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조말지맹(曹沫之盟) (3)
31-
“······!”
남궁파는 크게 놀랐다.
자신의 아비가, 천하의 남궁천이 약한 소리를 하는 것을 그는 오늘 처음 보았다.
남궁천은 이름 그대로 하늘(天)과 같았던 정도무림의 지존 아닌가.
한없이 강하고, 또 한없이 광오한 남자. 검왕 남궁천.
아비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존경하고 경외하던 이의 입에서 설마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그것은 관중들 역시도 마찬가지인 듯, 다들 떡 벌어진 입을 다물 줄을 모른다.
하지만 남궁천은 한술 더 떠 이런 말까지 하고 있었다.
“아마 저 녀석이 쓰던 무기가 곤이 아니라 창이었다면, 나는 죽었을 게야.”
“······!”
“저놈이 들고 다니던 묵죽곤(墨竹棍)도 아마 곤귀를 죽이고 빼앗은 것이겠지. 그놈은 필시 창에 죽었을 것이고. 흐음-”
남궁천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아무튼. 마지막 수에서 칼을 뽑아 든 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살려면 별 수 있나? 체면보다는 목숨이 소중한 게 아니겠느뇨.”
“······믿, 믿을 수가 없군요. 도무지.”
“나도 그래. 솔직히 여태 믿어지지가 않는다. 가능하면 그놈의 마지막 공격을 맨손으로 막는 것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줄행랑 쳐 버렸으니 이제는 뭘 더 어찌할 수가 없구만. 에잉- 괜히 양보니 뭐니 해 가지고는!”
남궁천이 분하다는 듯 투덜거린다.
아비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인지라, 남궁파는 아까부터 작금의 상황이 낯설기만 했다.
한편,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 행동하던 남궁천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군중들을 바라본다.
“홀홀홀. 오늘 완전 체면 구기는 날이구먼. 한 입으로 두 말, 세 말을 하게 되지를 않나. 젊은 놈에게 연신 얻어맞지를 않나. 이거 이 남궁의 늙은이가 안휘의 영웅동도들을 마주 보기에 영 부끄럽소. 들 낯이 없어.”
그러자 남궁천의 주위로 몰려든 군중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인다.
마주 보기 부끄럽다고 말하는 것은 정중한 축객령을 뜻한다.
하기야, 대연회는 이미 쑥대밭으로 변했고 삽혈맹세는 무효가 되었으니 여기 모인 군중들로서는 더 이상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다.
남궁파가 군중들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남궁은 여기에서 이만 모든 일을 정리하려 하오. 오늘의 사달은 필히 본가에서 보상을 해 드리겠소이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여기 모인 영웅동도분들의 양해를 구하외다.”
잔치는 끝났다.
누가 여기다 토를 달겠는가.
그럴 배짱도, 그럴 이유도 없다.
무너진 담벼락과 초토화된 장원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간다.
군중들은 집을 찾아가는 오리떼처럼 뽈뽈뽈 흩어져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뒷정리를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하인들 너머로 어느덧 새벽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 *
부자(父子)가 세가로 돌아왔다.
남궁천은 손목과 팔뚝을 계속 주물거리고 있었다.
누가 대신 주물러 주겠다고 하면 신경질을 내는 통에 아무도 근처에 다가오지 못했다.
남궁파는 그런 남궁천의 옆에서 계속 중얼거렸다.
“삼칭황천이라. 저렇게 이상한 고수는 처음 봅니다. 사문도, 소속도, 나이도, 얼굴도 밝혀지지 않았다라······ 대체 누굴까요?”
그 말에 남궁천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는 방식은 잡배(雜輩). 창술은 삼류(三流). 무공은 절정(絕頂). 경공은 초절정(超絕頂). 심계는 화경(化境). 도무지 알 수 없는 친구더구나.”
“저런 자를 살려 보냈으니 완전히 망했습니다. 남궁의 체면이 땅에 떨어졌군요.”
“솔직히 너는 좋잖아.”
“예? 제가 왜 좋습니까?”
“팽생이가 대가리 깨져 죽었지 않으냐. 회의가 열릴 때마다 원로회 대표랍시고 사사건건 가주 앞길에 딴죽을 걸어댔으니 그동안 얼마나 눈엣가시였을꼬? 아비가 쓰던 노신이라서 어찌할 수도 없었겠고.”
“아니 아버님! 그 무슨 말씀을······!”
“항상 상황을 유리하게 해석하거라. 팽생이가 죽었으니 녀석이 꿍쳐두었던 검은 돈들은 다 네게 귀속될 것이다. 가주 직속으로 쓸 수 있는 재정이 한층 풍족해질테니 얼마나 좋으냐?”
“······.”
남궁파는 입을 다물었다.
남궁천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옛날에 조조가 군량 담당자인 왕후를 처형한 고사가 있다. 왜 그랬는지 알겠지?”
“삼국연의를 말씀하심이군요. 조조군의 군량이 모자라서 병사들에게 줄 배급이 적어졌고, 병사들이 불만을 제기하자 군량 담당자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배급을 횡령한 군량 담당자를 처형했으니 이제는 걱정 말라는 식으로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아!”
아비의 질문에 대답하던 남궁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천이 말했다.
“팽생이가 횡령을 하거나 뒷돈을 받는 등 악행을 일삼았던 것은 사실이다. 전수조사를 면밀히 하고, 이로 인한 피해들을 모두 구제하거라. 이참에 본가에서 허술하게 했던 모든 실수들을 다 팽생이의 잘못으로 덮어씌우면 되겠구나. 그러면 오늘 손상된 체면 이상으로 남궁의 위상이 더더욱 바로 설 것이야.”
조조가 왕후를 욕받이로 사용하여 자신의 입지를 더더욱 굳건히 했듯, 남궁파 역시도 남궁팽생을 그렇게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꼬리 자르기.
어차피 벌어진 일은 최대한 유리하게 해석하고, 위기가 있다면 그것을 기회로 바꾼다.
과연 무림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노강호다운 해결책이었다.
감탄하는 아들에게 남궁천은 껄껄 웃어 보였다.
“이번 삽혈맹세에서 제물로 잡은 짐승은 바로 팽생이었구나.”
제물로 쓸 늑대를 잡아 왔던 남궁팽생은 결국 본인이 제물로 바쳐졌다.
이율배반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이 또한 사람 사는 인생이 아니겠는가.
그때.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는 남궁파를 향해 남궁천이 물었다.
“참. 율아는 괜찮으냐?”
“예. 아버님이 독기를 몰아내 주신 덕분에 괜찮습니다. 아마 지금쯤 의식이 돌아왔을 것입니다.”
문득, 남궁파는 늑대 가면의 괴한이 남궁율에게 입맞춤을 하던 것이 떠올라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궁천은 남궁파의 속을 한번 더 긁어놓았다.
“그렇군. 그 아이가 곧 혼기를 맞이하지?”
“······?”
지금 이 화제가 왜 나온단 말인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궁파에게 남궁천이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말했다.
“율아에게 시켜라. 그 삼칭황천인가 하는 녀석을 생포해 오라고.”
“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율아가 아무리 뛰어나도 아직 약관도 안 된 어린아이입니다.”
“그 녀석은 더 어려 보였는데?”
“······.”
남궁파가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근골의 형태로 짐작건대, 삼칭황천이라는 자는 확실히 늑대 가면 속에 앳된 얼굴을 감추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궁천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필요한 인원은 얼마든지 차출해 줄 터이니 제 손으로 직접 잡아오라고 그래라.”
“아버님. 외람된 질문이지만······ 율아가 왜 그래야 하는 것인지요?”
“아 왜긴 왜야! 말 만한 처자가 어딜 시집도 가기 전에 외간남자의 알몸에 안겨! 인제 그 녀석은 혼삿길 다 망쳤으니 그런 줄 알어!”
“아니 아버님!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남궁파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열자 남궁천은 혀를 끌끌 찼다.
“등천학관이 지금 방학기랬지? 그동안 제 신랑감 잡으러 다니면 되겠구나. 꼭 산 채로 잡아오라고 그래라. 특작조 여러 명을 붙여줄 테니 인원 더 필요하면 말하고.”
“아버님! 아휴, 차라리 제가 가면 갔지 어찌 율아를 보낸답니까! 그리고 신랑감이라뇨! 율아의 혼처는 제가 알아볼 것이라고 누누히······!”
남궁파의 항의가 거세다.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강경한 기세였다.
하지만 남궁천은 그저 혀를 끌끌 찰 뿐이었다.
“교주고슬(膠柱鼓瑟)의 뜻을 아느냐?”
“······거문고의 현을 아교로 붙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 거문고의 현은 어떻게 조율하는지에 따라서 음이 달라지지. 그런데 어쩌다 한번 좋은 음을 찾았다고 해서 현을 아교로 떡 붙여놓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다른 환경에서는 못 쓰게 되겠지? 사람은 항상 변화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야.”
남궁천은 턱을 쓸며 말을 이어나갔다.
“내 젊은 시절, 남만의 한 원시 부족들을 만났던 적이 있다.”
“항상 말씀하셨었죠.”
“그 부족에는 특이한 풍습이 하나 있었어. 외부에서 온 손님을 맞으면 꼭 집주인의 딸과 동침을 시키는 게야.”
“그건 처음 듣는군요. 다소 미개하게 느껴집니다. 딸을 무엇으로 아는 건지······.”
“근친혼만 반복하다가 부족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에서 비롯된 풍습이었지. 외부에서 흘러들어온 피를 섞어서 근친상간으로 인한 유전병을 피하기 위함이야. 미개한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무쌍한 환경에 대응하는 나름의 방식일 뿐.”
이제야 남궁파도 남궁천의 말뜻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비의 말에 공감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것은 야만인들의 이야기 아닙니까? 단순히 피만 섞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사고입니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답에 가깝지. 우리의 정신은 남궁. 남궁은 곧 피로 전승된 성씨를 뜻한다. 정신은 피고, 피가 곧 정신이야.”
늘 온화하던 남궁천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궁파는 그 표정에 주눅이 든 채 얌전히 아비의 말을 경청했다.
“비슷한 정신머리를 가진 것들끼리 오래 엮이다 보면 정신적인 유전병이 생긴다. 내가 정도 출신의 손녀사위를 탐탁치 않아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그것들은 너무 우리와 비슷해.”
“그럼 사파나 마도에 몸담고 있는 사위도 괜찮다는 뜻이십니까?”
“그렇지. 내 말은, 사귀고 배움을 꼭 정도 안에서만 한정 짓지 말라는 것이다. 외부의 젊은 피가 쓸만해 보인다면 얼마든지 수혈해 올 수 있어야 해. 그래야만 격변하는 무림의 파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너무 조급해하시는 것이 아닌지요. 남궁세가는 거목입니다. 잔물결 몇 번에 쓰러지지 않지요. 아직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변화를 추구할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느냐?”
“······?”
아비의 질문에 남궁파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그것을 보는 남궁천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림은 바다와도 같다. 잔잔할 때는 더없이 잔잔하여 낚싯대를 드리우고 술 한잔 걸치기 좋지만······ 한번 폭풍우가 불면 하늘과 바다가 뒤섞일 정도로 무섭게 격동하지.”
이윽고, 남궁천의 눈동자가 아들을 향한다.
“요즘 신강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말을 들었다.”
“······!”
신강(新疆). 천산산맥의 수없이 많은 봉우리들이 줄지어 포진된 험지.
그곳에는 ‘마교(魔敎)’가 존재한다.
남궁천이 나직하게 말했다.
“변화에 대비하거라. 팔팔한 젊은 피가 있다면 닥치는 대로 들여와야 한다. 곧 큰 파도가 일 것이니, 그것을 넘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동원해야 하는 것이야.”
“······.”
남궁파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마교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아비에게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토를 달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피와 시체의 구산팔해(九山八海), 구무협(舊武俠)의 시대를 거쳐온 거목이 경고하는 대격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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