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사망매화(死亡梅花) (4)
39-
“······.”
추이는 옛날 일을 떠올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오자운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뒤척인다.
타닥- 타닥-
모닥불이 꺼져간다.
추이는 마른 장작을 손으로 쪼개어 그것을 불길 속으로 던져넣었다.
주변이 조금 더 후끈해졌고, 그제야 오자운의 표정이 조금은 풀어졌다.
추이는 궁금했다.
본디 촉망받던 화산의 후기지수.
화산파 역사상 최연소 매화검수로 뽑힐 정도로 뛰어났던 기재가 어찌 하루 아침에 무림공적이 되었다는 말인가?
지난 생의 추이가 본 바에 의하면 오자운은 사매를 간살하고 달아나 마교에 투신할 만한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그때.
“······.”
추이의 의문을 풀어줄 당사자가 눈을 떴다.
사망매화 오자운이 정신을 차린 것이다.
* * *
“요리 솜씨가 형편없군.”
오자운은 죽통에 든 고깃국을 훌훌 들이마시며 말했다.
멀건 국물 속에는 꿩의 살점과 내장 조각들이 둥둥 떠다닌다.
추이 역시도 국물을 쭉 들이켰다.
소금 하나 없이 그냥 끓인 것이라 비리고 잡내가 심했지만 그런 것을 가릴 처지는 아니다.
“무슨 이유로 쫓기고 있나?”
추이가 묻자 오자운은 미간을 옅게 찡그렸다.
“이미 알고 있잖나. 내가 사매를 겁간하고 죽였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
추이의 단호한 대답에 오자운이 한쪽 눈썹을 까닥 들어올렸다.
이윽고, 그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수십 년을 함께했던 이들도 나를 천인공노할 색마라고 하는데, 오늘 처음 본 생면부지의 타인이 나를 믿어주니 무어라 할 말이 없군.”
“······.”
추이는 잠자코 꿩의 내장을 씹는다.
얼마간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오자운의 눈이 벌건 화광에 젖었다.
“한 청년이 있었지.”
오자운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 생의 추이조차 듣지 못했던, 이 시대의 그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힘도 세고, 외모도 훤칠했고, 의협심도 아주 강한 청년이었어. 조부께서 화산파의 속가제자셨으니 집안도 제법 유복했고.”
“······.”
추이는 잠자코 모닥불을 뒤적였다.
딱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오자운은 말을 계속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청년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천하를 유랑하던 중 한 비무대회에 나가게 되었어. 지방의 작은 문파에서 개최하는 것이었는데, 우승한 자에게는 문주의 딸과 결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더군.”
무술대회에서 우승할 시 주최자의 딸과 결혼하는 풍습은 흔하다.
주로 큰 싸움을 앞둔 문파가 이런 식으로 고수들을 모집하고는 하는데, 설마 사위가 되어서 장인의 가문이 처한 위기를 모른 체 할 수 있겠냐는 명분으로 전쟁에 동원하는 것이다.
“청년은 호기롭게 비무대회에 나가서 우승했지. 그리고 그 문파의 금지옥엽을 신부로 맞이했어. 절세가인이었지.”
강아. 그것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오자운은 옛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아름다운 신부를 얻었으니 응당 장인의 어려움을 돕는 게 당연했어. 청년은 칼 한 자루를 들고 장인의 문파를 노리는 적들을 모두 물리쳤네. 전부 사마외도의 사악한 악적들이었지.”
“······.”
“청년의 명성은 그 일대를 진동시켰어. 젊고, 풍채 헌앙하고, 잘생겼으며, 무공까지 고강한데다가 집안마저 유복하니 ‘옥룡공자(玉龍公子)’라는 쑥쓰러운 별호도 붙고······ 뭐 그랬지.”
추이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옛날의 오자운에게 그런 과거가 있었다니,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오자운은 말을 계속했다.
“청년의 명성이 나날로 커지자 위에서도 관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바로 화산파였어. 마침 조부께서도 화산과 인연이 있었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 청년은 화산의 부름을 받아 도사가 되었고, 어느새 매화 꽃잎이 새겨진 칼을 하사받게 되었다네.”
그 뒤의 일이라면 추이도 알고 있었다.
오자운은 화산파에 몸담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마어마한 천재성을 뽐내며 화산의 역사에 새겨져 있던 모든 최연소 기록들을 갈아치워 버린다.
“모든 것이 완벽했어. 꿈 같은 나날이었지. 청년은 사형제들에게 존경받고 스승들에게 귀여움받으며, 그렇게 화산파의 매화검수가 되었어. 물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내 역시도 이를 축복해 주었고.”
그러나, 여기서부터 오자운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런 청년에게는 친한 사매 한 명이 있었어. ‘월맹영(越孟嬴)’이라는 여자였지. 그녀 역시도 외모가 아름답고 재능이 비범하여 청년과 함께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았어. 호사가들은 청년과 그녀를 함께 칭하여 화산의 오월춘추(吳越春秋)라고 부르기도 했지.”
“······.”
추이는 잠자코 듣는다.
오자운은 추이를 향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폐장 속에서 썩어가던 한을 토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 날, 청년은 사매를 불러 물었어. 여인들은 어떤 선물을 좋아하느냐고.”
“······.”
“청년은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사고 싶었던 게지. 다른 뜻은 없었어. 조금도.”
“······.”
“하지만 사매의 생각은 조금 달랐던 모양이야. 그녀는 청년이 자신을 향한 연정을 에둘러 고백한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가지고 싶었던 비녀 하나를 조심스레 이야기했어.”
여자와 그리 인연이 없었던 추이는 오자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일단은 그냥저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자운이 말을 이었다.
“청년은 비녀를 샀어. 하지만 그 비녀는 당연하게도 아내의 것이었지.”
“······.”
“그날부로 사매는 청년과 말을 섞지 않았어. 합동 훈련도 거부하고 겸상도 피하고.”
“······.”
“청년은 그런 사매의 변화가 의아하기만 했어. 그래서 어느 날, 매화꽃이 흐드러지는 산봉우리 위에서 물었지. 대체 왜 자신을 피하는 것이냐고.”
그 뒤의 일은 한낱 추이라 할지라도 예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사매는 청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어. 오래 전, 화산파에서 청년을 처음 만났던 그 순간부터 쭉 사모해 왔다고. 이후 힘든 훈련이나 외부 활동들을 함께하며 그 마음이 나날로 깊어져만 갔다고. 이제는 첩이든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자신을 돌아봐 달라고. 단지 그거면 만족한다고.”
“······.”
“하지만 이번에는 청년의 태도가 바뀌었지.”
오자운의 목소리를 따라 모닥불이 이글거린다.
검은 연기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뒤로 청년은 사매를 향해 조금의 눈길도 주지 않았네. 사매가 그랬던 것보다도 훨씬 더 냉정하고 철저하게 그녀를 멀리했지. 심지어 장문인을 찾아가 하산하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그 결심이 보통 단단했던 것이 아니었어.”
과거를 회상하는 오자운의 표정은 침통했다.
“어느 밤이었네. 달도 뜨지 않은 아주 깊고 어두운 밤. 청년은 연무장에서 칼을 휘두르며 정든 장소와 이별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 그런데 누군가가 청년을 찾아온 거야. 짐작하겠지만, 사매였어. 그리고 이내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네.”
“······.”
“그 고고하고 도도하던 사매가 청년의 발밑에 엎드려 읍소를 한 거야. 제발 화산을 떠나지 말라고, 자신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자기는 이제 먼 발치에서 청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 제발 부탁이라고, 청년이 이대로 영영 사라져 버리게 되면 자신은 상사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버릴 것 같다고······”
“······.”
“하지만 청년은 매몰차게 그 자리를 벗어났지. 너무 놀라서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게 컸어. 하지만 청년은 생각했네. 하루빨리 자리를 뜨는 것이 아내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 동시에 사매를 위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은 채로.”
오자운은 잠시 말을 끊었다.
그리고 막혀있는 목을 피 섞인 기침으로 뚫어낸 뒤 말을 이었다.
“그때쯤이었다네.”
“······?”
“아내가 독살당한 것이.”
“······!”
청년의 아내 강아가 별안간 죽었다.
누가 봐도 뚜렷한 독살흔(毒殺痕)이 입가와 목에 남아있었다.
“청년은 삼년상을 치르면서도 아내를 죽인 원수를 찾고자 했네. 어떤 날에는 복수를 위해 밤낮없이 돌아다니다가, 또 어떤 날에는 그녀의 무덤 앞에 세워놓은 초막에서 비바람을 피했지.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
“청년이 누운 초막에 누군가가 찾아왔다네. 맹영 사매였어.”
“······.”
“그녀는 울며 말했지. 죽은 사람은 이제 그만 잊으라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움푹 꺼진 청년의 볼을 어루만지며 통곡을 했어.”
아마 그때 청년의 모습은 지금 추이가 보고 있는 몰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옥룡공자라는 별호가 붙을 정도의 미남자가 이렇게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남자인 추이조차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인데, 그를 절절히 사모하던 여인들은 어떠했을까?
오자운은 말했다.
“하지만 청년은 여전히 단호했지. 삼년상을 치르면서 곡기만 끊은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인연들을 끊어낼 각오를 한 상태였으니까. 그만큼 청년은 아내를 사랑했었네.”
“······.”
“청년은 사매가 쓰러져 우는 초막을 박차고 나가 산 아래에서 밤이슬을 맞았지.”
모닥불이 사그라든다.
추이가 가만히 있자 이번에는 오자운이 불 속으로 장작을 던져넣었다.
“다음 날. 청년은 화산파의 도사들에게 체포되어 화산으로 압송되었어.”
“갑자기?”
“그래. 갑자기.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오자운의 말에 추이는 인상을 썼다.
이윽고, 오자운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화산파로 끌려온 청년은 그제야 알게 되었지. 지난밤, 자신의 초막에 찾아왔던 맹영 사매가 누군가에게 겁간당한 뒤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말이야.”
그날 맹영은 죽었다.
바로 오자운의 초막에서.
그 뒤로는 추이도 익히 상황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자운은 자신의 왼팔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청년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이든지 했어. 아주 사소한 잘못부터 시작하여 한 점의 부끄러움까지 모조리 토설했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의 왼팔을 스스로 끊어내는 짓까지 했지. 하지만 누명은 풀리지 않았어. 그렇게 나는 사매를 간살한 악적이 되었지.”
청년은 어느덧 오자운이 되었다.
오자운은 어느덧 복수귀가 되었고.
그는 핏발 선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죽은 맹영 사매의 가슴팍에는 매화꽃 모양의 검흔이 남아있었다고 들었네. 범인은 나와 같은 매화검수야.”
“······.”
추이는 턱을 쓸었다.
이건 앞으로 조금 더 생각해봄직한 문제였다.
오자운 역시도 그것을 알기에 그저 심증만을 토로할 뿐이다.
“이후 나는 고달픈 신세가 되었어. 맨 처음에는 사도련을 찾아가 의탁해 볼까도 고민했었지. 하지만 사도련 놈들은 오히려 나를 무림맹에 팔아넘기려 들었어. 정도든 사도든 다 똑같은 놈들이야. 평소에는 앙숙인 척 굴면서 뒤로는 언제 그랬냐는 듯 형님- 아우님- 하면서 붙어먹지. 관료들도 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마도가 낫다고 판단한 건가?”
“그렇지. 어차피 마교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쓴 판국인데, 그것을 사실로 만들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그래서 오자운은 지금 마교가 있는 신강의 천산산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추이는 오자운의 말을 모두 들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기 전부터 생각했던 바를 입 밖으로 꺼냈다.
“네가 마교의 총본산까지 갈 수 있게 길을 터 주겠다.”
“뭐? 그대가 왜?”
오자운. 아니, 어느새 사망매화로 돌변한 그가 날카로운 경계심을 드러낸다.
하지만 추이는 사망매화의 기분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전생의 그가 자신에게 그랬듯.
“따라오지 못하겠다면 거기서부터는 그냥 네 갈 길로 가거라.”
그저 건조하고 무뚝뚝하게 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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