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파시(波市) (1)
33-파시(波市) (1)
호정문을 떠나는 발걸음.
그것은 가벼우면서도 또 고단한 것이었다.
추이는 안휘성을 벗어난 뒤 장강(長江)을 따라 서쪽으로 갔다.
드넓은 중원을 가로지르는 장강의 하류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갈 계획에서였다.
‘······그 전에 잠시 들를 곳도 있으니.’
추이는 장강을 끼고 먼 길을 돌아갔다.
지평선 너머로 온통 억새만이 넘실거리는 강변.
질척한 진흙뻘 옆에는 거칠게 흐르는 탁류와 뾰족한 암초들만이 솟아나 있었다.
구당협곡(瞿塘峽谷). 몇 개의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 둘러 서 있는 사이로 격렬한 수류가 흐르는 구역이다.
···콸콸콸콸콸콸콸콸콸!
이곳은 산세가 험하고 물살이 빨라서 웬만한 어부들은 잘 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만큼 물고기도 많은 곳이었기에, 실력에 자신 있고 힘께나 쓰는 젊은 어부들이 가끔 목숨과 어획량을 맞바꾸러 오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 구당협곡의 물살을 따라 추이는 계속해서 걸었다.
스스스스스······
억새들이 바람에 눕는다.
이곳은 정말 끝없이 펼쳐져 있는 억새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류로 접어들자 드세던 물살도 조금은 잠잠해졌다.
그때쯤 해서.
꼬르륵-
추이는 주린 창자를 움켜쥐었다.
벌써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가 고플 때마다 들짐승을 사냥해 먹었지만 이곳 억새밭에는 딱히 잡을 만한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
추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구당협곡의 하류 쪽에 무언가가 있었다.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려앉는 강물 위, 작은 섬 하나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인다.
“······.”
자세히 보니 그것은 섬이 아니라 수많은 배들이 다닥다닥 모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배들은 서로를 새끼줄로 묶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서 자그마한 인공 섬을 만들어 놓았다.
호롱불들이 어스름하게 빛나고 있는 아래, 수많은 어부들이 자신이 잡은 물고기들을 좌판에 내다 팔고 있었다.
“여섯 척 짜리 메기가 있소! 분명 용궁의 고관대작일 거요!”
“연자홍이 만선이외다! 빨리들 가져가슈!”
“자자, 붉은 잉어요! 붉은 잉어! 만년화리일지도 모르니까 사고 나면 배 한번 갈라보소!”
“숭어, 초어가 많소! 씨알 굵직한 것들이니 주릅들은 얼른들 와서 보시오!”
파시(波市).
물 위에서 배들이 모여 일시적으로 생성되는 시장이었다.
어부들은 이곳에다가 자신들이 잡은 물고기들을 내다 팔고 또 앞으로의 어업에 필요한 도구나 식료품들을 사기도 했다.
“여보- 여기 그물 고치는 할아범 어디 갔소!?”
“할멈. 이 생선들로 기름 좀 짜 주시우.”
“육포를 좀 구하고 싶은데, 오늘 잡은 숭어랑 바꿉시다.”
“제미, 오늘은 공쳤네. 저기서 국밥이나 한 그릇 먹고 가세!”
“목욕물 데웁니다! 뜨겁게 등목 한번씩들 하고 가셔~”
“여기서 술 한잔 하고 가셔요~ 생선으로도 받아요~”
만선(滿船)의 꿈을 꾸는 젊은 어부들이 괄괄하게 외치고 떠드는 소리.
그 외, 어부들을 상대로 생선을 감별하는 이, 경매꾼, 도매상, 소매상, 목욕탕 장사, 그리고 술과 밥을 파는 이들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룬다.
파시의 한 구석, 너덜너덜한 천막 아래에 더러운 솥 몇 개를 걸어놓고 우거지국을 끓이고 있는 남자가 하나 있었다.
추이는 뭍과 연결되어 있는 밧줄다리를 타고 파시 위로 올라섰다.
부글부글부글부글······
작은 솥 안에서 끓는 국밥 냄새.
멀건 된장과 우거지, 국물 위로 뜨고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이름 모를 잡어(雜魚)의 대가리, 들짐승의 내장, 그리고 좁쌀이 한데 섞여 끓고 있는 내음이 제법 걸쭉하고 구수하다.
추이는 더러운 그물 뭉텅이 위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바닥을 뒹굴어 다니던 이 빠진 그릇 하나를 집어 들고는 흐르는 강물에 한번 찰박- 씻었다.
기름이 둥둥 떠다니는 멀건 국물, 뽀얀 김이 피어올라 시야를 가린다.
추이는 솥에 걸려있는 나무 국자를 들어 국밥을 푸려 했다.
그때, 주인으로 보이는 텁석부리 수염의 남자가 추이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커다란 손바닥을 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선불이야.”
추이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가죽을 벗어 주인의 앞으로 툭 던졌다.
담비 가죽. 꽤 고급품이다.
하지만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난 돈으로만 받아.”
“얼만데.”
“동전 세 닢.”
추이는 고개를 들어 주인을 바라보았다.
담비 가죽은 은자로 쳐도 한 냥은 받을 수 있다.
겨우 동전 세 닢과 비교할 바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국밥집 주인은 완강했다.
“돈 없으면 먹지 마.”
“······.”
추이가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때.
“여기요. 국밥값.”
추이와 국밥집 주인 사이로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이제 막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 법한 소녀.
소녀는 주인에게 동전 두 닢을 던져주었다.
구리 동전 두 개를 받아든 국밥집 주인은 킁 하고 코웃음을 쳤다.
“국자로 두 번만 퍼먹어. 세 번 푸다간 경을 칠 줄 알고.”
그는 텁석부리 수염에 낀 소금기를 툭툭 털며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소녀는 주인을 향해 혀를 쑥 내밀어 보였다.
“똥간 똥물 같은 똥국 좀 푸는 거 갖구 유세는!”
“······.”
솥을 향해 손을 뻗던 추이가 잠시 멈칫한다.
이윽고, 소녀가 물었다.
“오빠 거지예요?”
“거지 아니다.”
“울 엄마가 돈 없으면 거지랬는데.”
“······.”
추이는 조용히 국밥을 세 번 퍼서 그릇에 담았다.
그리고는 아까 바닥에 던져놓았던 담비 가죽을 소녀에게 주었다.
“이름이 뭐니.”
“벽리연이요. 오빠는요?”
“추이.”
“거지 오빠.”
이럴거면 이름을 왜 물어봤는지, 추이는 우거지와 밥알을 훌훌 입으로 들이마셨다.
시들시들한 우거지에 색깔만 낸 된장, 찝찔한 젓국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뒤이어 들짐승의 내장 조각과 탁하게 익은 생선 눈깔이 씹혔고 푹 익은 좁쌀들이 국물과 함께 목구멍으로 밀려 들어온다.
솔직히 맛은 없었지만 뜨겁고 짭짤한 맛에 먹는 국물이었다.
추이는 그릇에 담긴 우거지국을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주린 창자에 더운 곡기가 들어가니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한편, 벽리연은 추이를 빤히 보며 말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걸식은 사람을 병들게 한댔어요.”
“······.”
추이는 고개를 들고 벽리연의 얼굴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고달픈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여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더러운 새끼줄에 빨래를 너는 여인.
강물을 떠서 얼굴에 묻은 분을 씻어내는 여인.
맨 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 지나가는 남자를 향해 추파를 던지는 여인.
그 외 수많은 여읜, 여윈, 여인네들.
파시에도 홍등가(紅燈街)가 있다.
거칠고 힘든 일을 하는 사내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니 당연히 술과 웃음도 따라오는 법.
물 위에 모였다가 흩어지는 이런 물거품 같은 공간에도 분냄새를 풍기는 여인들이 있다.
이런 여인들을 파등(波燈)이라고 부른다.
아마 벽리연은 그런 파등들 중 하나의 딸인 모양이다.
벽리연은 추이를 보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엄마는 원래 호북성 사람이래요. 농사 짓는 집에서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먹을 게 없어서 거의 맨날 굶었댔어요. 근데 패도회라는 곳에서 그랬대요. 배에 타면 큰돈을 벌 수 있고 가족들도 다 먹여살릴 수 있다고. 그래서 배에 탄 거래요.”
“그렇구나. 큰돈은 벌었니?”
“별로 못 번 것 같아요. 그래서 저도 얼른 커서 일해야 해요. 근데 그 전에 뭍으로 한 번은 나가야 될 것 같아요. 엄마가 아프거든요. 뭍으로 가야 의원을 만나서 제대로 몸을 고칠 수 있다고 했어요. 그래야 또 힘내서 일할 수 있다고.”
이 나이대의 어린아이는 으레 묻지도 않은 것들을 조잘조잘 이야기하길 좋아한다.
추이는 우거지를 우적우적 씹으며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벽리연이 물었다.
“오빠는 어디로 가요?”
“하남.”
“하남이 어디에요?”
“무림맹이 있는 곳.”
“무림맹이 뭔데요?”
“무림인들이 모인 곳이지.”
“거기는 왜 가요?”
“······.”
추이는 잠시 턱을 짚었다.
그리고는 옅게 웃었다.
“죽일 놈들이 많아서.”
이제 막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과는 영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하지만 여섯 살 벽리연의 눈에는 그것이 그다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헤에- 오빠는 무림인이에요?”
“그런 것도 아니?”
“네. 엄마가 종종 말해줬어요. 엄마를 여기로 보낸 사람들도 무림인이래요. 무림인들은 힘이 엄청 쎄다고 들었어요.”
“그렇구나.”
추이는 국밥 한 그릇을 깨끗하게 다 비웠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담비 가죽을 주워 벽리연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국밥값이다.”
“됐어요. 담비 가죽이 더 비싼 거예요. 바보 거지 오빠.”
“그래도 밥값은 치러야지.”
“음. 그러면······ 그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
벽리연의 말에 추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벽리연이 똘망똘망한 시선으로 말을 이었다.
“엄마가 몸이 많이 아픈데. 뭍에 가려면 무림인 아저씨들 허락을 받아야 한댔어요.”
“그러니.”
“네. 오빠도 무림인이면 나중에 무림인 아저씨들 만났을 때 부탁 좀 해주세요. 울 엄마 좀 뭍에 가게 해 달라고.”
“흠.”
추이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만난다면 부탁은 해 보마.”
“네. 같은 무림인들끼리는 말이 잘 통할지도 모르잖아요. 제가 말해본다고도 했었는데,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했어요. 어차피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고. 무림인들은 무림인들끼리만 대화가 통한댔어요.”
“음. 그도 그렇지.”
이윽고, 추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가야 할 시간이다.
마침 저 뒤에 있던 여인이 벽리연을 부르고 있었다.
“연아! 모르는 사람하고 얘기하지 말라니까!”
파리한 안색의 여인이 다가와 벽리연을 안아든다.
그러고는 황급히 발걸음을 옮겨 배 위의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거지 오빠, 안녕-”
천막으로 들어가기 직전, 그녀의 품에 안긴 벽리연이 추이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고 맹랑한 작별인사에 추이는 고개를 끄덕여 화답했다.
* * *
배를 넉넉히 채운 추이는 파시를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마침 시장 귀퉁이에 뗏목 하나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인다.
물에 잘 뜨는 쓰레기들과 널빤지 몇 개를 덧대 만든, 사실 뗏목이라기보다는 부표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추이는 감사한 마음으로 이것 위에 올라탔다.
천천히, 추이는 곤 ‘묵죽(墨竹)’을 노처럼 저어 강물 위를 나아간다.
······. ······. ······.
장강의 앞물결은 뒷물결을 밀어내며 앞으로 흐른다.
모든 것은 약수(若水)의 순리대로 앞과 뒤, 먼저와 나중이 있건만.
오직 하나, 추이만큼은 아니다.
그는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온 잉어.
순리를 거부하고 삶을 역으로 살아가는 존재.
일모도원(日暮途遠) 도행역시(倒行逆施).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기에, 도리를 거스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복수귀가 아니던가.
추이가 자신의 지난 삶과 회귀에 무슨 의미가 있을지를 고민하는 동안, 땟목은 하릴 없이 물결을 따라 이동한다.
하류 쪽으로 완만하게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추이는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별안간 들려온 비명소리만 아니었더라면 아마 뒤를 돌아볼 일은 없었을 것이다.
끄-아아아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겁에 질린 어부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도, 도망쳐!”
“수적이다! 수적 떼야!”
“장강수로채가 나타났다!”
추이의 뒤를 이어 파시를 찾아온 불청객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