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월담 (1)
40-
날이 여러 번 저물었다.
높은 성벽을 눈앞에 둔 추이와 사망매화는 근처 언덕에 있는 숲에 몸을 숨겼다.
호북성의 최외곽, 초장현의 성벽.
이곳만 빠져나가면 사천성과 감숙성의 사이로 통하는 비밀스러운 길이 있다.
청해를 건너 마교가 있는 신강으로 직통하는 잔도(棧道)였다.
추이는 일전에 한번 그곳을 건너 본 적이 있어서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단장애(斷腸崖).
건너가는 이의 창자를 끊어놓을 정도로 높고 위태로운 절벽.
그곳에 선반처럼 달려있는 아슬아슬한 외줄다리가 바로 잔도다.
그곳만 지나갈 수 있다면 마교의 총본산까지 가는 길의 절반을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곳 호북을 지나야 하는데······ 문제는 호북성에 무당파가 있다는 것이지.”
사망매화는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당파는 화산파와 긴밀하다.
같은 도가 계열의 문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화산파의 무인들과 무당파의 무인들이 함께 지키고 있는 소관(昭關)은 그 어느 때보다도 경비가 삼엄했다.
저 멀리서 경비대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행인을 면밀하게 조사하되, 특히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는 자들을 엄하게 검문하도록 하라!”
경비병들의 뒤로 화산과 무당의 칼을 찬 무사들이 보인다.
사망매화를 잡기 위해 민관(民官)이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구, 요즘 성문 경비가 왜 이렇게 삼엄해졌대?”
“무림공적 하나가 이쪽으로 올지도 모른다고 하데?”
“그 뭐시기, 사망매화인지 지랄매화인지 하는 놈 때문이라잖여.”
“아이구. 나는 급한데. 이거 성문 앞에서 사나흘은 기다려야 쓰겠구먼······”
성문 앞에는 수많은 행인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검문을 받고 있었다.
경비병들과 무림맹의 무사들은 통행객들이 지금껏 거쳐 온 성에서 발급받은 간이 통행증을 검사했고, 또 수배서에 그려져 있는 사망매화의 용모파기와 일일이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성벽은 높고, 감시는 삼엄하여 날아가는 새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곳을 그냥 통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휘잉-
바람에 수배서 한 장이 날아왔다.
사망매화는 수배서를 잡고는 자신의 얼굴에 대 보았다.
“비슷한가?”
“그림이 낫군.”
“실물이 낫겠지. 보게. 내가 어찌 이렇게 막 생겼겠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사망매화는 추이에게 농담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회복되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추이를 떠보았다.
“그나저나, 마교에서는 나를 어지간히도 환영하는 모양이야. 자네 같은 인물을 마중 보내다니.”
“······.”
“근데 왜 자네 하나만 보냈나? 수행원들은 다 어디에 있지? 남궁세가에게 잃었나?”
사망매화는 아무래도 추이를 마교에서 파견 나온 정보원 정도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왜 목숨 걸고 자신을 도와 마교로 가려 하겠는가, 뭐 이런 논리였다.
추이는 사망매화의 착각을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다만 짧게 경고했을 뿐이다.
“조만간 이곳으로도 추격대가 올 것이다.”
“그렇겠지. 추격대의 대장은 비무극, 그 녀석이겠고.”
“아는 자인가?”
“알지. 동기동창이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화산파에 들어왔고, 나보다는 조금 늦게 매화검수가 되었지.”
“어떤 인물이지?”
“성품이 강직하고 유능하기는 하나 사람이 모질고 편협한 면이 있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기에 몇 번 마찰이 있었던 적이 있다”
“강한가?”
“원래 나보다는 약했다. 다만 이제 내가 외팔이가 되었으니······”
사망매화는 잠시 고민한 끝에 대답을 내놓았다.
“지금은 붙어봐야 알겠군.”
“······.”
추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매화는 약간 기대하는 기색으로 추이를 떠보았다.
“그래. 저 성벽을 피해 갈 묘수가 있나?”
“왜 피해가나?”
“?”
추이의 반문에 사망매화의 표정이 어리둥절해진다.
무림맹의 천라지망이 시시각각 조여오고 있는 마당이다.
그런 마당에 저런 견고한 성벽을 눈앞에 두고 왜 피해가냐니?
그럼 넘어가기라도 하겠다는 말인가?
하지만 추이는 태연했다.
“저 성벽을 뚫고 간다.”
“??”
“그리고 성벽을 뚫자마자 무림맹의 추격대를 역으로 칠 것이고.”
“???”
사망매화의 표정이 점점 멍하게 바뀐다.
추이는 거기에 대고 쐐기를 박았다.
“놈들은 몰살당할 것이다.”
성벽 돌파.
추격대 되치기.
그리고 몰살(沒殺).
셋 중 어느 것 하나 현실성 있는 것이 없다.
사망매화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다 망상처럼 들렸다.
그는 논리적으로 말했다.
“첫째, 우리는 저 성벽의 삼엄한 경계를 돌파할 수단이 없고. 둘째, 추격대를 역으로 습격하려면······ 아니. 됐고. 이게 무슨 미친 소리인지 모르겠군.”
사망매화는 한숨을 쉬었다.
“자네는 천라지망이 무엇인지 조금도 모르는가 보이.”
“안다. 정도십오주에서 차출된 최정예들이 칼 들고 개떼같이 쫓아오는 것.”
“그걸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가?”
추이의 태연함이 영 못 미더운 사망매화다.
그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일단 철벽으로 소문난 초장현의 소관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다는 건지, 그것부터가 모를 일일세.”
“쉽지.”
“······쉽다고?”
추이의 말에 사망매화는 한번 더 멍한 표정을 짓는다.
그의 말에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나절 안에 너를 저 성벽 안으로 들여보내 주마.”
말을 마친 추이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성문 앞으로 향했다.
사망매화는 너무 황당해서 추이를 잡지도 못했다.
“······.”
그저 멍하니 서 있을 뿐.
* * *
성문 앞에 길게 늘어진 줄.
농사꾼, 나무꾼, 사냥꾼, 거간꾼, 술장수, 마부, 보부상, 어염집 아낙네들······ 이 외에도 수많은 인간군상들이 일렬로 길게 서서 관문 통과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밀지 마요!”
“좀 앞으로 갑시다, 거!”
“앞에 새치기 누구야! 양심도 없어!?”
“자, 구운 밤 팔아요. 기다리시면서 까 드시면 좋습니다~”
줄은 너무나도 길어서 성문 한 바퀴를 빙 둘러 감을 정도였다.
아마 줄 꼬래비에 선 사람은 일주일은 꼬박 모래먼지를 먹으며 성문 밖에서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때.
콧노래를 부르며 줄의 앞쪽으로 걸어가는 청년 하나가 있었다.
그는 껄렁한 발걸음으로 얼마간 걷더니 별안간 줄 앞쪽으로 슬쩍 새치기를 했다.
“비켜, 비켜라!”
청년은 짊어지고 있던 지게를 크게 흔들고는 지팡이를 뻗었다.
그 때문에 줄 서 있던 아이가 지팡이에 맞아 넘어졌지만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줄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을 쳤다.
“거기 새치기하는 놈 뭐야!”
“애를 지팡이로 치면 어떻게 해!”
“뭐, 저런 양심없는 놈이 다 있담?”
“어이, 좋은 말로 할 때 나와. 끌어내기 전에.”
아이의 부모를 비롯, 몇 명의 보부상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청년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청년은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통행증을 꺼내들었다.
<통행증>
성명: 동고공(東皐公)
직업: 의원
입성 목적: 패도회가 주문한 약재 납품
-印-
그의 이름은 동고공. 직업은 의원이었다.
하지만 그의 멱살을 잡으려던 사람들이 주춤한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다.
패도회(佩刀會).
그것은 호북성을 대표하는 사도 문파이다.
“······.”
“······.”
“······.”
동고공 의원을 향해 눈을 부라리던 이들이 모두 시선을 내리깔았다.
좌중들이 조용해진 것을 즐기며, 동고공이 말했다.
“어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패도회의 도 공자에게 약재를 구해다 주기 위해 먼 길을 다녀온 사람이외다. 이 약재들로 말할 것 같으면 하나하나가 천금과도 같은 정력제들이지.”
“······.”
“그대들 같은 천한 무지렁이들 탓에 내가 약재를 늦게 배달하게 되면, 응? 그러다가 도 공자가 풍류를 즐기시는 데 차질이라도 생기면? 으응? 뒷감당할 자신 있나들?”
패도회의 도 공자라 하면 이 일대에서 유명한 호색한이다.
다른 걸 몰라도 정력에 관련된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는 그의 성미를 다들 아는지라, 더더욱 동고공 의원의 눈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동고공은 우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끌끌끌-”
옆에서 웬 거지 소년 하나가 혀를 찼다.
“의원이 제 죽을 팔자는 모르고 남 사타구니나 챙기고 있군.”
“······?”
동고공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거지 소년이 대뜸 말했다.
“오면서 뱀 밟아 죽였지?”
“뭐?”
동고공은 별 미친놈을 다 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몰라. 그런 적 없다.”
“죽였어. 틀림없이. 왼발로 밟아 죽였구만.”
거지 소년의 말에 동고공은 슬쩍 자신의 왼발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짚신에 뭔가가 희미하게 묻어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밤에 길을 걷다가 새끼 뱀이라도 밟았는지, 약간의 핏자국이 비치고 있었다.
‘설마 이 옅은 흔적을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닐 거고. 뭐지?’
동고공이 고개를 들자, 거지 소년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깨가 무겁지?”
“그야 당연하지. 약초 지게를 짊어지고 있으니까.”
“그거 말고. 뱀의 원귀가 붙었어. 그게 지금 당신 어깨를 누르고 있군.”
거지 소년의 말에 동고공은 코웃음을 쳤다.
바로 그 순간.
묵직-
짊어지고 있던 약초 지게의 무게가 별안간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
동고공은 깜짝 놀라 지게를 땅바닥에 황급히 내려놓았다.
하지만.
“이제 곧 등골이 시려울 거야. 뱀의 원귀가 당신의 몸을 타 내려가고 있거든.”
거지 소년의 말대로 곧 어깨 아래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동고공이 당황하고 있는 동안 거지 소년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다음은 왼발이네. 만악이 시작된 것이 왼발이니 조만간 썩어들어가겠구만.”
동시에 동고공의 왼발이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다리를 꽉 옥죄여 오는 느낌.
동시에 발가락 끝이 뱀의 이빨에 찔린 것마냥 따끔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때쯤 해서, 동고공은 귓가를 스쳐가는 웃음소리를 들었다.
히히히히히히히-
동고공은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정말로 뱀의 원귀가 자신의 몸을 옥죄인 채 저주를 걸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고, 관상가 양반. 나 좀 살려주게.”
동고공은 거지 소년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그는 본디 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심성이 굳세지 못하고, 토속신앙이나 각종 미신을 잘 믿는 편이었기에 이런 분위기에 몹시 약하다.
하지만 거지 소년은 계속해서 혀를 찰 뿐이었다.
“이미 늦었어. 원귀의 증오심이 하늘에 닿았으니 필시 천벌이 내릴 게야.”
“나, 나는 정말 몰랐어! 뱀을 밟은 줄도 몰랐는데 어찌!”
“딱하지만 어쩔 수 없게 됐군. 가족이라도 구하는 수밖에.”
“가, 가족? 가족들에게도 화가 미치나?”
“집이 이곳 초장현인가?”
“어어······ 그렇기는 한데.”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가족들에게 화가 옮아. 멀리 떠나는 편이 나을 거다.”
"아이고!"
그러자 동고공은 거지 소년의 발치를 잡고 매달렸다.
“관상가 양반, 아니 선생님! 제발 저 좀 살려주십시오. 제가 어찌하면 살 수 있겠습니까? 예에?”
“가족들이라도 살리는 수밖에 없어. 절대 집에 가지 마.”
“집에 안 가겠습니다! 그리고 제 살 길도 좀 열어주십시오. 으허엉-”
동고공은 필사적으로 거지 소년을 붙잡고 매달렸다.
거지 소년은 한참 동안이나 튕기던 끝에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터 천기를 누설할 테니 귀 씻고 잘 들어라.”
“예에- 그럼요.”
“가진 것 다 버리고 여기를 떠나.”
“예에?”
동고공이 놀라자 거지 소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약초도, 지게도, 옷가지도, 다 벗어놓은 채 여기를 떠나. 그리고 최소 석 달 이상 산에서 내려오지 마라. 인간 세상 홍진의 먼지를 다 털어놓아야만 냄새가 빠져. 그러면 뱀의 원귀도 너를 놓칠 것이다.”
“그, 그렇습니까?”
“못 믿겠으면 말고. 나는 갈 테니.”
“아휴! 아휴! 제가 언제 못 믿겠다고 했습니까! 당장 그렇게 하겠습니다!”
동고공은 겉옷을 벗었다.
그리고 약초들이 든 짐들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지 소년은 동고공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사람 냄새가 묻은 증서 같은 게 있다면 얼른 버려.”
“저······ 이 통행증도 버려야 할까요?”
“농담하나? 그런 걸 제일 먼저 버려야지. 뱀 원귀에게 쫓기고 싶어?”
거지 소년의 말을 들은 동고공은 화들짝 놀라 통행증을 바닥에 팽개쳐 버렸다.
그는 한껏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한데 뱀 원귀로부터 달아난다고 해도 그 뒤가 걱정입니다. 저는 패도회에 약재들을 갖다주어야 하는데, 이대로 잠적하게 되면 무슨 꾸지람을 들을지.”
“그 부분은 걱정 마라. 내가 잘 말해주지.”
“예? 관상가 선생님께서요?”
“나도 패도회의 초청을 받고 가는 길이다. 패도회주 모친의 관상을 봐 줘야 하거든. 그때 너의 사정에 대해서도 설명해 줄 테니 안심하고 가.”
“오오오! 감사합니다!”
동고공은 감탄했다.
패도회주가 자기 모친의 관상을 봐 달라고 부를 정도의 사람이라면 분명 신통방통할 것이다.
그렇게 신통방통한 점쟁이라면 패도회에서도 충분히 예우를 갖출 것이라 생각한 그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약초와 지게, 옷, 통행증을 모두 바닥에 내버린 채로.
* * *
추이는 동고공 의원이 버린 것들을 모두 수거했다.
겉옷, 약초 지게, 이전 현의 경비대장이 직인을 찍어놓은 통행증까지도.
츠츠츠츠츠츠······
추이는 동고공에게 씌워놓았던 창귀들도 모두 회수했다.
이올의 경지가 깊어지면 이런 사소한 장난질도 할 수 있다.
중병에 빠지게 할 수는 없지만 몸 상태를 고뿔에 걸린 듯 나쁘게 만들거나, 환각 또는 환청을 겪게 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조양자나 남궁팽생도 이 수에 걸려 죽었지.’
무공을 익힌 절정고수도 걸려드는 수인데 동고공 같은 일반인 하나 홀리는 것쯤이야 손바닥 뒤집기다.
이윽고, 추이는 동고공 의원의 짐과 통행증을 챙겨 성문으로 향했다.
사망매화는 본디 키가 크고 체격이 헌양하여 위장이 쉽지 않으나 추이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다르다.
그리고 또한, 무림공적이 처음인 사망매화와 달리 추이는 이런 쪽으로는 경험이 아주 많다.
굴러먹을 대로 굴러먹은 노강호(老强豪)가 철벽으로 이름을 날리는 소관문(昭關門)을 향해 걸어간다.
추이는 패도회에게 납품하기로 한 약재 꾸러미를 고쳐매며 생각했다.
‘먼저 작은 소란을 일으켜 볼까?’
물론 작고 큼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기준일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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