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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귀무쌍-22화 (17/110)

22-혈채(血債) (4)

22-

남궁세가의 북쪽.

높이 솟아있는 북궁(北宮) 아래에 커다란 문 하나가 보인다.

남궁세가의 장원 북쪽으로 통하는 북문이었다.

북문을 지키는 문지기는 근엄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오늘은 대연회가 벌어지는 날.

귀빈들은 모두 남문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으니 북문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대부분 대연회의 뒷준비를 위한 사람들이다.

가령, 지금 문지기의 눈앞에 멈춰 선 고기 배달 마차처럼 말이다.

“멈춰라.”

문지기는 마차를 세웠다.

마차는 분명 남궁세가의 것, 원래대로였다면 그냥 통과시켰을 것이지만······ 마차 위에 책임자인 가우현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일단 멈춰세운 것이다.

마차에서 한 소년이 내렸다.

추이. 얼굴에 흙먼지와 잿가루가 잔뜩 묻은.

문지기는 그런 추이를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너는 누구냐? 가우현 조장님은 어디 가셨지?”

“일이 생기셨다고 잠깐 다른 곳에 들리신다고 했습니다. 고기 배달이 늦을 것 같으니 일단 제가 대신 가라고······”

“그래? 왜지? 그 깐깐한 사람이 갑자기 그럴 리가 없는데?”

뱀처럼 가늘게 좁혀진 문지기의 시선이 추이와 고기 마차를 훑는다.

그는 마차의 뒤쪽, 짐칸으로 가 문을 열어보았다.

끼기긱······

서늘한 냉기, 어둠 속에 주렁주렁 걸린 고기들.

문지기는 마차의 짐칸을 슥 둘러보았다.

“······.”

그의 눈에 핏자국 하나가 보인다.

그것은 아주 작았고 마차의 짐칸 뒷문에 멀찍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문지기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애초에 도축장에서 고기들을 싣고 온 마차니 문에 피가 좀 묻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다만 가우현이 사라진 것은 못내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다.

문지기는 추이에게 물었다.

“가우현 조장님에게 뭔가 일이 생겼다고?”

“예.”

“무슨 일?”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상당히 급해 보이셨습니다.”

“근데 왜 하필 너 같은 꼬마를 대신 보냈어? 도축장에 어른들도 많았을 것 아니냐?”

“그······ 안 좋은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건 무슨 소리야?”

“인부들이 고기를 나르는 것이 조금 늦었습니다. 그러자 나으리께서 인부들의 버릇을 고쳐 주시겠다며 모두의 다리몽둥이를······”

추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몇 가지 진실을 말한 것만으로도 문지기는 제멋대로 상황을 추측했다.

“젠장, 그 인간 또 거기서 한바탕 했나 보군. 예전에는 또 뭔 백정 하나가 자기 명령을 못 들은 체했다고 손가락을 자르더니만, 이번에는 또 다리야? 하여간 천민혐오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니까.”

추이의 말을 들은 문지기는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알았다. 이리 와.”

평소였다면 추이의 말을 조금 더 의심했겠지만, 오늘은 정신없이 바쁜 대연회 날 당일인지라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장 이 고기 배달 마차의 뒤로도 야채 배달, 땔감 배달, 비단 배달 등등 다양한 마차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지기는 추이를 불렀고 입출자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백정이지? 이름이 있나?”

“예.”

“이름이 뭔······ 아니다 됐다. 백정 상대로 무슨.”

명단에 대충 백정이라는 두 글자를 적어넣은 문지기.

순간, 그는 추이를 향해 고개를 들어보였다.

“백정이라서 그런가······ 피 냄새가 조금 진한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고기 칸에 있다가 나와서 그렇습니다.”

“그러냐? 흠.”

문지기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추이는 마차를 몰아 북문 안으로 들어갔다.

추이가 문지방을 넘는 바로 그 순간.

“어이, 백정. 잠깐만.”

문지기가 다시 추이를 불러세웠다.

추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지기는 품속에 넣은 손을 확 꺼냈다.

팔랑-

수건 한 장이 추이의 손으로 떨어져 내렸다.

문지기가 말했다.

“너 얼굴이 너무 더럽구나. 아무리 잡부라고는 하나, 우리 남궁세가 안에서 그렇게 더러운 얼굴로 돌아다니게 놔둘 수는 없지. 좀 씻으란 얘기야.”

그 말에 추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화르륵!

아궁이에 불이 피어난다.

외부에서 땔감 배달을 온 장칠과 왕팔은 쪼개놓은 장작들을 아궁이 앞으로 나르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역시 남궁세가의 대연회야. 우리가 일년 내내 팔아야 할 땔감들을 하루 만에 다 쓴다니.”

“그 덕에 한몫 단단히 잡았지. 허허허-”

그때, 장칠과 왕팔의 눈이 한 곳으로 향한다.

아궁이 건너편으로 여자 한 명이 걸어가고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일하는 시비였다.

장칠과 왕팔은 시비를 보며 감탄했다.

“남궁세가에 오니 시비들도 다들 엄청 아름답네.”

“맞아. 모든 시비들이 다 키도 크고 얼굴도 예쁘더라. 애초에 남궁세가는 하인들 뽑을 때 외모도 중요하게 본다잖아. 남녀불문하고.”

“우리는 바로 탈락하겠구만 그래.”

“자네는 키가 커서 괜찮을지도 몰라.”

“이 사람아, 얼굴도 본다며.”

“하긴 그렇지.”

장칠과 왕팔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한평생 저런 여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힘들지 않을까? 남궁세가의 시비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잡부들에게 엄청 까칠하게 군다더군. 말도 안 걸고 시선도 안 준대.”

“그럴만도 하지. 다들 저렇게나 예쁜데······”

말 그대로다.

남궁세가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자신들이 일하는 장소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는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래서일까? 어쩌다 이렇게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일꾼들에게 남궁세가의 하인들은 그리 살갑게 대하지 않았다.

까칠하고 도도했으며 어지간해서는 말도 섞으려고 들지 않았다.

이 점은 남자든 여자든 모두 마찬가지.

그래서 장칠과 왕팔은 이렇게 그저 먼 발치에서나마 시비들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남궁세가의 시비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움직이더니 일제히 주방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얘, 들었어? 주방에······”

“어어, 외부에서 들어온 일꾼 말이지?”

“나 방금 살짝 보고 오는 길인데 완전 대박이더라.”

“그 정도야?”

“그래! 나 원래 이런 말 잘 안 하잖아!”

“나도 보러가야겠다 얼른.”

남궁세가의 시비들이 총총걸음으로 주방을 향해 걸어간다.

태도는 한껏 우아하게, 시선 처리는 도도하게, 하지만 절로 빨라지는 발걸음에서는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수건, 물, 월병이나 당과 따위를 치마폭에 싸들고 있었다.

장칠과 왕팔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목을 길게 빼고 주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시비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곳이 보인다.

바로 주방과 도축장이 연결되는 곳이었다.

한 명의 하인이 고기를 짊어지고 와서 내려놓기를 반복한다.

시비들은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 연신 재잘대고 있었다.

“얘. 너 혼자만 일하니?”

“어휴, 그럼 혼자 하지 떼루 일하겠냐 이년아!”

“너한테 안 물었어 이년아!”

“몇 살이니? 어려 보이는데.”

“얘. 그러지 말고, 너 이것 좀 먹어봐라. 월병이야. 여기 당과도 있다.”

“힘들지? 조금 쉬엄쉬엄 해. 여기 물 마시면서.”

“어머, 땀 흘린 것 좀 봐. 이 수건 좀 두를래? 아니다, 내가 좀 닦아줄게!”

시비들이 외부에서 온 한 명의 하인을 둘러싸고 마실 물에, 땀 닦을 수건에, 각종 군것질거리들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본 장칠과 왕팔은 입을 딱 벌렸다.

세상 도도하고 까칠한 남궁세가의 시비들이 대체 무슨 연유로 저 외부 출신 하인을 싸고도는가?

이윽고, 장칠과 왕팔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응, 그렇네. 그럴 수밖에 없네.”

“에잇, 퉤- 더러운 세상.”

시비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하인은 앳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실로 잘 단련된 상체를 드러낸 채 무거운 고기들을 나르고 있었다.

바로 추이 말이다.

“······.”

추이는 인상을 쓴 채 고깃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상의를 탈의한 채, 발골도를 든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고 있으니 저 앞의 시녀들 사이에서 탄성이 흘러나온다.

“얼굴이 무슨 옥을 깎아놓은 것 같애.”

“여기 좀 봐주세요!”

“어느 도축장에서 오셨어요?”

“세상에, 근육 결 사이로 땀 흘러내리는 것 좀 봐.”

“제가 닦아드릴게요! 제 치맛자락 오늘 새벽에 빤 거라 깨끗해요!”

계속해서 시선이 늘어난다.

추이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방해된다.”

“꺄악! 방해된대! 멋있어!”

하지만 시비들의 반응은 어째서인지 더더욱 뜨거워져만 갈 뿐이다.

추이는 아차 싶어 이마를 짚었다.

회귀하기 전, 추이는 수많은 풍파와 아수라장을 겪어왔다.

그 과정에서 자상, 열상, 화상 등등 수많은 흉터들을 얼굴을 비롯한 전신에 입게 되었고, 그 때문에 호예양과 함께 ‘괴물’ 취급을 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회귀한 이후, 추이는 기억도 잘 나지 않았던 청소년 시절의 외모를 회복하게 되었다.

과거로 돌아온 뒤 외모가 바뀐 이는 호예양 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새삼 귀찮군.’

추이는 시비들의 시선을 피해 마차의 짐칸으로 향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나를 고깃덩어리가 보인다.

그것은 커다란 늑대의 시체였다.

이번 남궁세가의 대연회를 장식할 제물.

듣자하니 이 늑대의 피를 구리 쟁반에 받아서 뭔가 신성한 의식을 치를 계획인가 보다.

그때, 추이의 옆에서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장칠과 왕삼이 늑대를 구경하러 오는 길에 늘어놓는 한담이었다.

“이번에 남궁세가 북궁원에서 잡아온 늑대가 그렇게 크다는데, 구경이나 한번 해보세.”

“그게 이번 삽혈맹세 때 쓰일 제물인가 보지?”

“삽혈맹세가 뭐였지?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 왜, 초청객들 한데 쭉 모아놓고 하는 거. 동맹의식을 다지는 거랬던가?”

“아하, 그거 알지. 작년에도 참 웅장하게 했었는데. 이번에는 제물의 피를 빼는 걸 누가 하려나?”

“성검을 쥐고 해야 하는 일이니까, 아무래도 남궁세가에서도 지체 높은 사람이 하겠지. 작년에는 가주가 직접 했다더만.”

“그러면은 이번에는 그분께서 하겠네. 검화 소저 말이야.”

“아아, 남궁율 소저 말이지? 이번에 등천학관에서 돌아오셨다더만. 방학이라고.”

장칠과 왕팔은 저희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마차로 다가갔다.

그때.

“응?”

둘은 의아한 표정으로 마차의 짐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그것을 날라야 할 추이는 간 곳이 없는 상태였다.

장칠과 왕팔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다. 방금 전까지 여기 사람 하나가 있지 않았던가?”

“맞아. 고기 나르던 잡부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온다.남궁세가의 무인 하나가 장칠과 왕팔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빨리 제물을 옮기지 않고!”

“네? 저, 저희는 도축장에서 온 일꾼들이 아닌데요?”

“그게 뭐가 중요해! 지금 다들 바쁜 거 안 보여? 빨리 저걸 제단에 올려놔!”

그 말을 들은 장칠과 왕팔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년치 매상을 하루 만에 올려 준 거래처의 명령이니 어쩌겠는가?

결국, 장칠과 왕팔은 늑대의 시체를 들고 제단으로 옮겨야 했다.

늑대는 네 다리가 모두 검은 장대에 묶여 있어서 장대를 들어 옮기기만 하면 되었으나, 문제는 바로 무게였다.

“어우, 뭐가 이렇게 무거워 이거?”

“큰 늑대라서 그런가, 무지하게 무겁구만.”

“보이는 것보다 더 무거운 것 같으이. 늑대가 새끼라도 배었는가? 배도 조금 불룩한 것 같고.”

“이 시커먼 장대만 해도 무게가 상당한 것 같은데······ 이거 아무래도 일꾼들이 더 필요하겠어.”

결국 장칠과 왕팔은 자기들과 함께 온 다른 일꾼들까지 불러서 함께 늑대를 옮겼다.

무려 장정 여섯이 끙끙대며 달라붙어서야 늑대를 높은 제단의 꼭대기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이윽고, 잡부들은 대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모두 퇴장했다.

······이제는 진짜 주인공들이 무대 위로 올라올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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