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혈채(血債) (3)
21-
남궁세가에서 개최되는 대연회의 날.
초청장을 받은 호정문 역시도 참석을 위해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선물을 실은 마차 두 대와 사람을 실은 마차 한 대,
방문 인원은 호연암, 호예양, 그리고 주예화 표두를 비롯한 일급표사 일곱, 이렇게 총 아홉 명이었다.
전문 마부가 두 사람이 붙었고 그 밑에서 마부의 시중을 드는 마굿간지기 소년들도 넷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 얼굴들 가운데 추이는 보이지 않았다.
이른 새벽부터 배가 아프다며 뒷간에 가 있었던 추이.
“······.”
추이는 지붕 위에서 호예양이 탄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보고 난 뒤에야 담벼락을 타 넘었다.
텅 비어 한산해진 호정문을 뒤로한 채, 추이는 한발 먼저 산을 타 넘어 남궁세가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따로 행동할 차례였다.
* * *
남궁세가 근처의 한 도축장.
수많은 백정들이 분주하게 일하는 가운데.
“빨리빨리 날라라, 이 게으른 백정 놈들아!”
허리에 칼을 찬 무사 하나가 거만한 태도로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가우현.
남궁세가 소속의 하급무사였다.
“대 남궁세가의 연회에 쓰일 쇠고기들이다! 그 고기들 값이 네놈들 살에서 베어낸 고깃값보다도 비싸니 조심조심 날라! 그리고 상하기 전에 얼른 마차에 실어놓으란 말이다!”
채찍질만 안 했지 흡사 노예를 대하는 듯한 태도다.
백정들은 가우현의 눈치를 보며 커다란 고깃덩어리들을 날랐고 그것들을 마차 뒷공간의 천장에 갈고리로 걸어 하나하나 매달아 놓았다.
“항상 늘처분하게 있다가 호통칠 때만 일하는 척하지. 천성부터가 천한 놈들 같으니······”
가우현은 백정들을 향해 짙은 혐오를 드러냈다.
그는 남궁씨가 아닌 외부인 출신으로, 한때 무림을 떠돌던 낭인이었다가 남궁세가에 특채된 인물이었다.
가우현은 자신이 남궁세가에서 일할 수 있게 된 것을 평생의 업적으로 삼을 만큼 자부심이 대단했다.
칼밥 먹고 사는 모든 이들이 부러워하고 선망하는 집단.
그것이 남궁세가가 아닌가.
그래서 가우현은 남궁세가 밖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을 제 눈 밑으로 깔아보았고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타고나길 똑똑했고, 또 그것에만 기대지 않고 부단하게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올라 온 반면, 다른 이들은 게으르고 멍청하고 무능해서 늘 밑바닥 인생 그대로이니까.
그래서 가우현은 눈앞에 있는 백정들에게 자신의 혐오감을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어이! 거기 얼빠진 놈! 뭘 머뭇거리고 있나! 곧 연회가 시작되니 빨리 고기를 나르란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이게 너무 무거워서······”
가우현의 짜증에 백정들이 쩔쩔맨다.
“뭔데 그래?”
가우현은 도축장 안쪽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백정들의 너머에 걸려있는 커다란 동물 사체가 보인다.
늑대. 호랑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거대한 늑대 한 마리가 도살장의 바닥에 죽어있었다.
그 옆에는 새끼가 분명한 작은 늑대 하나가 함께 죽어있는 것이 보인다.
“음. 삽혈맹세(歃血盟誓)에 쓸 제물이로군. 이건 피를 빼지 말고 죽고 난 직후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관리했겠지?”
“아무렴요. 대남궁세가의 북궁원에서 직접 맡겨주신 일인걸요. 각별히 신경썼습죠.”
“알겠으니까 어서 마차에 가져다 실어라. 시간이 없다 하지 않느냐!”
가우현의 신경질은 계속해서 심해진다.
백정들은 서둘러 그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리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저 미친 새끼. 저러다 또 칼 뽑는 거 아냐?”
“예전에 춘식이가 저 새끼 말 씹었다가 손가락이 잘렸잖아.”
“망나니 새끼인 건 여전하구만. 애미애비도 없는 호로새끼, 에잇 퉤!”
“하여간 남궁세가 북궁원 소속 칼잡이들은 하나같이들 다 제정신이 아니야.”
그때, 가우현이 한 백정을 향해 손짓했다.
“······어이, 너.”
자기보다 족히 스무 살은 더 많아 보이는 백정을 향해 가우현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저기 있는 늑대는 뭐냐?”
“예? 아아, 저것은 새끼 늑대입니다. 이 커다란 녀석의 새끼인 것 같은데······ 들어올 때 함께 들어왔습죠.”
“저것도 같이 실어라.”
“알겠습니다.”
백정은 옆을 향해 눈짓했다.
그러자 백정의 아들로 보이는 작은 키의 소년이 후다닥 달려가 새끼 늑대의 시체를 짊어졌다.
그때.
“어엇!?”
새끼 늑대가 무거웠음일까?
백정의 아들은 그만 발을 헛디뎠고 가만히 서 있던 가우현의 도포 자락에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순간, 가우현의 표정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진다.
“이런 망할 종자가, 어딜 감히 내 도포에 짐승 비린내를 묻혀!?”
소년이 사과를 할 틈도 없이 가우현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뻐-억!
가우현의 발에 걷어차인 소년이 저 멀리 날아가 뒹굴었다.
이빨이 몇 개 부러진 채 기절해 버린 소년.
그러자 아비로 보이는 백정이 소년을 안아들고 경악한다.
“아. 아이고 나으리! 아직 어린 애입니다요!”
“그래서? 꼽나?”
가우현은 피식 웃으며 백정 부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파르르 떨리는 백정의 주먹을 향해 노골적으로 코웃음쳤다.
“오? 때리려고? 역시 무식한 백정 놈답구나. 어디 해 보거라. 어떻게 되나. 하하하-”
비록 남궁세가의 정문을 지킬 뿐인 삼류무인이지만 무공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신이나 다름없다.
“해 보라고 이 새끼야. 지 새끼 걷어찬 놈을 그냥 보고만 있으려고? 으응?”
가우현은 칼집에 든 칼로 백정의 가슴팍을 쿡쿡 찌르며 빈정거렸다.
바로 그때.
“나으리. 고기 다 실었습니다요.”
옆에 있던 늙은 백정 하나가 눈치를 보며 보고했다.
그러자 비로소 가우현은 고개를 돌렸다.
“어디 살점 좀 잘라서 빼돌렸거나, 그런 건 없겠지?”
“아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런······”
“만약 그런 부분이 발각될 시에는 알지? 네놈들 살점을 두 배로 잘라낼 것이다. 알겠느냐?”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백정들은 쩔쩔매며 고개를 숙인다.
가우현은 그제야 헛기침을 하며 도축장을 나왔다.
그는 마차 옆에 공손히 시립해 선 늙은 백정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현장에 나와서 이렇게 지랄을 떠는 이유는, 이렇게 해야 자네들이 조금이라도 일을 빨리 하기 때문일세. 나를 빨리 보내려면 일도 빨리 끝내야 할 것이 아닌가. 자네도 이해하지?”
“그럼요, 나으리. 저희는 욕을 먹어도 쌉니다요.”
“그래, 그래. 노야는 주제파악을 잘 해서 마음에 들어. 그럼, 내 이만 감세?”
가우현은 늙은 백정의 뺨을 몇 번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윽고, 고기를 가득 실은 마차가 움직인다.
곧 큰 연회가 벌어질 남궁세가를 향하여.
* * *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마차가 산길을 달리며 위아래로 움직인다.
가우현은 말을 몰며 하품을 하고 있었다.
“참, 내 짬에 고기 배달이라니. 마부 하나 없이 이게 뭔 처지냐. 후우······”
대연회 때는 항상 일손이 모자란다.
평소에는 문만 지키면 되었지만 이렇게 분주할 때에는 가끔씩 잡무도 맡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가우현은 따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에게 채찍을 날렸다.
빨리 세가로 복귀해야 잔칫상 말석에라도 끼어서 술맛을 볼 수 있을테니 말이다.
바로 그때.
그극-
마차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그냥 한번 나고 마는 소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극- 그극-
이상한 소리는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가 벽을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음이었다.
그극- 그극- 그극-
결국 가우현은 마차를 인적 드문 산길 가운데에 세웠다.
“뭐야? 안에 들개라도 들어갔나?”
가우현은 짜증을 내며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마차 뒤로 돌아가 뒷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 보았다.
마차 안은 넓고 어둡다.
정육된 고깃덩어리들이 갈고리에 꿰여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그 사이로는 차가운 냉기가 흐른다.
“보자. 들개가 어디에 있나?”
가우현은 천장에 매달려 있는 고기들을 치우며 마차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때.
바스락-
저 안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우현은 옳거니 싶어 외쳤다.
“찾았다, 이 개새끼!”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차르륵!
가우현의 목에 철사줄 올가미 하나가 걸렸다.
“커헉!?”
갑자기 위로 확 딸려 올라가는 올가미에 가우현은 들이마시다 끊긴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꽈아아악······
철사가 목의 살갗을 사납게 파고든다.
위의 쇠기둥에 감긴 올가미는 가우현의 목을 단단히 조임과 동시에 그를 위로 끌고 올라갔다.
이윽고, 주렁주렁 매달린 고깃덩어리들 사이로 무언가가 걸어나왔다.
“개는 너야.”
붉은 눈동자 한 쌍이 가우현의 앞으로 드리워진다.
추이. 그가 가우현의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컥! 케흑! 끄흑!”
가우현은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올가미는 더더욱 꽉 조여들 뿐이었다.
추이는 올가미의 반대쪽 철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그것을 당겼다.
붉은 내공이 흐르는 올가미가 한계까지 조여들었다.
혀를 빼물고 바들바들 떠는 가우현에게 추이가 말했다.
“남궁세가의 장원 내부 구조가 궁금한데.”
동시에, 올가미가 아주 살짝 느슨해졌다.
이윽고 가우현이 입을 열었다.
“좆······ 까 씨발아······ 내가 말할 거 같냐?”
그러자 추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돼.”
“······?”
가우현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 또다시 올가미가 콱 조여들었다.
버둥버둥-
가우현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발버둥친다.
잠깐이나마 맛봤던 공기의 달콤함을 순식간에 다시 박탈당해 버렸으니 당연한 일이다.
‘말할게! 말할게요!’
숨길 수 없는 후회의 빛이 눈빛에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지만······ 이미 늦었다.
“산 놈보다는 죽은 놈이 더 정직한 법이지.”
추이는 이미 가우현을 창귀로 만들어 부리기로 결정한 참이었으니까.
이윽고.
···우드득! 뚝!
철사줄에 감긴 가우현의 목이 외로 꺾였다.
이로써 마차의 짐칸에 걸린 고깃덩어리가 하나 늘어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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