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혈채(血債) (6)
24-
호정문의 문주 호연암.
그는 남궁세가에서 주최하는 대연회의 말석 부근에 앉아 있었다.
안휘성 내 쟁쟁한 문파나 세가들의 수장들 사이에서 그는 조금 움츠러든 듯 보였다.
“후우······”
아무도 못 듣게끔 작게 한숨을 내쉬는 호연암.
하지만 그의 한숨소리를 들은 사람이 한 명 있다.
호예양.
그녀는 수심에 잠긴 아비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단 호연암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연판장(連判狀)>
남궁세가가 다른 문파와 세가들에게 나누어준 계약서.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쭉 적혀 있었다.
一.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정도 조직들은 남궁세가의 산하로 들어온다.
二. 남궁세가는 산하로 들어온 조직들에게 가문 비전의 일부를 공유한다.
三. 남궁세가의 산하로 들어온 조직들은 남궁세가에 매 분기 일정량의 보호비를······
.
.
조약의 내용을 쉽게 풀이하자면 이것이다.
남궁세가의 보호를 받는 대신 일정 금액의 돈을 바치라는 뜻.
이는 안휘성 내의 모든 조직들에게 주어진 강제 선택지이다.
사파에는 약한 집단이 강한 집단에 ‘상납’을 바치고, 정파에는 약한 집단이 강한 집단에 ‘보호비’를 낸다.
명칭만 다르지 결국 똑같은 구조인 것이다.
하지만, 호정문은 남궁세가에 보호비를 낼 만큼 수입이 좋지 않은 문파였다.
한편. 걱정스러워하는 호연암을 지켜보는 몇 명의 호사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희들끼리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이번에는 조가장이 아니라 호정문이 이 자리에 초대받았군.”
“조가장은 돈이라도 있어서 그럭저럭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호정문이 그게 될까요?”
“되겠나, 이 사람아? 호정문이 기울어가는 거 모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근데 그런 기울어가는 문파를 산하로 받아들이면 남궁세가도 손해 아닙니까?”
“남궁세가는 그냥 검술의 일부만 띡 던져 주면 그만인데 뭐 손해볼 게 있겠나? 오히려 막대한 보호비를 내게 생긴 호정문만 울상인 것이지.”
“나는 호정문이 조가장과 흑도방을 없앴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구만?”
“호정문이? 예끼, 이 사람.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호정문은 돈도 힘도 없는 문파야. 그들이 어떻게 조가장과 흑도방을 없앴겠나?”
호사가들의 말대로, 남궁세가의 제안은 약소 문파인 호정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다.
비단 호정문 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모인 몇몇 작은 문파나 세가들 역시도 우려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로 그때.
“어허- 다들 표정들이 어둡구려.”
호연암을 비롯한 초청객들의 앞으로 한 노인이 걸어왔다.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 자세를 취했다.
“북궁원로님을 뵙습니다.”
“아, 됐네, 됐어. 우리끼리 무슨 이런 격식인가. 앉으시게 다들.”
남궁세가의 원로 남궁팽생.
거구의 몸에 긴 수염만큼은 삼국연의의 관운장을 연상케 하는 풍모였으나, 눈이 뱀처럼 찢어지고 코가 매의 부리처럼 날카로와서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런 남궁팽생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의 속마음은 사실 곱지 않았다.
‘늙은 여우가 나타났군.’
‘빌어먹을 돈귀신 같으니.’
‘또 무슨 음흉한 수작질을 부리려고 나타났나.’
남궁팽생은 전대 가주 때부터 원로로 일해오며 수많은 산하 조직들을 관리하는 자였다.
거구의 몸과 심후한 무공과는 어울리지 않게, 잔머리가 빠르고 속셈이 음흉하여 하위 조직들과의 조약을 불공정하게 이끌고 뒤로는 딴짓이 잦았다.
초청객들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궁팽생이 입을 열었다.
“이번 연판장의 조약들은 내가 직접 작성했다네. 어떤가?”
그 말에 초청객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하지만 대 남궁세가의 원로를 상대로 속마음을 드러낼 정도로 멍청한 이들은 이 자리에 없었다.
결국 모두들 억지웃음을 지으며 남궁팽생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하- 하하하- 어쩐지 계약내용이 아주 공정하다 했더니만. 북궁원로님의 작품이셨군요.”
“아이쿠, 이거 저희들 편의를 너무 봐주시는 것 아닙니까?”
“올해도 남궁세가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든든~ 합니다!”
“거기에 남궁세가의 비전검술도 전수받을 수 있으니, 이거 꿈만 같습니다 그려.”
“또 보호비도 아주 합리적으로 책정되어 있구요. 허허허허-”
그때,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남궁팽생의 눈에서 이채가 발했다.
그는 호연암의 옆에 앉아있는 호예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누구신가. 소문의 호정문주가 아닌가.”
남궁팽생은 친근한 웃음을 띤 채 호연암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짚은 채 입을 열었다.
“그래. 대연회에는 처음 참석하지?”
“예, 원로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허허허- 영광은 무슨. 앞으로는 자주 볼 텐데. 조가장 일은 유감이야. 그렇지?”
“원로님. 저는 맹세코 조가장의 비사와는 아무런 연관이······”
“암- 암- 누가 뭐랬나? 우리 호정문주가 깨끗하고 당당한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러니까 내가 자네를 이렇게 이 자리에 초청했지 않은가?”
남궁팽생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호연암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오늘의 기회는 호정문에게 아주 좋은 기회가 될 걸세. 남궁세가의 비전검술을 전수받게 되면 무인들의 수준이 크게 올라가겠지? 호정문은 표국을 경영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면 호질표국의 표사들도 많이 강해질 게야. 그러면 당연히 수입도 늘어나고, 규모도 커질 것이고.”
“하하- 저희는 아직 규모를 늘릴 계획이 없······”
“없어도 있어야지 이제는. 그래야 보호비를 내고 나서도 이문을 남길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런가? 허허허-”
남궁팽생의 말에 호연암은 하려던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입을 다물어야 했다.
권유를 거절하는 것은 자유다.
어디까지나, 표면상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사실 남궁팽생의 말은 권유가 아니라 강압에 가까웠다.
거절이라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한 힘의 논리인 것이다.
그때, 남궁팽생의 시선이 옆에 있는 호예양을 향한다.
그는 은근슬쩍 물었다.
“우리 호 소저가 곧 열일곱이지? 곧 혼기를 맞이하는구만. 조가장과의 혼담이 무산되어서 유감이네.”
“그것은 그저 소문일 뿐, 저는 조가장과 혼담을 논의했던 적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아, 그런가? 워낙 유명해서 내 몰랐구만.”
호예양의 정중한 말에 남궁팽생의 눈이 더욱 가늘어졌다.
“우리 호 소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신랑은 별로인가?”
“아직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습니다.”
“어허~ 생각이 없으면 쓰나. 생각을 해 봐야지. 이렇게 예쁜데 말이야. 뭐, 꼭 누군가의 처가 아니라 첩으로 들어가는 것도 괜찮을 게야. 요즘 세상이 어떤가? 꼭 정실부인으로만 들어가야 한다는 풍조는 이미 한물 가지 않았는가? 요즘 젊은이들은 어리고 무능력한 남자의 정실이 되느니 나이 많고 능력 있는 남자의 첩실이 되는 편이 낫다고들 하던데.”
그때, 호연암이 정중한 어조로 도포 자락을 들어 남궁팽생의 앞을 가렸다.
“원로님. 제가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
“이 사람. 지금 내가 자네 딸과 진지한 논의 중이지 않나. 다 호정문이 잘 되라고 해 주는 이야기이니 잠자코 듣게나.”
남궁팽생이 은근히 기세를 뿜는다.
절정고수가 대놓고 방출하는 내력 앞에 호연암이 불편한 신음소리를 냈다.
바로 그 순간.
“거기서 뭣들 하는 거요?”
남궁팽생의 내력을 단번에 흩어버리는 이가 있었다.
남궁파. 남궁세가의 젊은 가주가 그곳에 서 있었다.
산에서 한 마리 대호(大虎)가 내려온 듯한 그 기세에 좌중이 조용해진다.
“······.”
남궁팽생은 조용히 내력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남궁파를 향해 조용히 포권을 취했다.
“으음. 별일 아니었소이다, 가주. 귀빈들 중에 반가운 얼굴이 보여 내 잠시 몇 마디 나눴소.”
“별일이고 아니고는 내가 듣고 판단하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텐데?”
남궁파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의 시선이 숫돌에 갈리는 칼날처럼 점점 예리하게 벼려지고 있었다.
하지만 남궁팽생은 유들유들한 태도로 남궁파의 시선을 슬쩍 피했다.
그리고는 옆에 있던 호연암을 툭 친다.
“허허허- 중요한 행사가 코앞이라 그런가, 가주께서 많이 날카로우시군. 연판장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다기에 내 몇 마디 조언을 해줬소만. 그렇지 않소?”
고개를 돌린 남궁팽생의 시선은 호연암에게만 보인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해 있었다.
호연암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그렇습니다.”
“허허허- 보시오. 정말 별일 아니니 가주께서는 더는 신경쓰지 않는 편이 좋겠소. 이런 사소한 일로 혹 가주의 평정심이 흐트러지기라도 하면 그 편이 더 큰일나는 것 아니겠소?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괜히 부정을 탈지도 모르고.”
남궁팽생은 어물쩍 이 자리를 넘기려 했고 그것은 그의 의도대로 되었다.
“그럼, 호정문주. 다음에 또 모르는 것이 있으면 찾아오시게. 오늘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어야 하니까. 알겠나?”
그는 힘 있는 목소리로 호연암에게 속삭인 뒤 휘적휘적 걸어서 연회장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남궁팽생이 떠난 뒤, 남궁파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찡그린 채 호연암을 바라보았다.
“북궁원로가 뭔가 실언을 했다면······ 아니, 분명 실언을 했겠지.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호정문주.”
“아, 아닙니다. 어찌 가주님께서······”
남궁파가 고개를 숙이자 호연암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남궁파는 영 찜찜한 기색이었다.
“저 망령든 노친네는 아버님 시대의 가신이라서 나도 통제가 잘 안 되는구료. 나도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있는 것일세.”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따위에게.”
“자네가 어때서. 우리 남궁세가의 든든한 맹방이 될 사이인데. 또 이런 속사정이라도 좀 털어놔야 자네가 북궁원로의 무례를 이해해 주지 않겠는가. 나도 그 정도 염치는 있는 사람일세.”
남궁파는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있는 호예양을 돌아보았다.
“보아하니 본가의 늙은이 하나가 네게 실례되는 말을 한 모양이다. 너에게도 사과하마.”
“아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담담한 어조로 고개를 숙이는 호예양을 보고 남궁파는 생각했다.
‘외모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우리 율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겠구나. 이 아이도 등천학관 시험에 합격했다고 들었는데······ 어쩌면 좋은 호적수이자 벗이 될 수도 있겠어.’
자식 교육에 관심이 많고 이런저런 소식에 밝은 남궁파는 이미 호예양의 등천학관 합격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때.
대앵-
하늘 저편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초경(初更)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삽혈의 시간이 되었구나.”
남궁파는 서둘러 연회장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오늘 모인 이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연단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윽고, 남궁파는 호연암과 호예양을 비롯한 모든 이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모여주신 안휘성 내의 영웅동포 여러분께 이 남궁 모가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소이다.”
의식의 단계에 앞서, 남궁파는 이 자리의 취지와 의의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다.
······하지만. 청중들의 시선은 남궁파를 향하기보다는 그 너머에 있는 다른 곳을 향해 더 많이 쏠려 있었다.
화용월태(花容月態). 폐월수화(閉月羞花).
바로 검화 남궁율이 걸어오고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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