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사망매화(死亡梅花) (2)
37-
강변에 작은 배 십수척이 정박했다.
일흔 명이나 되는 수적들이 창칼로 무장한 채 살기어린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들은 공손합이 죽기 직전 쏘아보낸 신호탄을 보고 온 자들이었다.
“분명히 적색 신호탄이었지?”
“그래. 일렬로 쭉 밀고 가면서 눈에 띄는 건 모조리 죽이라는 뜻이다.”
“산 놈들이고 죽은 놈들이고 모두 죽이고 또 죽여라.”
수적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억새밭을 장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두 남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대화는 잔잔하게 이어진다.
“우리 아버지와는 무슨 관계인가?”
“무관계.”
“그런데 어떻게 알고 여기를 찾아왔지?”
“우연히.”
“죽엽청과 아귀포는 우리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던 것들인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딱히 믿으라고 한 말은 아니고.”
주변 상황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
실로 방약무인(傍若無人) 그 자체라 할만한 상황이었다.
수적들이 칼을 빼들고 묘를 향해 달려왔다.
“이 겁대가리 없는 새끼들! 쳐 죽여주마!”
한 수적이 참마도를 휘두르며 덤벼든다.
키가 칠 척을 넘어 무려 팔 척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하지만.
···사뿍!
외팔 남자, 사망매화가 칼을 뽑아 휘둘렀다.
허공에 그어진 붉은 실선이 다섯 장의 꽃잎을 그려낸다.
사람의 목이 절반쯤 떨어져 나가며, 힘차게 뿜어져 나온 피가 붉은 매화처럼 꽃피었다.
동시에 추이 역시도 곤을 들었다.
빠-각!
허공으로 뛰어올라 창을 내리찍으려던 수적의 머리통이 그대로 박살나 산산조각으로 흩어졌다.
쿵- 쿵-
목 베인 시체와 머리가 터져나간 시체가 동시에 땅에 거꾸러졌다.
수적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뭐, 뭐야 이 새끼들?”
“제기랄! 다 죽여! 쪽수로 밀어붙여라!”
“어차피 붉은 폭죽이 터진 이상 후퇴란 없다!”
“후퇴했다간 공손 백두한테 잡혀 죽는다구!”
칠십 개가 넘는 창칼이 추이와 사망매화를 덮쳤다.
그러나 두 남자의 대화는 여전히 잔잔하여 물이 흐르는 듯, 조금도 끊기지 않는다.
“자네는 어디 가는 길이었나?”
사망매화가 내리긋는 칼끝에서 두 송이째의 혈매화(血梅花)가 피었다.
어김없이 수적 하나의 목이 꽃의 거름이 되었다.
추이는 곤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하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적 하나의 머리통이 박 터져나가듯 깨졌다.
사망매화가 세 송이째의 매화를 그려내며 말했다.
“화산파 근처로군. 거긴 왜 가나?”
도끼를 휘두르던 수적의 양팔이 잘려나가며 발생한 피 안개에 허공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추이는 품에서 망치를 꺼내들며 대답했다.
“복수하러.”
활을 쏘려던 수적의 입안에 추이가 던진 망치가 꽂혔다.
이빨은 물론 위턱과 아래턱의 뼈가 모조리 가루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망매화가 네 송이째의 매화를 흩뿌렸다.
“누구의 복수지?”
비수를 던지러던 수적의 전신이 두 조각으로 깨끗하게 갈라졌다.
추이는 진흙뻘 위에 마름쇠를 뿌렸다.
“스승뻘 되는 사람.”
달려오던 수적들이 마름쇠를 밟고 발바닥부터 발등까지 관통당한다.
사망매화의 칼끝이 다섯 송이째의 매화를 그려냈다.
“스승이면 스승이지, 스승뻘 되는 사람은 뭔가?”
허리가 잘려나간 수적의 상반신 아래로 내장들이 쏟아져 내렸다.
추이는 곤을 들어 정면에 있는 수적 하나의 배를 관통해 버렸다.
“세상에는 딱 잘라 정의할 수 없는 관계도 있는 법.”
추이의 곤에 맞은 수적의 배에 구멍이 뻥 뚫려버렸다.
사망매화는 여섯 송이째의 매화를 어루만진다.
“그래서. 그 스승이 누구지?”
그것은 활에 화살을 걸던 수적들의 가슴팍에서 연달아 아름답게 피어났다.
추이는 곤을 바닥에 대고 횡으로 길게 휘둘렀다.
“알 것 없어.”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돌조각들이 세차게 비산하여 전면에 있는 수적들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윽고. 사망매화가 일곱 번째 매화를 피워냈다.
“······.”
꽃잎 다섯 장을 가진 아름다운 매화.
일곱 번째 꽃송이.
그것이 추이를 향해 곧장 떨어져 내렸다.
“······.”
동시에 추이 역시도 곤을 휘저었다.
곤은 한 마리 흑룡처럼 회오리를 그리며 주변의 억새들을 사납게 찢어발긴다.
따-앙!
추이의 곤 끝과 사망매화의 칼끝이 한데 부딪쳤다.
칠십 명에 달하던 수적들이 모조리 죽어 나자빠진 전장 위에서, 두 남자는 서로 맹렬하게 뒤엉켰다.
땅! 따-앙! 까가가가가가각!
추이가 휘두르는 곤의 표면을 사망매화의 칼이 긁어 내려오며 무수한 불똥을 빚어낸다.
“퉤-”
입안을 깨물어 피를 낸 추이가 사망매화의 눈을 향해 침을 뱉었다.
핏-
사망매화는 칼등으로 추이의 침을 걷어냈고 그대로 꽃송이를 한 떨기 더 그려낸다.
혈향과 더불어 진한 매화향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추이는 자신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망매화의 칼끝을 응시하며 말했다.
“과연 매화검수로군.”
“······.”
그러자 사망매화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본디 ‘매화검수’란 매화검법의 극의를 깨우친 화산파의 검호들을 일컫는다.
칼을 한번 휘둘러 최소 네 송이 이상의 매화꽃을 동시에 그려낼 수 있는 경지.
모든 화산의 무인들이 꿈꾸며 수련하는 경지가 바로 매화검수인 것이다.
하지만.
“그따위 역겨운 말로 나를 부르지 마라.”
사망매화는 이 영예로운 호칭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추이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화산의 이름이 부담스럽나?”
“······.”
“사매를 간살하고 마교에 투신하러 가는 길이라서?”
“······!”
순간, 사망매화의 눈이 뒤집혔다.
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며, 자그마치 일곱 개나 되는 매화꽃이 추이의 전방을 아득히 뒤덮었다.
하늘을 온통 꽉 채운 꽃잎의 비를 바라보며 추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사망매화 오자운.
천라지망에 걸려 한쪽 팔을 잃어버린 외팔이 매화검수.
수없이 많은 추격대에게 쫓기며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이 정도 실력이라니.
추이는 밀려드는 매화향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 몸을 측면으로 틀었다.
···피피피핏!
옷깃이 여러 조각으로 찢어져 나부낀다.
매화꽃은 한 송이당 다섯 개의 꽃잎을 가졌다.
그런 매화꽃이 무려 일곱 송이.
무려 서른다섯 장이나 되는 꽃잎이 추이를 뒤쫓아온다.
도저히 외팔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르고 정교한 칼솜씨였다.
“많군.”
추이는 환검(幻劍)과 난검(亂劍)이 뒤섞여 있는 꽃잎의 파도를 향해 곤을 치켜들었다.
콰-앙!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힌 곤이 진흙바닥을 통째로 뒤집었다.
억새와 진흙의 파도가 일어나 아름다운 매화송이들을 집어삼킨다.
그러나.
콰지지지지지지지지직!
사망매화가 피워내는 매화꽃은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강하고 흉폭하기까지 했다.
억새와 진흙들은 매화꽃에 닿자마자 갈가리 찢겨나가며 사방팔방으로 튕겨나갔다.
추이는 검붉게 흐드러지는 꽃송이들 속에서 사망매화의 그림자를 빠르게 뒤쫓았다.
‘매화혈우(梅花血雨), 매화토염(梅花吐艶), 매향침골(梅香浸骨), 매유청죽(梅遊靑竹), 매화접무(梅花蝶舞), 매인설한(梅忍雪寒), 매향취접(梅香醉蝶), 매화로방(梅花路傍), 매화낙락(梅花落落), 매개이도(梅開利導), 매화낙섬(梅花落暹), 낙매분분(落梅紛紛), 낙매성우(落梅成雨), 매화구변(梅花九變), 매화만개(梅花滿開), 매화인동(梅花忍冬), 매향성류(梅香成流), 매화점점(梅花漸漸), 매화난만(梅花爛漫), 매영조하(梅影造河), 매화점개(梅花漸開), 매화빈분(梅花頻紛), 그리고 다시 매화혈우(梅花血雨), 매화토염(梅花吐艶), 매향침골(梅香浸骨), 매유청죽(梅遊靑竹), 매화접무(梅花蝶舞)······’
수없이 나부끼는 정석과 변칙, 그리고 실초(實招)와 허초(虛招)들 사이에서, 추이는 매화꽃 뒤에 숨은 매화검수를 정확히 찾아냈다.
쉬이이익!
추이가 내지르는 곤이 시커먼 독사처럼 날아들어 사망매화의 허리를 베어물었다.
“헉!?”
사망매화는 황급히 꽃잎을 뿌려 추이의 곤을 튕겨냈으나 궤도가 꺾인 곤 끝에 허벅지를 스치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철푸덕!
추이의 곤에 스친 사망매화는 그대로 진흙탕 위를 나뒹굴게 되었다.
그 빈틈을 추이가 놓칠 리가 없다.
부웅-
또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히는 곤이 사망매화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까-앙!
사망매화는 황급히 칼을 들어 올렸으나 팔 하나의 힘만으로는 추이의 곤에 실린 무게를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큭!”
허벅지와 어깨를 맞은 사망매화가 나려타곤의 수로 물러났다.
이미 온몸이 진흙범벅인데다가 곤에 맞은 상처가 욱신거린다.
추이는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앞에 섰다.
사망매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는 텅 빈 자신의 왼쪽 어깨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내 왼팔이 제대로 붙어있었다면 지금쯤 진흙탕에 구르고 있는 것은 자네 목이었을 걸세.”
“근데 안 붙어있군.”
“······.”
사망매화가 추이에게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펑! ···펑!
하늘에서 폭죽 두 개가 터졌다.
청색과 황색.
그것을 본 사망매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순간, 추이의 입이 열렸다.
“청색은 발견, 황색은 포위의 신호. 무림맹의 개들이 왔나.”
“······자네가 그걸 어떻게?”
사망매화가 제대로 묻기도 전에, 억새밭에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사사사사사사사삭-
검은 옷을 입은 무림맹의 추격조들이 왼쪽으로 접근해 오기 시작했다.
사사사사사사사삭-
오른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은 푸른 옷을 입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자월특작조였다.
“사망매화, 삼칭황천, 둘이 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장강수로채의 수적들이 같은 자리에 대거 죽어있습니다!”
“삼파전(三巴戰) 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망매화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포위망을 구성하고 있는 면면들을 살폈다.
그리고는 추이를 향해 시선을 흘끗 돌린다.
“화산파의 도사들은 나를 쫓아온 것이고, 남궁의 엽견들은 살짝 뜬금없군. 자네가 몰고 온 건가?”
“······.”
추이는 곤을 가로로 뉘여 양 어깨에 짊어진 뒤 두 손을 걸쳐 놓았다.
꽤 태연한 기색이었다.
사사사삭-
포위망이 좁혀 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전에 수적들이 만들었던 포위망 따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기세였다.
저 멀리 억새숲 사이로 먹이를 노리는 맹수들의 눈동자가 형형색색으로 타오르는 것이 보인다.
그때, 사망매화가 말했다.
“오월동주(吳越同舟)라. 피차 쫓기는 처지 같은데. 어떤가?”
그는 뒤쪽 강변에 놓인 십수 척의 배를 가리키고 있었다.
수적들이 타고 왔던 것들이었다.
끄덕-
추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마자 사망매화는 뒤돌아 뛰었다.
그가 가장 가까이 떠 있는 배를 향해 뛰어오르는 순간.
오싹-
뒤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런 미친!?”
사망매화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으나.
뻐-억!
이미 추이가 사망매화의 뒤통수를 곤으로 후려친 뒤였다.
···철푸덕!
사망매화는 한번 더 진흙뻘에 얼굴을 처박았고,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추이는 그런 사망매화의 뒷덜미를 잡아 들어 올리고는 어깨에 걸쳤다.
“곤귀도 이 수에 당했다네.”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추이는 곤을 들어 옆에 정박되어 있는 배들을 연달아 때려부쉈다.
콰콰콰콰쾅!
곤 끝에서 뻗어나간 붉은 기운이 배들의 허리에 커다란 구멍을 내 놓았다.
추이는 자신이 탈 배 하나를 남겨놓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그때, 무림맹과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간발의 차이로 강변을 덮쳤다.
“아앗! 배로 도망칩니다!”
“안 돼! 반드시 잡아야 한다!”
“강을 건너게 두면 절대 안 돼!”
하지만 추이는 이미 노를 저어 저 멀리 가고 있다.
“······제길!”
남궁율이 목표를 놓쳤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있을 때.
퍼퍼퍼퍼펑!
낭와진인 비무극이 쏜살같이 달려와 수면 위를 박찼다.
수상비(水上飛)의 경지에 닿아있는 절정의 경신술이 펼쳐졌다.
···펑! ···펑! ···펑! ···펑! ···펑!
비무극은 마치 물 위를 달리는 물수제비처럼 뛰어올라 뱃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촤아아아아악!
노로 쓰이던 추이의 곤이 수면 위를 박차고 올라오는 바람에 비무극은 배를 붙잡지 못했다.
까-앙!
비무극은 뱃전을 붙잡는 대신 칼을 뽑아서 추이의 곤을 막아냈다.
“이놈이 감히 무림공적을 돕겠다는······!?”
비무극은 곧바로 연격을 이어가려 했으나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
물보라 사이로 번뜩이는 추이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위화감이 그의 전신 근육을 뻣뻣하게 굳혀놓았기 때문이다.
오싹-
등골에 타오르는 소름과 함께, 비무극은 곧장 몸을 뒤로 물렀다.
‘······방금 뭐였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추격자에게도 식은땀은 흐르는가.
하지만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칼과 곤이 부딪치며 생겨난 반탄력으로 인해 배는 더더욱 앞으로 나아갔고, 비무극은 뒤로 훨훨 날아가 그대로 강변까지 후퇴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착지를 잘못하는 바람에 하반신이 온통 물에 젖은 비무극.
그가 씩씩거리는 동안 추이가 탄 배는 벌써 강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쫓아라! 율강은 유속이 느리다!”
남궁율의 재빠른 대처에 의해 추격대가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덧 저 앞으로 호북성의 긴 성벽이 보이고 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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