시 재고해 보겠노라.”
점소이는 한껏 우아한 어조로 추이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우둑!
추이는 눈앞에서 팔랑거리던 점소이의 손을 붙잡고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으아악!?”
점소이가 부러질 것 같은 손가락을 다른 손으로 감싸며 비명을 지르자 추이는 짤막하게 한마디 했다.
“손님이 주문을 했으면 냉큼 술상이나 봐올 일이지. 말이 많아.”
좋은 기루에서 일하는 점소이들은 가끔 자신이 손님들보다 우위에 있는 듯 굴고는 한다.
괜히 문자 한번 써보려다가 임자를 만난 점소이는 잔뜩 주눅이 든 채 추이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이윽고. 넓은 방으로 안내받은 추이는 대뜸 술상 앞에 앉았다.
기녀 한 명이 추이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오라버니. 돈은 있어?”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 기녀를 향해, 추이는 얼굴을 가린 앞머리를 뒤로 한번 쓸어넘겨 보였다.
기녀가 말했다.
“오라버니는 돈 없어도 되겠다.”
추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기녀는 추이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옆에 딱 달라붙어서 곰살맞게 웃기 시작했다.
“괜찮아.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건데 뭐. 나중에 돈 생겼을 때 또 놀러오면 되지. 오늘은 그냥 놀다 가. 술은 내가 살게.”
“?”
이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반응인지라 추이는 약간 당황했다.
그때.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얼굴의 사내 네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네가 아까 황눌(皇訥)을 때린 놈이냐?”
아까 길을 알려줬던 취객 아니면 처음 만났던 점소이의 이름이 황눌인가 보다.
추이가 술잔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맞고 싶으면 나가라.”
“뭐? 맞기 싫으면 나가라겠지. 멍청한 놈이 말도 제대로 못 하는구나.”
“죽고 싶으면 들어오고.”
“······.”
추이의 말을 들은 네 사내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는다.
기녀는 방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얼른 밖으로 도망쳤다.
추이가 천천히 일어나자 사내들이 우르르 덤벼들었다.
퍼억- 깽창!
추이는 술병을 집어들고 맨 앞에 있는 사내의 머리통을 깨 놓았다.
이후 깨진 병목으로 옆 사내의 옆구리를 찔러 쓰러트렸고 그 뒤에 있는 사내는 사타구니를 발로 걷어찼다.
그야말로 시정 잡배들의 싸움 그 자체였다.
“이, 이 비겁한······”
남은 한 명이 덜덜 떨고 있다가 도망치려 했지만.
···퍽!
추이가 던진 젓가락이 허벅지에 박히자 그 자리에서 뒹굴며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바로 그때.
“어이.”
계단 위쪽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흑의를 입은 사내 하나가 계단 위에서 추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좀 조용히 놀아라, 아이들아.”
얼굴에 난 칼자국과 허리춤에 걸린 장도(長刀).
칼자국 사내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자 방금 전까지 추이와 싸우던 네 사내는 해쓱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싫다.”
추이는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칼자국 사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싫다고 했다. 나는 시끄럽게 놀 것이다.”
“······.”
칼자국 사내는 잠시간 멍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만에 걸려보는 시비냐 이게. 즐겁기는 한데······ 오늘은 임무가 있어서 어쩔 수가 없구나.”
그는 추이를 향해 고개를 들고는 말을 이었다.
“안쪽에 계신 도련님께서 소란을 싫어하신다. 그러니까 싫어도 조용히 해라.”
“그 도련님한테 전해라. 시끄러우면 네가 다른 데 가서 놀라고.”
“······.”
추이의 말을 들은 칼자국 사내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는 자신의 흑의를 가리켰다.
가슴팍에 쓰려있는 패(佩) 라는 글자가 시뻘건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 위에는 패도회의 도 공자님께서 계신다. 죽고 싶으면 어디 계속 떠들어 봐라.”
칼자국 사내의 말에 추이는 손으로 턱을 한번 쓸었다.
패도회(佩刀會).
여러모로 꽤 낯익은 이름이다.
언젠가 죽였던 장강수로채의 수적이 이렇게 말했었다.
‘패도회에서 너희들에게 말 좀 전해달라더라. 지금까지 상납금 바치느라 수고 많았고, 이제 어디로 팔려가든 간에 거기가 고향이다~ 생각하면서 정붙이고 살아 보라고.’
그 말을 들은 파등선의 여인들이 보였던 반응도 기억난다.
‘그, 그럴 수가······ 이젠 빚도 거의 다 갚았는데······’
‘무슨 소리예요 이게? 저, 저한테는 올해까지만 일하면 집에 갈 수 있다고······’
‘팔다뇨? 우, 우리를요? 우리를 당신들에게 팔았다구요?’
‘어, 엄마······ 엄마 보러가야 되는데 나······’
파시(波市)에서의 기억을 떠올린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사망매화를 성문 안으로 통과시키는 것이 더 빨라질 수도 있겠다.
추이는 계단 위에 있는 칼자국 사내를 향해 말했다.
“조용히 하겠다.”
“흥. 이제야 주제파악을 했느······”
그 순간.
추이의 품에서 두 자루의 송곳이 튀어나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계단을 뛰어 올라간 추이는 두 자루의 송곳을 칼자국 사내의 양쪽 귀 깊숙이 박아넣었다.
“······! ······! ······!”
칼자국 사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조차 모른 채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송곳이 양쪽 고막에 쑤셔박힌 것도 모자라 두개골을 뚫고 그 안의 뇌까지 찔러놓았으니 당연하다.
“이제 조용해졌지?”
추이는 ‘도련님’께서 놀고 계신다는 상층으로 올라가며 말을 이었다.
“곧 더 조용해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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