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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32화 (27/110)

32-호정삼림(虎穽森林)

32-호정삼림(虎穽森林)

노을이 번지는 저녁.

···탁!

여인의 화장대 위에 금패(金牌)가 놓인다.

추이는 지금 호예양의 방 안에 있었다.

남궁세가로 갔던 호예양이 돌아오기 전, 추이는 그보다 먼저 호정문으로 되돌아와 그녀의 방에 들어온 것이다.

“호형. 그대의 복수는 이것으로 모두 마쳤소.”

호예양의 화장대 위에 내려놓은 금패는 과거 호질표국의 주예화 표두에게 받았던 것.

살생부에 적혀있었던 이름들을 모두 지워냈으니 이제 더는 호정문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

또한 안휘성의 패자인 남궁세가를 들쑤셔 놓았으니 더더욱 그렇다.

추후 호정문에 괜한 불똥이 튀지 않게 하려거든 이곳을 멀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추이는 호예양의 방을 둘러보았다.

소박하고 아담한 크기의 방, 좋은 가구와 정갈한 장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

추이는 잠시 추억에 젖었다.

과거, 호예양과 함께 병사 막사를 쓰던 시절이 떠오른다.

바닥엔 물기 축축한 진흙, 비좁은 천막 안에 들끓던 벌레.

깔아놓은 건초에는 벼룩과 이가 득실거렸고 모기와 파리 때문에 제대로 입을 벌려 대화를 하기도 힘들었던 군영(軍營).

하지만 그런 천막마저도 아늑하게 느껴졌던 참호에서의 나날들.

그리고 그보다도 더했던 전장에서의 야숙 생활.

추이가 기억하던 시절의 거처와 지금의 호예양이 머물고 있는 거처를 비교하면 가히 천지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생에서는 고생일랑 모르게, 잘 사시오.”

추이는 화장대 위에 향 하나를 피워놓고는 고개를 돌렸다.

떠나간 마차는 돌아보지 말아야 하는 법.

옛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현실의 시간을 잡아끌어서는 안 된다.

추이는 호예양의 방을 나왔다.

그녀의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던 시비 몇몇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이제는 개의치 않았다.

저벅- 저벅- 저벅-

해가 저물어간다.

지평선 저 너머에서부터 번져가는 노을빛을 따라, 추이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야!”

뒤에서 누군가가 추이를 불렀다.

돌아본 곳에는 우동원을 비롯한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보였다.

우동원이 붉어진 눈시울로 말했다.

“가는 거냐?”

“그래.”

“잘 가. 멀리 안 나간다.”

하지만 우동원은 추이가 가는 내내 그 뒤를 졸졸 따라왔다.

눈물을 참으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린 채로.

“근데 어디로 가냐.”

“서쪽.”

“인마! 서쪽이 어딘데!”

“하남.”

그곳은 무림맹을 비롯한 정도십오주의 대부분이 모여있는 곳이기도 하다.

추이는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하다고 판단,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이윽고 호정문의 담벼락이 눈앞에 보인다.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않은 담벼락.

막겠다는 건지, 잡겠다는 건지도 애매한 느낌의 벽을 추이는 단숨에 타올랐다.

추이가 막 담벼락 위의 기왓장을 밟고 서는 순간.

“잘 가라! 이 정 없는 새끼야!”

뒤에서 우동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들이란 그렇다.

언제 그만큼 친했다고, 녀석은 참 뜬금없이도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잘 가 추이야! 몸 조심하고!”

“너처럼 말 잘 다루는 놈은 처음이었어!”

“갈 데 없으면 언제든 또 호정문으로 와!”

“마굿간에 제일 좋은 자리를 비워 놓을게!”

“너 오면 침상에 건초도 두 배로 깔아줄게!”

“니가 가봤자 어딜 가겠냐? 기다릴 테니까 꼭 와라! 꼭!”

마굿간지기 소년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추이를 배웅한다.

“······.”

추이는 여전히 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짧게나마 손을 들어 올려 한번 휘저었을 뿐이다.

*       *       *

추이는 대로변을 걷는다.

요 며칠간 비가 많이 온데다가 한창 어두운지라 사람이 없다.

호정문의 장원 뒤쪽으로 쭉 이어지는 샛길.

추이는 그 길을 따라 울창한 죽림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안개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추이는 곤을 어깨에 빗겨 메었다.

그리고는 단촐한 방립 하나를 머리에 쓰고 어두운 산길로 녹아들었다.

바로 그때.

“복덩아!”

또다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추이를 이런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 뿐이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호예양이 서 있었다.

그녀는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

“복덩아!”

“······.”

“복덩아!”

“······?”

굳이 자신을 세 번 호명하는 호예양을 향해 추이는 한쪽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이윽고, 호예양이 말했다.

“복덩이. 네가 삼칭황천이었구나.”

그녀의 손에는 주예화 표두가 주었던 금패가 들려 있었다.

추이가 말이 없자, 호예양은 혼자서 말을 이어나갔다.

“봉이가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따르는데, 딱 두 사람만 무서워하더라. 너랑, 그때 비 오는 날 금창약 값을 주었던 사람.”

봉은 그녀가 좋아하는 말의 이름이다.

호예양은 금패를 들어보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여기서 말똥 냄새도 난다.”

“······.”

추이는 저도 모르게 옷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러자 호예양은 웃음을 빵 터트렸다.

“장난이야.”

“······.”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가라앉는다.

담담한 목소리가 물안개 낀 죽림을 울리고 있었다.

“고마워.”

“······.”

“쑥불을 피워준 것도, 말을 몰아준 것도, 내 고민들을 들어주었던 것도.”

“······.”

“그리고 조가장과 흑도방의 일도. 곤귀 일도. 이번 남궁세가에서의 일도.”

“······.”

“모든 일에 네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 이제는 알고 있어.”

“······.”

“고맙기도 하고, 왜 도와주는지도 궁금하지만, 그걸 말해줄 거였다면 숨기지도 않았겠지?”

“······.”

추이는 죽립을 푹 눌러썼다.

호예양은 그것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이윽고, 그녀는 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추이에게로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살포시 쥐었다.

“가지 마.”

“······.”

“가족이잖아.”

이 세상 그 어떤 남자가 이 여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저 아름다운 눈으로 자아내는 짙고 촉촉한 호소를 어떻게 외면할까.

하지만 추이는 끝끝내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직 청산해야 할 업보가 많다.

수금해야 할 혈채는 아직도 남아있었다.

일모도원(日暮途遠). 도행역시(倒行逆施).

날은 저물어 가는데 갈 길은 멀다.

그러니 가지 말아야 할 길임에도 갈 수밖에.

결국. 호예양이 말했다.

“가는 거야?”

언젠가 심상세계 속에서 들었던 말.

그것이 목소리만 바뀌었다.

“가는구나.”

지금의 호예양은 얼굴이 망가지지도, 목소리를 잃지도 않았다.

“잘 가.”

하지만 그녀는 울고 있었다.

추이도 말했다.

“잘 있어라.”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아니, 끊겨야 했다.

그러나 심상세계 속에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이어졌다.

확!

추이는 자신이 쓰고 있던 방립을 거칠게 벗기는 손길을 느꼈다.

당황한 추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호예양의 두 손이 추이의 양쪽 볼을 강하게 휘어잡았다.

툭-

방립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아무도 그것을 줍지 않았다.

“······!”

입맞춤.

찰나(刹那)보다 짧았는지, 영겁(永劫)보다 길었는지 모를.

이윽고. 호예양은 방립을 들어 다시 추이의 머리를 푹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죽림 속을 떠도는 물안개처럼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만나. 꼭.”

두 번의 삶을 거쳐온 추이조차도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       *       *

같은 시각. 어느 어두운 숲속.

사사사사사삭······

댓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대나무 줄기를 밟고 날아온 수많은 그림자들이 한 곳을 향해 은밀하게 모여들고 있었다.

남궁세가 안에서도 최정예라 불리는 ‘자월수색대(紫月搜索隊)’의 특작조.

남궁팽생의 죽음으로 인해 주인을 잃어버린 북문의 사냥개들이었다.

그리고 그림자들의 맨 앞에는 그들을 이끌고 있는 새로운 주인이 있었다.

흑단 같은 머릿결 아래로 보이는 날카로운 눈매와 오똑한 콧날.

검화(劍花) 남궁율.

그녀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숲속에 난 발자국을 뒤쫓고 있었다.

남궁율은 지난밤의 일을 회상했다.

독에 중독되었다가 깨어난 그녀에게, 하늘과 같은 할아버지가 명했다.

‘삼칭황천을 잡아서 데려오거라. 꼭 살려서 와야 한다.’

할아버지가 왜 그런 명령을 내리셨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녀는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내가 겪은 모욕을 반드시 되갚아주리라.’

본디 남궁율은 방학기가 끝나면 바로 등천학관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런 생각을 버렸다.

방학기를 통째로 다 쓰든지, 휴학을 하든지 해서 반드시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던 악적을 잡아낼 것이다.

스윽-

남궁율은 자신의 목을 한번 쓸어보았다.

뒷목이 아릿하다.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멍자국이 남아있었다.

동시에, 생전 처음으로 경험해 보았던 무시무시한 공포가 그녀의 몸을 떨게 만든다.

사내의 몸.

단단한 근육.

뻣뻣하던 늑대 털.

물씬 끼치던 피비린내.

자신의 목을 옥죄던 이빨.

야성 그 자체를 귀로 듣는 것 같던 목소리.

‘지금부터 혈도를 짚을 것인데. 발버둥치면 귀를 자르겠다.’

‘앞으로 내 말을 끊으려 드는 놈이 있다면. 그 전에 먼저 이 년의 멱부터 끊어놓고 보겠다.’

날 것 그대로였던 이 모든 것들이 그녀의 마음과 감정을 온통 뒤흔들어 놓고 있었다.

단지 공포와 분노일까?

아니면 그것들 말고도 또 다른 그 무언가가 섞여있는 감정일까?

남궁율은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존귀하게 태어나 존귀하게 살아왔다.

모두가 그녀의 눈앞에서 웃고 고개를 숙이며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왔던 그녀는 처음으로 누군가에 의해 함부로 다뤄지는 경험을 겪었다.

거기에 혀뿌리가 타들어갈 정도로 매웠던 첫 입맞춤까지.

“······. ······. ······.”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남궁율의 몸이 또다시 가늘게 떨린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지며 식은땀이 배어난다.

이 감정이 꼭 공포와 분노의 혼합물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위에 서서 주인 되기를 원하는 욕망과, 밑에 깔려 굴종하기를 원하는 욕망.

전자는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이나, 후자는 이번에 새롭게 깨달은 것이다.

남궁율은 이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감정 상태를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이 혼란을 떨쳐내기 위해서 꼭 그 늑대 가면의 사내를 잡아 자신의 발밑에 무릎 꿇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반드시 잡는다. 잡아서 내 앞에 꽁꽁 묶어놓고 채찍질이라도 해 주겠어. 그때처럼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남궁율은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안휘성을 통째로 뒤져서라도, 필요하다면 그 밖까지 나가서라도 꼭 찾아낸다.

자신의 모든 걸 걸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을 것이다.

성 내의 모든 유력인사들 앞에서 인질로 잡히는 망신에 첫 입맞춤까지 빼앗기는 굴욕을 겪었으니, 무인으로서든 여자로서든 충분히 복수할 자격이 있었다.

남궁율은 남궁세가의 최정예인 자월수색대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난 희미한 발자국들을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쫓아라.”

주인의 명령이 내려졌다.

밤의 사냥개들이 숲으로 뛰어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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