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26화 (21/110)

26-사나운 창자(猛臟) (1)

26-

어장검(魚腸劍)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칼빛을 뿌린다.

칼의 이름이 가진 ‘물고기의 창자’라는 뜻처럼, 추이 역시도 창자처럼 늑대의 몸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고기의 차가움, 골수까지 사무쳐 드는 피비린내, 온몸을 꽉 옥죄고 있는 뼈와 가죽.

그 속에 담긴 추이는 한 자루의 칼이 된 것처럼 숨을 죽이고, 날을 갈며, 때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러 불이 피어올랐고 북소리가 울려퍼졌다.

지금 제단 위에서 검무를 추고 있는 여자는 남궁세가의 귀한 신분이다.

추이는 철저한 사전 조사를 통해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칼이 허공을 베어 가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질 무렵, 추이는 늑대 뱃속에서 나왔다.

얼굴은 새끼 늑대의 머릿가죽을 뒤집어써 가리고 몸에는 어미 늑대의 피를 묻힌 채로.

‘너희 모자의 원수는 내가 대신 갚아 주마.’

추이의 애도를 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는 오직 제물이 된 늑대 두 마리 뿐.

그 외에는 모두 혈채(血債)를 갚아야 할 채무자에 불과하다.

회귀하기 전의 먼 옛날.

호정문의 억울한 멸문을 그냥 덮어버렸던 남궁세가의 흉수들을 향해, 추이는 사나운 창자가 되어 뽑혀나왔다.

쫘-악!

늑대의 뱃가죽을 찢고 밖으로 나왔을 때, 추이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이는 이의 얼굴은 남궁율의 것이었다.

검무를 추고 있었던 그녀는 그 동작 그대로 굳어버린 채 이쪽을 바라본다.

호수처럼 큰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경악, 불신, 공포, 이 모든 감정들이 녹아들어 있는 시선을 맞받으며 추이는 손을 뻗었다.

콱!

남궁율의 목이 추이의 손아귀 안에 떨어져 내렸다.

추이는 손에 힘을 주었다.

···으드득!

그 손에 잡힌 남궁율의 가녀린 목은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하다.

희고 부드러운 살점 속에 여린 대나무처럼 곧게 뻗어있는 목뼈.

추이는 여차하면 그것을 확 꺾어 부러트릴 기세로 손을 흔들었다.

“켁! 케헥! 컥!”

남궁율은 침을 흘리며 기침했다.

팔다리는 애처롭게 버둥거렸고 곱게 정리되어 있던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산발이 되었다.

좀 전까지의 신비롭던 분위기는 간 곳이 없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혈괴인(血怪人)에게 멱줄을 잡혀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추이는 남궁율을 바싹 끌어당겼고 그녀의 뒷목을 찍어눌렀다.

그리고 다른 손에 든 어장검으로 남궁율의 귓등을 툭 건드렸다.

“지금부터 혈도를 짚을 것인데.”

“······.”

“발버둥치면 귀를 자르겠다.”

“······.”

남궁율은 아찔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았다.

혈도를 짚기 전, 추이는 남궁율의 목을 잡은 손으로 그녀의 내공을 살폈다.

‘공력은 심후하나 실전 경험은 조금도 없군.’

책상에 앉아서 무공을 배우면 이렇게 된다.

덩치만 컸지, 솜털도 채 안 빠진 햇병아리로 크는 것이다.

병아리는 아무리 커도 병아리다.

작은 매에게도 쉽게 채여가 모든 것을 뺏겨버린다.

추이는 남궁율의 마혈(痲穴)과 아혈(啞穴)을 짚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목을 쥔 채 몸 전체를 들어올렸고 그대로 제단 맨 앞을 향해 끌고 갔다.

그때까지도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제단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네, 네 이놈! 이 쳐죽일 놈아! 당장 내 딸을 풀어주······!”

눈이 뒤집힌 남궁파가 막 소리를 지르던 그때.

추이의 입이 열렸다.

“내 요구조건은 두 가지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

모든 이들의 시선이 추이가 쓰고 있는 늑대 가면으로 향했다.

남궁파가 외쳤다.

“이 악적 놈아! 내 딸부터 풀어놓으란 말이 안 들리더······!”

그때,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남궁파의 말을 끊었다.

“좀 조용히 해 봐라.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리지 않누.”

“······!”

남궁파에게 면박을 준 이의 정체는 바로 남궁천이었다.

어느새 누각에서 내려온 것일까?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들아. 경거망동 하지 말거라. 너는 가주 위를 물려받고도 그 버릇을 못 고치겠느냐?”

“······.”

“죽일 생각이었으면 바로 죽였겠지. 뭔가 달리 원하는 게 있으니 저기서 저러고 있지 않겠누?”

남궁천의 말에 남궁파가 기세를 가라앉혔다.

남궁세가의 모든 무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시끔 추이가 입을 열었다.

“똑똑하군, 늙은이.”

“고맙우이, 젊은이.”

세상 사람들이 미처 경악할 틈도 없이, 추이와 남궁천은 간략하게나마 대화를 나누었다.

천하의 검왕을 상대로 늙은이라는 말을 내뱉은 괴한도 놀랍거니와, 그것에 대꾸하는 남궁천의 태도도 예삿것이 아니었다.

남궁천은 말을 더 해보라는 듯 손짓했다.

추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내 말을 끊으려 드는 놈이 있다면.”

늑대 가면 속의 무심한 시선이 남궁파를 향한다.

“그 전에 먼저 이 년의 멱부터 끊어놓고 보겠다.”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남궁파 역시도 입술을 꽉 깨물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추이가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했듯, 내 요구조건은 두 가지다.”

추이는 제단 아래에 모인 모든 군중들을 쭉 훑어보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첫째. 오늘의 삽혈맹세는 무효다.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그 말에 남궁세가 인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고 다른 이들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했다.

방금 추이가 한 말은 남궁세가에만 해롭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로웠기 때문이다.

추이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정파의 거목이라 불리는 남궁세가가 이따위 저열한 불공정계약이나 일삼고 있으니 대의가 바로 서지 않는 것이다. 나는 오늘 공익을 위해 이 자리에 섰다.”

그 뒤로 약간의 침묵이 이어졌다.

청중들은 추이의 연설에 미묘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환호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야유도 없었다.

모든 이들이 남궁세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궁세가에서 어떠한 반응이 있기도 전에, 추이가 두 번째 요구를 말했다.

“둘째. 이 조약을 만든 놈을 죽여야겠다. 그놈을 이 제단 위로 올려보내면 이년은 상처 하나 없이 풀어주마.”

그 말에 미묘한 표정으로 눈알을 굴리던 청중들 역시도 경악했다.

설마 첫 번째 요구에서 더 막나가는 요구를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윽고, 남궁파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올렸다.

추이는 고개를 까닥 움직여 그에게 발언권을 허락해 주었다.

남궁파가 이를 뿌득 갈고는 말했다.

“말 다 했나?”

“다 했다.”

“그럼 이제 내가 대답해도 되나?”

“그래라.”

추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궁파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조약은 공정하게 수정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조약 사항을 만든 이를 죽이는 것은 안 된······.”

“안 된다고 하기 전에 본인의 의사를 먼저 물어보는 것이 어떤가?”

추이의 답변이 남궁파의 말을 끊었다.

그러자, 군중들의 시선이 한 곳을 향해 옮겨갔다.

“······!”

바로 남궁팽생이 서 있는 자리였다.

멀뚱멀뚱 서 있던 남궁팽생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번 불공정조약의 조약 사항들을 만든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괴한이 이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것을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윽고, 남궁팽생은 버럭 소리쳤다.

“이 악적 놈아! 남궁이 네놈의 세치 간교한 혀에 놀아날 것 같으냐?”

하지만 추이는 태연했다.

“너만 여기로 올라온다면 이 여자는 상처없이 놓아주마.”

“미친놈! 내 무공을 봉하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말 같은 말을 해라! 이 혀를 뽑아 소금에 절여도 모자랄 놈아!”

남궁팽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악다구니를 썼다.

남궁파는 그것을 보며 이마에 핏줄을 세웠다.

“······.”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금 추이의 요구는 남궁팽생에게 남궁율 대신 죽으라는 소리이니 그로서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그러나.

“내가 언제 무공을 봉하라고 했지?”

추이의 어조는 여전히 느른하고 태연했다.

정말로 몰라서 묻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남궁팽생이 미간을 와락 찡그렸다.

“······무슨 소리냐, 이 악적 놈아! 율아를 내려보낼 테니 나보고 거기 대신 올라오라면서? 인질을 교환하겠다는 것 아니냐!”

남궁팽생이 묻자, 추이가 다시 한번 대답했다.

“무공은 봉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올라와.”

“······?”

“너쯤은 그냥도 때려죽일 수 있으니까.”

“······!”

이것은 인질극을 떠나 무인 대 무인으로서의 모욕이다.

이런 말을 듣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무림인들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정도십오주의 하나로 이름높은 남궁세가의 원로씩이나 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남궁팽생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윽고, 그는 남궁파를 돌아보며 버럭 소리쳤다.

“가주! 가겠소! 내가 올라가서 율아를 구해오겠소이다!”

“······.”

그 말에 남궁파는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남궁팽생이 추이의 요구를 거절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괴한의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대중들이 주목하는 관점이 이미 남궁팽생이 조카를 위해 몸을 던질 것이냐, 던지지 않을 것이냐로 고정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남궁파 역시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

그는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괴한의 술수에 말려드는 것은 경계해야 하지만, 인질로 잡혀있는 딸의 목숨이 너무나도 소중하다.

결국. 남궁파는 결정을 내렸다.

“알겠소 북궁원로. 올라가 주시오.”

“······!”

가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남궁팽생의 표정이 묘하게 변한다.

뭐랄까, 막상 올라가려니 찜찜하고 불안해졌달까.

저 괴한 놈이 무슨 수를 감추고 있을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너무 섣불리 제안에 응해버렸다.

“······끙.”

남궁팽생은 제단 앞에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망설이기 시작했다.

가주인 남궁파 역시도 그를 독촉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가주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가신을 사지로 내모는 그림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모든 이들이 엉거주춤 망설인다.

군중들은 남궁세가에 닥힌 이 사건에 얼떨떨해하고 있었고 남궁세가 역시 처음 겪어보는 일에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

가주인 남궁파와 괴한에게 지목당한 당사자인 남궁팽생 역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짜증스럽다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팽생, 이 게을러터진 놈아! 이 늙은이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게야!”

남궁천.

이 상황에서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않고 있는 유일한 존재.

늘 무료한 표정을 지은 채 꾸벅꾸벅 졸던 그가 천둥같은 목소리로 호통치고 있었다.

게다가 눈빛은 또 어떤가?

마치 십수 년은 젊어진 듯한 초롱초롱한 눈빛.

마치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시선이었다.

남궁천의 꾸중을 들은 남궁팽생이 뜨거운 물에 데인 것처럼 깜짝 놀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예, 예! 선가주님! 지, 지금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이로서 성사되었다.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쓴 괴인.

그리고 남궁세가의 늙은 원로.

이 둘 간의 생사결(生死決)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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