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혈채(血債) (5)
23-
연회가 시작되었다.
끝도 없이 긴 탁자들 위로 각종 산해진미들이 날라져 온다.
빨갛게 찐 게 무더기, 노릇노릇 구운 오리, 깍뚝깍뚝 사각으로 썰어 간장에 졸인 돼지고기, 항유에 튀긴 닭, 편백나무 상자 속에 소금을 깔고 쪄낸 잉어, 송이버섯과 죽순 볶음,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가지각색의 술들······.
아름답고 잘생긴 하인들이 나긋나긋한 태도로 손님들의 시중을 든다.
안휘성 내에 있는 모든 정도 문파와 세가들이 한데 모인 자리인지라 이 연회장에 앉아있는 이들은 대부분 귀빈들이었다.
한편.
높은 누각 위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 남자가 있었다.
한 명은 남궁세가의 가주(家主)인 남궁파(破).
큰 키에 헌앙한 체격이 돋보이는 중년인이다.
정도십오주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大) 남궁세가의 가주라면 언제나 위풍당당할 것 같지만······ 지금 남궁파는 상당히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있는 한 노인 때문이다.
남궁천(天).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검왕(劍王)이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지고한 경지에 올라 있는 무인이자 남궁세가의 현 태상가주(太上家主)였다.
정파든 사파든, 무림맹이든 사도련이든 간에, 자신은 더 이상 복잡한 정치에 연관되고 싶지 않다며 가주위를 비롯한 모든 것들을 아들에게 물려준 남궁천.
은퇴 후 오로지 검에만 일로매진하던 그가 지금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것은 남궁파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아버님. 무료하십니까?”
“그걸 아는 놈이 나를 이런 곳에 불러다 놓았느냐?”
“아버님도 참. 요즘 안휘성 내의 분위기가 영 뒤숭숭하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이럴 때는 검왕께서 한번 공석에 모습을 드러내 주셔야 분위기가 정돈됩니다. 이게 다 가문을 넘어 안휘성 안의 백성들 전체를 위한 일 아니겠습니까?”
“에잉.”
남궁파의 말을 들은 남궁천은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래 대연회장이 보인다.
수많은 이들이 모여서 먹고 마시며 노래하는 곳.
하지만 남궁천은 아까부터 수염만 쓸며 앉아있을 뿐, 조금도 흥이 나지 않는 기색이었다.
“늘 똑같은 놈들이 와서 늘 똑같은 말만 하다 가는 자리인데, 뭐하러 나까지 내보내누?”
“아버님. 전에 말씀드렸듯, 이번에는 대연회의 성질이 조금 다릅니다.”
남궁파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조가장이 멸문되었습니다.”
“안다. 벌써 몇 번이나 들었어.”
“한미한 핏줄이기는 하나, 엄연히 우리 남궁의 방계입니다. 그곳의 방주인 조양자는 현 원로원의 중추인 남궁팽생과 먼 친척 사이이지요. 또한 조양자는 저희들의 창궁무애검법을 가지고 있었고, 한때 무림맹 등천학관의 교관 직도 역임했던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것도 안다. 조양자, 그 녀석은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었지. 꽤 똘똘한 녀석이었는데.”
“······그런 조양자가 흑도방이라는 사파 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이제 그 여파는 남궁세가까지 미칠 것입니다. 그러니 남궁세가는 정도의 기둥으로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사실을 공고히 해 두어야 합니다. 바로 이번 대연회에서요.”
남궁파는 이번 기회에 안휘성 내 고래현과 내송현의 기강을 확실히 잡아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궁천은 여전히 심드렁해 보였다.
“허이구- 약한 놈들끼리 툭탁툭탁 싸우다가 몇 놈 죽은 것이 무에 대수냐? 너는 예전부터 시덥잖은 일로 항상 열을 내곤 했었지. 귀뚜라미 싸움에서 진 것을 가지고 몇날 며칠이나 화를 내기도 했었지 않느냐?”
“아버님. 조가장과 흑도방을 어찌 귀뚜라미에 비유하십니까. 그리고 그게 언젯적 일인데······ 어휴.”
남궁파는 이마를 짚은 채 고개를 떨구었다.
바로 그때.
누각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올라왔다.
“아버님. 할아버님. 이제 슬슬 연회장에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이윽고,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 피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꼬리, 베일 듯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무표정한 얼굴 가운데 은은한 냉기가 감도는 인상의 미녀였다.
남궁율(律).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검화(劍花)라는 별호를 가질 만큼 대단한 기재.
그녀는 남궁세가 전체의 금지옥엽이자 남궁파의 자랑이었다.
남궁파는 남궁율을 보자마자 입가에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랑스러운 내 딸 왔구나. 아버님. 율아를 오랜만에 보시니 어떻습니까? 많이 자랐지요?”
잘 커가는 딸을 보는 아비의 마음은 흡족하다.
하지만 할아비의 마음은 조금 다른 듯했다.
“율아구나. 그래. 이번에 집에 왔다고?”
남궁천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던지는 질문에 남궁율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할아버님. 방학을 맞아 등천학관에서 잠시 복귀했습니다.”
“으응- 그래. 학관에 가서 쓸만한 신랑감은 찾아 왔느냐?”
남궁천의 말에 남궁파가 깜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아버님! 얘가 몇 살인데 벌써 혼인을 논하십니까?”
“나 때는 다 혼인하고 애 낳았을 나이구만 뭘? 이 정도면 슬슬 혼기 찼지.”
자신의 혼인 문제로 다투는 아버지와 할아버지 앞에서도 남궁율은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대신 대답했다.
“혼처라면 안 그래도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등천학관을 졸업하고 나면 바로 혼인하고 싶습니다.”
“아니, 율아야!”
“아버님. 할아버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얼른 혼인해서 세가의 보탬이 되어야지요. 또 개인적으로도 얼른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싶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벌써 혼인 생각은 좀······ 아직은 이 아비 어미와 조금 더 시간을······ 아니면 서, 서, 설마? 지금 따로 만나는 남자라도 있는 것이냐?”
“없습니다. 지금은 학업에 매진하는 중이라 남자 생각이 전혀 없지만, 졸업 후에는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미리미리 준비해 둘 뿐입니다.”
남궁율의 무덤덤한 목소리에 남궁파는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딸이 자기 혼처를 스스로 알아보고 있다는 말에 동요하지 않을 아비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남궁천은 여전히 혀를 끌끌 찰 뿐이다.
“사윗감을 찾으려거든 좀 멀리서 찾거라. 이 근방의 민숭민숭하고 맹- 한 놈들 말고.”
“아니, 아버님은 또 왜 그러십니까?”
“뭘 왜 그래? 집안에 죄다 개성 없고 밋밋한 놈들뿐이니 하는 말 아니야? 손녀사위까지도 그런 재미없는 놈이 들어오는 거, 나는 싫다.”
“율아의 신랑감은 언젠가 때가 되면, 제가 고르고 골라서, 이 세상에서 제일 바르고 성실한 녀석으로 짝지어줄 생각입니다!”
“쯧- 또 어디서 찍어낸 것처럼 틀에 박힌 놈을 데려오겠구만. 에잉, 니 맘대로 해라.”
남궁천은 귀찮다는 듯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주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준 뒤로 속세의 일에는 영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였다.
남궁파는 그런 아버지를 향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남궁율의 어깨를 짚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런 그렇고, 율아. 너의 임무를 잊지 않았겠지? 곧 삽혈맹세의 식이 거행된다.”
삽혈맹세(歃血盟誓).
동맹을 맺기로 한 이들이 한데 모여 치루는 결연(結緣)의 의식이다.
크고 사나운 짐승의 피를 내어 구리 쟁반에 받고는 그것을 돌아가면서 들이마시는 것이 절차다.
남궁파는 남궁율에게 말했다.
“삽혈맹세에는 이 아비가 참석할 것이다. 너의 임무는 가문의 성검(聖劍)을 꺼내어 제단까지 봉송한 뒤, 제물로 쓸 짐승의 목에서 피를 내어 구리 쟁반에 담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 행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역할인 게야.”
성검봉송(聖劍奉送).
가문의 비고 깊숙한 곳에 있는 검 ‘어장(魚腸)’을 꺼내어 대연회장의 중심부를 지나 제단 위까지 운반하는 거룩한 작업.
그리고 이 성검으로 제물의 목을 베어 피를 구리 쟁반에 받는 것 역시도 중요한 일이다.
이 두 과정이 삽혈맹세라는 의식에서 가장 화려하며 장엄한 부분이기에 그렇다.
남궁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중요한 임무를 제게 일임하신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영웅들 앞에서 남궁의 위엄이 더욱 드높아질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허허허- 의기는 좋지만 목적이 바뀌었구나. 나는 너에게 남궁의 위신을 세우라고 한 것이 아니다. 남궁에게 너의 위신을 세우라고 하는 것이지.”
딸바보 남궁파의 너스레에도 남궁율은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이다.
“남궁이 저의 자랑이듯, 저 역시 남궁의 자랑이 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녀의 딱딱한 말에 남궁파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거, 녀석. 그렇게 진지하게 대답하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딸이 똑똑하고 냉철해서 좋기는 하지만······ 가끔 이렇게 농담이 통하지 않을 때마다 겸연쩍어지는 경우가 왕왕 생긴다.
이윽고, 남궁파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일어나자. 슬슬 주인공들이 나설 차례구나. 아버님도 그만 일어나시지요. 자- 어서요!”
남궁파는 투덜거리는 남궁천의 손을 잡고 일으켜 계단으로 향했다.
그때.
남궁파가 문득 입을 열었다.
“참. 율아야.”
“예, 아버님.”
막중한 임무 앞에서 표현은 안 해도 꽤나 긴장하고 있을 딸에게, 남궁파는 한번 더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칼. 누구한테 뺏기면 안 된다?”
그러자 남궁율은 이번에도 세상 진지한 표정을 지은 채 아비의 농담에 대답했다.
“설마요. 이 세상에 그 누가 대 남궁세가의 가보를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남궁세가의 장원 한복판에서요.”
“허허- 그렇지.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라고. 그냥 네가 긴장하고 있을까 봐 농으로 해본 말이야.”
남궁파는 껄껄 웃으며 계단을 내려간다.
남궁율 역시도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부녀는 각자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앞으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채로.
······.
······하지만.
때때로 사람은 잊어버리곤 한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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