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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29화 (24/110)

29-조말지맹(曹沫之盟) (1)

29-조말지맹(曹沫之盟) (1)

“······.”

장내에 얼음장 같은 침묵이 깔린다.

남궁세가에 불만을 제기하던 이들도, 그런 불만을 다독이려 하던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모두 할 말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섰다.

남궁팽생이 죽었다.

남궁세가의 안마당, 본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원로가 살해당했다.

그것도 남궁세가가 주최하던 대연회 도중에.

“······.”

이 사상 초유의 사태 앞에 그 누구도 적절한 할 말과 행동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추이는 제 할 일을 묵묵히 수행했다.

···퍽!

남궁팽생의 시체가 하늘을 날아 대연회장 중앙의 탁상 위로 뒹굴었다.

음식과 식기가 사방으로 튀며 근처에 있던 시비들이 놀라 나자빠졌다.

챙! 채앵! 스르릉······

그제야 칼들이 뽑혀나왔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잘 훈련받은 군견 떼와 같이 제단을 포위했다.

“······절정고수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라.”

“북궁원로님을 단신으로 때려죽일 정도의 강자야.”

이제야 본격적으로 천망(天網)이 펼쳐졌다.

본진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와 난장판을 벌여놓은 흉수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일.

그때, 칼의 바다를 양쪽으로 가르는 이가 있었다.

남궁파.

이마에 구슬땀이 흐르고 단정하게 빗어넘겼던 머리는 산발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딸을 등에 업고 있었다.

“······.”

연회장 중앙에 도착하자마자 남궁팽생의 시체를 본 남궁파는 침음을 삼켰다.

이윽고,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을 지켜라, 삼칭황천.”

“······.”

추이는 남궁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아직 반 시진이 지나지 않았는지라 남궁율은 여전히 중독 상태다.

남궁파는 의원을 찾아서 도무지 그녀의 상태를 어찌할 바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독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것.

추이는 본디 거짓을 고하는 일이 별로 없지만, 목숨이 걸려있는 상황인지라 이 상황을 조금 더 끌어보기로 했다.

스윽-

추이는 제단 위를 둘러다니던 병을 다시 들어올렸다.

“이게 해독제다.”

“헛소리. 그건 독이잖나.”

“복용량만 지키면 약이다. 바늘로 찍어서 혓바닥에 묻혀야 할 만큼 소량이야.”

추이의 말에 남궁파가 입술을 깨물었다.

저 말을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다.

다만 딸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망설일 뿐이다.

추이는 병을 흔들어 보였다.

병은 완전히 비어 있었지만 그것은 추이만이 아는 사실.

추이는 병의 마개를 헐겁게 풀어 보였다.

“약이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 알겠으니까 빨리 넘겨라. 그러면 목숨은 보전해 주마.”

“마개가 헐거우니까 빨리 건지지 않으면 다 흩어질 거야.”

“······?”

추이를 향해 손을 내밀던 남궁파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바로 그 순간.

···팍!

추이가 유리병을 던졌다.

그것은 연회장 옆에 마련되어 있는 큼지막한 인공연못으로 떨어져 내렸다.

풍덩!

병이 연못 중앙에 잠겨버렸다.

남궁파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거, 건져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헐레벌떡 연못을 향해 달려간다.

바로 그 빈틈을 타, 추이가 제단에서 뛰어내렸다.

···퍼펑!

칼을 뽑아드는 몇몇 무인들의 얼굴을 밟고, 추이는 순식간에 장원을 가로질러 담벼락을 뛰어넘었다.

추이는 경공에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창귀들이 땅과 허공에서 두 손을 맞들어 받치고 있으면 그것을 밟고 뛰어오르기만 하면 된다.

아마 그것을 다른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경공의 초절정에 이르른 절대고수들만이 보일 수 있는 초상비(草上飛), 답설무흔(踏雪無痕), 허공답보(虛空踏步)의 경지로 착각할 만한 수준이었다.

···퍼퍼퍼퍼펑!

남궁세가의 몇몇 원로들이 휘두르는 검을 추이는 유령처럼 피해냈고 그들의 몸을 잔상이 빚어내는 붉은 바람으로 휘감아 버렸다.

“초, 초절정의 고수다!”

“세상에 이런 경공이 있단 말인가!”

“남궁세가의 원로들도 쩔쩔매고 있소!”

“내 눈을 믿을 수가 없군. 삼칭황천이 저 정도였던가······!”

남궁세가 소속이 아닌 다른 무인들은 그저 입을 딱 벌린 채 경탄할 뿐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결국 남궁의 이름 하에 자유로울 수 없는 처지기에, 칼을 뽑아들기는 해야 했다.

이제 비로소 추이는 완전히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장원 안이 온통 도산검림이 되었다.

검의 꽃이 피고 도의 대나무가 선 장원 안을 추이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다닌다.

온몸의 잔상처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으나 추이는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큰 상처 없이, 내력을 다 소진하기 전에 남궁세가의 높은 담벼락을 넘을 수 있다.

남궁파를 비롯한 고위직들이 모두 해독제를 찾기 위해 연못으로 달려간 것이 컸다.

추이는 성공을 직감하며 마지막 담벼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바로 그 순간.

“!”

추이는 목이 잘려 죽었다.

정확히는, 자신이 목이 잘려 죽는 환상을 보았다.

담벼락을 넘기 직전 등 뒤로 날아든 참격 한 줄기가 추이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 또렷한 환상에 추이는 곧바로 뒤로 물러섰다.

······등 뒤의 칼은 없었다.

······검격도 날아들지 않았다.

다만.

“홀홀홀- 감이 좋은 아해로고.”

수수한 흑색의 도포를 걸친 한 명의 노인이 털레털레 걸어오고 있을 뿐이다.

수염이 무릎까지 닿을 정도로 긴 것을 제외하면 너무나도 평범하게 생긴 노인.

하지만 그를 앞에 둔 추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는다.

검왕(劍王) 남궁천.

전 세대의 남궁가주.

살아있는 구무협(舊武俠)의 전설.

한때 무림맹주까지 역임했던 정도십오주의 정점들 중 하나가 추이를 마주보고 서 있는 것이다.

추이는 자신의 목을 한번 쓸어보았다.

식은땀이 흐르고 있을 뿐, 목은 멀쩡하게 붙어있다.

그럼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은 무엇인가?

‘한 발자국만 더 내딛었다면 진짜로 목이 잘렸겠지.’

남궁천은 찰나의 순간 응축된 살기를 뿜어내 날려보냈고 그것이 추이의 생존본능을 자극해 발을 멈추게끔 만들었다.

심검(心劍).

절대의 경지에 접어든 고수들만이 가능하다는 신기였다.

한편, 남궁천은 여전히 한가해 보이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뒷짐을 진 뒷방 늙은이처럼, 그는 느른하게 물었다.

“안 가누?”

“당신이 살을 날려보냈지 않나.”

“허허- 어떻게 알았어 그건? 그 경지에서는 잘 안 보이는 건데.”

추이의 대답에 남궁천은 어린아이처럼 손뼉까지 치며 웃었다.

추이 역시도 반문했다.

“안 가나?”

저 뒤에 누워있는 남궁율을 보며 하는 말이다.

호위무사 몇몇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남궁율은 식은땀을 흘리며 간이 침상에 누워있다.

그러자.

남궁천은 훌쩍 뛰어 남궁율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그러더니.

츠츠츠츠츠츠츠······

남궁율의 장심으로 내력을 흘려넣었다.

“커헉!?”

남궁율이 피를 토했다.

추이의 피가 섞여있는 토혈이었다.

남궁율은 편한 표정을 지은 채 기절했다.

남궁천은 곧바로 다시 추이의 앞으로 날아들었다.

“······.”

추이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남궁천은 처음부터 남궁율을 해독할 수 있었다.

자신의 완전무결하고도 절대적인 내력으로 추이의 내력을 태워버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수많은 인사들이 당혹감에 휩싸였다.

추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홀홀홀-”

남궁천은 처음부터 추이의 모든 수를 무력화시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서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자신에게서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뜻.

추이는 짧게 말했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바로 죽였겠지. 뭔가 달리 원하는 게 있으니 이러고 있는 것이고.”

아까 전에 남궁천이 한 말과 비슷하다.

남궁천 역시도 아까 전에 추이가 한 말과 비슷한 말을 했다.

“똑똑하군, 젊은이.”

“고맙군, 늙은이.”

대화가 나누어지는 동안 남궁파를 비롯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추이를 다시 한번 포위했다.

추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잔상처들을 각오하고 오로지 도주에만 집중한다면 여기의 그 누구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남궁천이라는 변수를 제외했을 때였다.

추이가 기억하던 과거에서, 남궁천은 진작 현역에서 은퇴해 은거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남궁파가 외쳤다.

“악적을 잡아라! 산 채로 포박해서 내 앞으로 데려와라!”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칼을 든 채 앞으로 달려나간다.

바로 그때.

“섯거라!”

남궁천이 버럭 소리질렀다.

아까까지 짓고 있었던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 싹 사라졌다.

무표정한 얼굴의 남궁천은 뭐랄까, 인간이 아닌 것만 같은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한 마리 큰 호랑이와 같았던 남궁파 역시도 아비의 기세에 눈치를 본다.

“아, 아버님. 어쩐 일로······”

“누가 내 흥을 깨랬나? 너희들은 저 아해를 놓쳤고, 잡은 것은 나야. 숟가락 얹으려 들지 마라.”

“아버님! 율아를 중독시키고 북궁원로를 살해한 악적입니다!”

“그게 뭐? 율아는 해독되었고, 북궁원로는 평소 네 눈엣가시였지 않누?”

“아버님!”

남궁파가 소리를 지르자 남궁천은 귀를 후비며 인상을 썼다.

“율아를 넘겨주면 저 녀석을 무사히 보내주겠다고 아까 약조하지 않았던가?”

“그것은 협박당해서······”

“그 옛날, 조말지맹(曹沫之盟)의 고사를 상기하려무나. 제의 환공(桓公)이 너보다 멍청해서 그리했던 것이 아니다. 또한, 결과적으로 너는 손 한번 안 쓰고 정적을 제거한 셈 아니냐. 너는 오히려 저 삼칭황천이라는 아해에게 고마워해야 해.”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님! 쫌!”

남궁파는 아비의 말에 의표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남궁천은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튼 간에, 내 여흥을 방해하지 말아라. 지금 근 이십 년, 아니 삼십 년 만에 제일 재미있는 순간이란 말이다. 효도해야지, 아들?”

남궁천이 핀잔을 먹이는 것은 남궁파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추이에게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곳 남궁세가 안에서는 내 말이 곧 법도라네 친구. 하물며 황제 폐하께서도 나의 의견을 우선 존중해 주시지.”

“······.”

“자, 그럼 법도 하나를 새롭게 제정해 볼까?”

남궁천은 손가락으로 수염을 쓸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검지를 곧게 펴며 말을 이었다.

“내 허락 없이는 남궁세가의 장원에서 퇴청 불가.”

추이는 시선을 흘끗 돌렸다.

뒤는 복잡한 시가지.

안쪽으로 깊이 파고들면 위아래로 높이가 들쭉 날쭉한 빈민촌이 나온다.

그곳으로 파고든다면 도주 성공확률은 약 삼 할.

추이는 여차하면 도박수를 띄울 생각으로 물었다.

“어떻게 하면 퇴청을 허락해줄 텐가?”

“허허허-”

남궁천은 오른손을 들어 다섯 개의 손가락을 쫙 펼쳐 보였다.

“다섯 수를 양보하마.”

그 말에 남궁파를 비롯한 군중들은 충격을 받았다.

천하의 검왕이 까마득한 말학을 상대하는데 ‘수를 양보한다’는 표현을 쓰다니.

그것도 고작 다섯 수 밖에 양보하지 않는단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삼칭황천이라는 자의 무리를 엄청나게 높게 쳐주고 있다는 뜻이다.

남궁천은 뜻모를 미소로 빙글빙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칼은 안 뽑도록 하지. 피하기만 할 테니 마음껏 날뛰어 보련?”

한마디로, 모든 힘을 끌어내 보이라는 소리다.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기에, 추이는 곤을 고쳐잡고 자세를 바꿨다.

체중과 곤의 무게가 오로지 앞발에만 쏠리는 자세.

무거운 일격을 견인하는 준비 자세이다.

쿠-오오오오오오오!

추이가 딛고 있는 바닥의 진흙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딱딱하게 굳고, 더 나아가 도자기처럼 반들반들 구워진다.

수많은 창귀들을 비틀어 짜 모은 내력이 추이의 전신을 타올라 흑곤의 끝에 집중되고 있었다.

츠츠츠츠츠츠츠츠······

이윽고, 추이의 체중과 흑곤의 무게가 앞발에서 뒷발로 옮겨갔다.

곤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나간다.

콰-앙! 우지지지지지지직!

추이가 내디딘 진각에 주변의 담장이 허물어져 내렸다.

동시에 정면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운이 폭사된다.

마치 거대한 화살처럼 날아드는 검붉은 창루, 아니 곤루(棍淚).

그것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죄다 끌어당겼고 이내 찢어발긴다.

그와 동시에.

“하-앗!”

남궁천이 검을 뽑아들었다.

뎅겅-

지척까지 왔던 곤의 기세가 단숨에 잘려나간다.

대각선으로 베인 추이의 참격은 저 멀리 있던 누각 하나와 호수 위를 가로지르던 다리 하나를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콰콰콰콰쾅! ···우르릉!

주변의 지형지물이 완전히 뒤바뀐 형상을 취한다.

무너진 누각의 위로 버섯 모양의 거대한 흙구름이 피어올랐고 파괴된 다리를 집어삼킨 호숫물이 죄다 밖으로 범람했다.

그 경천동지의 광경을 눈앞에 두고 군중들은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한편, 추이는 검을 빼든 남궁천을 향해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칼.”

“으응?”

“안 뽑는다며.”

“아차!”

추이의 지적에 남궁천이 진짜로 당황했다.

그는 칼과 추이를 번갈아 보며 허둥거리다가 슬쩍 칼을 칼집에 꽂고는 딴청을 피웠다.

“아니, 이 나이쯤 되면 말이야. 칼이 손보다 편해. 저절로 막 움직여. 그리고 자기가 한 말도 금방 까먹어. 진짜야. 자네도 내 나이 돼보면 알게 될 거야. 그리고 요즘 치매끼가 자꾸 올락······ 말락······ 뭐, 그런 것도 같고······”

약속을 어겼다는 소리를 듣느니 차라리 치매 노인이라는 말을 듣는 게 나은가 보다.

이윽고, 남궁천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자네도 첫 수는 간 보는 용도 아니었나. 남은 네 수는 정말로 칼 없이 받아보도록 하지.”

“······.”

남궁천의 말에 추이는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앞으로 남았다는 네 수.

그것이 네 수(四手)가 될지, 아니면 죽을 수(死手)가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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