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25화 (20/110)

25-혈채(血債) (7)

25-

남궁파는 연단에 올라 외쳤다.

“남궁세가와 여기 모인 영웅동포 여러분들께서는 모두 자유와 평등이라는 신념을 위해 칼을 들었습니다.”

그의 기세는 울부짖는 호랑이와 같았고 연단 주위로 울려퍼지는 내력은 천둥번개의 메아리를 방불케 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공동체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조직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에 올라 있습니다. 북쪽에서는 사도가 패악질을 일삼고, 서쪽에서는 마도가 창궐하고 있으며, 동쪽에서는 오랑캐들이 기승을 부리고, 남쪽에 있는 무림맹의 힘은 나날이 약해져만 가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는 조상 대대로 지켜왔던 정의와 균형을 수호하기 위하여 우리 스스로를 봉헌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이 남궁 모가 여러분들을 초청한 이유입니다!”

그때, 남궁파가 연설을 하고 있는 옆으로 남궁율이 걸어왔다.

그 아름답다던 남궁세가의 시비들도 남궁율의 옆에 서자 그저 꽃 옆의 잎사귀들로 전락해 버렸다.

청중들은 남궁파의 비장한 연설보다도 인간이 아닌 듯한 남궁율의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저래서 별호가 검화(劍花)구나. 과연 명불허전이로다.”

“오늘 삽혈맹세에 성검봉송을 하는 주자가 남궁 소저였군.”

“등천학관에 수석으로 입학했던 천재라지?”

“문무(文武)에 재색(才色)까지 저렇게 완벽하게 겸비하다니, 같은 인간이 맞나 싶구만.”

이윽고, 남궁율이 청중들의 사이를 지나 제단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그녀는 소매가 하늘하늘 떨어지는 흰 무복(舞服) 차림이었고, 두 손에는 남궁세가의 가보이자 성검인 ‘어장검(魚腸劍)’을 들고 있었다.

···꼬옥!

남궁율은 칼을 품에 끌어안았다.

이 어장검은 과거 황제가 남궁세가에 직접 하사했다는 성스러운 검으로, 한때 물고기의 몸속에 숨겨져 거사를 치르는 데 일조했다는 전설이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남궁율은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수많은 시선들을 받으며 어장검을 더더욱 꽉 움켜쥐었다.

문득, 아버지의 농담이 떠오른다.

‘······칼. 누구한테 뺏기면 안 된다?’

그때는 그저 누가 남궁세가의 가보를 건드릴 수 있겠냐며 웃어넘겼지만······ 막상 이 자리에 서니 농담이 그저 농담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선망, 동경, 질투, 탐욕······ 다양한 시선들이 그녀의 가슴팍에 들린 어장검을 향해 내리꽂힌다.

그것은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소녀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감정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부담감을 사명감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지혜로운 여인이다.

남궁율은 시선들을 한껏 만끽하며, 보무도 당당히 제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그녀는 전신에서 휘몰아치는 짜릿한 감각을 느끼며,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쾌감으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남궁율은 높은 제단 앞에 섰다.

이 무대는 오로지 이번 의식을 위해서만 축조된 것으로 남궁세가의 드넓은 장원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남궁율은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저벅- 저벅- 저벅-

총 일백 여덟 개의 계단이 그녀의 발아래 깔리게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가주인 남궁파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위치에 홀로 우뚝 섰다.

···화르륵!

봉송해 온 성화가 제단의 네 귀퉁이에 옮겨붙는다.

둥- 둥- 둥- 둥-

밑에서 악공(樂工)들이 울리는 북소리에 불꽃은 거세게 약동한다.

스르릉-

남궁율이 어장검을 빼 들었다.

차가운 칼빛이 흩뿌려지며 퍼런 예기가 제단 아래까지 떨어져 내린다.

“······.”

남궁율의 시선을 따라 만인의 시선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제단 한 구석에 매달려 있는 제물을 향해 걸어갔다.

높게 솟구친 검은 장대에 네 발이 묶여있는 늑대.

어지간한 호랑이만큼이나 큰 이 늑대는 머리를 아래로 향한 채 혀를 길게 빼물고 죽어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늑대의 밑에는 커다란 구리 쟁반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남궁율의 임무는 이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스으윽······

그녀는 성검 어장을 높게 들어 올렸다.

곧, 남궁율은 칼을 휘둘러 늑대의 목을 벨 것이다.

그러면 아직 채 식지 않은 늑대의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구리 쟁반에 가득 고일 것이고, 이후에는 안휘성의 패자들이 하나 하나 제단 위로 올라와 그것을 나누어 마시고 회맹의 맹세를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번 대연회의 삽혈맹세는 훌륭히, 성황리에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펄럭-

남궁율의 무복 자락이 바람이 휘날린다.

저 하얀 소매는 곧 늑대의 붉고 위험한 피로 촉촉하게 젖어들 것이고, 군중들은 묘한 기대와 흥분, 고양감에 취하게 되리라.

그리고 이를 잘 알고 있는 남궁율은 늑대의 몸에 바로 칼을 대지 않고 사뿐사뿐 주위를 맴돌며, 무복 자락의 너울거림으로 군중들의 넋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빈 대(臺)에 황촉(黃燭)불이 말없이 녹는 밤.

-소매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무복 자락이 하늘을 덮었다가 땅을 쓸길 반복할 때마다 군중들은 남궁율의 검무에 취해갔다.

이윽고.

춤사위가 절정에 이르렀다.

제단 아래에서 타오르는 장작불이 남궁율의 얼굴에 기이한 홍조를 드리웠고,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구슬 같은 땀방울을 흘릴 때마다 관중들의 이마에도 식은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비로소. 남궁율이 어장검을 든 채 늑대의 앞에 섰다.

불길이 가장 높이 치솟고, 향이 가장 짙게 퍼졌을 때, 남궁율은 늑대의 목에 어장검의 날을 드리웠다.

둥- 둥- 둥- 둥-

가죽 북 소리가 더더욱 요란해졌다.

피부 밑까지 떨리게 만드는 진동이 대기 전체를 떨어 울리고 있었다.

이제 피가 쏟아진다.

맹세의 시간이 도래할 것이다.

그것은 피처럼 붉고 칼처럼 날카로우리라.

모든 군중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일은 모든 이들의 상식과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는 것이었다.

···움찔!

늑대의 몸이 움직였다.

어장검의 날이 닿지도 않았건만,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몸을 떨며 남궁율을 향해 움직인다.

왈칵-

거꾸로 매달린 늑대의 뱃가죽이 갑자기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세로로 쭉 갈라지며,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

남궁율이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불쑥 뻗어나온 그것은 피로 물들어 있는 한 손바닥이었다.

···콰악!

이윽고, 늑대의 뱃속에서 피투성이의 한 남자가 튀어나왔다.

그는 상의를 탈의한 채 하의만을 입고 있었으나 온몸이 피에 젖어 있어서 옷을 입은 것인지 벗은 것인지 일견에 분간해낼 수 없었다.

다만 특이한 것은, 그의 얼굴을 덮어쓰고 있는 새끼 늑대의 머릿가죽이었다.

“······! ······!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남궁율은 무림 최고의 기재다운 반사신경으로 뒤를 향해 물러섰다.

하지만.

쉬리릭-

괴한의 손아귀는 독사의 아가리처럼 독하고 집요했다.

피에 젖은 손은 허공에서 궤도를 바꾸었고 그대로 남궁율의 목덜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익!?”

그녀는 손에 든 어장검을 휘두르려 했으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칼은 제대로 휘둘러지지 못했다.

콰-직!

매가 병아리를 채가는 것처럼, 남자는 시뻘건 손아귀를 벌려 남궁율의 하얀 목을 휘어잡았다.

···우드득!

무시무시한 악력으로 조여드는 손아귀에 붙잡힌 남궁율은 남은 숨을 강제로 토해냈다.

“커헉!?”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남자의 손길이 이렇게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것이라니.

남궁율로서는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던 상황이었다.

“······?”

“······?”

“······?”

창졸간에 벌어진 이 사태에 제단 아래의 청중들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반응들이다.

아까도 말했듯, 사람이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을 눈앞에 목도하게 되면 멍하니 굳어버리는 법이었다.

그리고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괴한은 바로 그 틈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상황의 주도권을 순식간에 제 손에 떨어트려 놓았다.

···텅! ···터엉! ···땅그랑!

어장검의 칼집이 제단 바닥에 몇 번 튕기고는 지면 아래의 흙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제야 남궁파가 정신을 차렸다.

“웨, 웬 놈이냐!?”

남궁세가의 무사들이 칼을 뽑아들고 제단 아래로 달려갔으나 아무도 위로 올라가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느새 괴한의 손으로 넘어간 어장검이 남궁율의 목젖을 깎아낼 듯 드리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꾸우욱-

흰 살을 눌러오는 시퍼런 예기에 남궁율이 눈을 질끈 감았다.

사내에게 붙잡힌 뒷목은 마치 맹수의 이빨에 단단히 물려있는 듯했다.

꽉 들어찬 근육과 지독하게 풍겨오는 피비린내, 늑대 털의 빳빳한 질감.

이 모든 것들이 남궁율을 압도하고 있다.

감히 조금의 딴생각도 품을 수 없게, 항거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싹틀 수 없도록 우악스럽게 짓누르고 있었다.

남궁세가 안에 모인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이윽고 늑대의 아가리가 벌어졌다.

“······남궁세가의 개새끼들은 듣거라.”

모두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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