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20화 (15/110)

20-혈채(血債) (2)

20-

호정문주 호연암. 그는 아내인 사지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초청장을 보내왔소. 올해는 대연회를 조금 일찍 연다는군.”

“대연회요? 안휘성 내의 정도 문파나 세가들을 모두 모으는? 그 초청장을 왜 우리에게 보냈을까요?”

사지원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그도 그럴것이, 남궁세가의 초청장은 각 현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하나의 문파나 세가에만 보내진다.

지금껏 고래현의 대표는 언제나 조가장이었기에 호정문은 한 번도 남궁세가의 초청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

호연암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 조가장이 사라졌잖소. 우리가 그 대신인 셈이지.”

“······눈초리가 곱지는 않겠군요.”

사지원이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조가장은 남궁세가의 먼 친척 뻘 되는 가문이었다.

남궁세가의 원로 하나가 조가장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 역시도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조가장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해 사라져 버렸으니 어부지리 격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호정문의 입장이 사뭇 난처해졌다.

호연암은 한숨을 내쉬었다.

“눈초리가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오. 혹시 우리가 조가장의 멸문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눈에 불을 켜고 조사할 거요.”

“우리는 결백하잖아요.”

“모르지. 없던 증거도 만들어 뒤집어씌울지. 부인도 아시지 않소. 무림에서는 오로지 힘의 논리 뿐이오. 약하면 억울해도 당할 수밖에 없지.”

호연암은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자신이 약해서 벌어진 일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지원은 그런 호연암의 손을 잡아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같은 정도 소속끼리 그렇게까지 할라고요.”

“강자들이 약자들에게 가혹하게 구는 것은 고의가 아니오. 강자들에게는 그저 무심코 움직인 작은 몸짓에 불과하나 약자들에게는 그것이 태풍이 되는 것이지.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하지 않소. 내겐 남궁세가가 그만큼이나 크게 보이는구려.”

“제 생각에는······ 남궁세가가 안휘성 내의 혈사 이후 뒤숭숭해진 분위기를 가라앉히려고 대연회를 개최하는 것 같아요. 호정문 말고도 다른 현의 모든 문파와 세가들이 다 초청장을 받았잖아요. 그러니 별일 없을 거예요. 오히려 남궁세가에 잘 보여서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사지원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조가장은 말할 것도 없고, 흑도방 역시도 사파에 속하는 문파이기는 했으나 꽤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조직이 하루아침에 연달아 궤멸당했으니 안휘성의 패자인 남궁세가의 입장에서는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한번 꽉 잡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지원은 계속해서 호연암을 달랬다.

“그리고 그 소문 들었어요?”

“무엇 말이오?”

“그, 예전에 등천학관으로 유학 갔던 남궁세가의 금지옥엽 있잖아요. 검화(劍華)라고 불린다는.”

“아, 남궁율 소저. 그렇지. 남궁 소저가 등천학관에 입학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군.”

“네네. 그 남궁 소저가 이번에 방학을 맞아서 남궁세가로 돌아왔다고 하더라구요.”

사지원은 옅은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규방의 부인들 사이에서는······ 이번 남궁세가의 대연회는 가주의 딸자랑이 목적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하더라구요. 무려 등천학관 재학생인 딸이 방학을 맞아서 세가로 귀환했으니 이번 기회에 다른 사람들에게 쭉 얼굴도 익히게 하고, 자랑도 하고, 뭐 그런 게 아니냐는······”

“허허허- 차라리 그런 귀여운 목적이라면 좋겠군. 딸자식 자랑쯤이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

호연암은 비로소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그의 속마음은 여전히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구파일방 오대세가.

정도십오주(定道十五柱).

정도를 떠받치고 있는 열다섯 개의 기둥.

남궁세가는 무려 그 중 하나다.

멸문당한 조가장은 남궁세가의 먼 방계혈족 뻘이었고, 그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에 대한 반사이익을 누리는 쪽이 바로 호정문이다.

아마도 분명 무언가 압력이 들어올 것임에 분명했다.

호연암은 말했다.

“가서 우리의 결백을 소상히 밝혀야지. 그리고 사도련과 있었던 일도 보고해야겠군. 곤귀 건 말이오.”

“네. 그러시는 게 좋겠어요.”

사지원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그들의 대화 주제는 남궁세가로 복귀했다는 검화 남궁율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남궁 소저가 이번 대연회의 주인공이 되겠군.”

“그럼요. 등천학관에 아무나 들어가나요. 정도십오주에 속하는 곳에서도 난다긴다 하는 기재들이 입학하는 곳인데. 거기에 집안까지 남궁세가니 단연코 안휘성의 일등신붓감이지요. 벌써부터 들어오는 혼담 행렬만 해도 안휘성 몇 바퀴를 빙빙 두른다나요.”

“등천학관이라······ 거기는 등록금과 수업료가 어마어마하다지? 한 생도의 입학부터 졸업까지, 어지간한 중소문파의 사 년치 운영비가 든다고 들었는데.”

“그런 딸자식을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 얼마나 자랑하고 싶을까요 글쎄.”

사지원의 말을 들은 호연암이 문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 예양이도 사실 남궁 소저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는데······”

“여보. 그런 말씀은 왜 하세요.”

“그냥 그렇잖소. 예양이가 남궁 소저에게 외모가 밀려? 재능이 밀려? 성품이 밀려? 딱 하나 밀리는 게 있다면 못난 부모 만났다는 것뿐이지. 더 늦기 전에 밀어주어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당장 호정문을 운영할 자금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호연암도 사지원도 말이 없어졌다.

자식에게 풍족한 지원을 해주지 못하는 부모의 심경은 늘 이런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쾅!

내실의 문이 열렸다.

호예양이 상기된 얼굴로 뛰어들어왔다.

“엄마! 아빠!”

늘 점잖던 호칭도 철없던 말괄량이 때처럼 변했다.

호연암은 언제 한숨을 내쉬었냐는 듯 너털웃음을 지으며 딸을 맞이했다.

“오냐, 우리 딸. 아버님이 아니라 아빠라고 하니까 더 좋구나. 앞으로는 그렇게 좀 불러라.”

“아빠! 아니, 아버님! 지금 그런 얘기 할 때가 아니에요!”

호예양은 부모의 앞으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무림맹(武林盟)-등천학관(登天學館)/합격통지서>

그것을 본 호연암과 사지원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이게 뭐냐? 너 언제 등천학관에서 입학 시험을 쳤어?”

“세상에! 이것 좀 봐요! 지, 덕, 체 모든 시험에서 만점이에요! 우, 우리 딸이 수, 수, 수석이래!”

부부가 쌍으로 놀라 소리를 쳤다.

그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들의 딸을 붙잡고 질문을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 녀석아! 이 통지표를 왜 이렇게 구겨놨어! 가보로 대대손손 물려줘야 할 것을!”

“경사났네, 경사났어! 우리도 대연회를 열어야겠다!”

그때, 호예양이 입을 열었다.

“참. 어머님, 아버님. 등록금은······”

등록금 이야기가 나오자 호연암이 바로 호예양의 말을 끊었다.

“너는 그따위 것 아무 걱정도 말거라! 내 이놈의 문파 기둥뿌리를 죄다 뽑아 팔고, 같이 딸려나온 두더지들까지 싹 다 한약방에 넘겨서라도 돈 마련해 놓을 테니까!”

“어휴, 두더지는 뭔놈의 두더지예요! 하여간 이이는 과장해서 말하는 것 하나는 선수라니까. 딸램~ 엄마가 비상금 꼬불쳐 놓은 것 있단다. 그거면 호정문에 아무런 지장도 없어. 너는 아무 걱정 말고 공부만 해.”

호연암과 사지원은 어떻게 해서든 호예양을 안심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있던 일말의 부담감마저 싹 다 날아가는 일이 벌어졌다.

···쩔그렁!

호예양이 돈자루를 내려놓은 것이다.

곤귀에게 빼앗겼던 호질표국의 대금보다도 훨씬 더 많은 액수의 금원보들이 탁자 위로 쏟아졌다.

기절할 듯 놀라는 호연암과 사지원을 보며, 호예양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제는 아무 걱정 마세요! 돈 다 찾아왔으니까!”

*       *       *

다음날 오전.

호예양은 말을 타고 호숫가 근처로 산책을 나왔다.

그 옆에는 추이가 쑥불을 피워 벌레들을 쫓고 있었다.

호예양은 추이를 보며 말했다.

“복덩아.”

“······.”

그녀는 장난삼아 추이를 복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추이가 온 뒤부터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이다.

호예양은 추이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요즘 너 잘 안 보이더라? 어딜 그렇게 밖에 돌아다녀. 응?”

“······.”

추이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입을 굳게 다물고 상념에 빠져 있을 뿐이다.

“이게!”

호예양은 주먹을 들어 장난스러운 태도로 추이에게 꿀밤을 먹였다.

그러자 비로소 추이가 고개를 든다.

호예양이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그냥. 이런저런.”

추이는 서툴게도 둘러댔다.

어찌 생각하고 있던 바를 솔직하게 말하겠는가.

남궁세가에 난입해서 피칠갑 깽판을 놓을 계획이라고 말이다.

추이는 과거의 일을 회상했다.

그 당시 호예양의 입에서 나왔던 이름.

‘······남궁세가의 원로 하나가 조가장과 흑도방의 결탁, 그로 인해 억울하게 몰락한 호정문의 사건을 덮어버렸었지.’

남궁세가는 암묵적으로 안휘성 내의 자치권을 인정받고 있는 초거대세력이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작은 군소 문파나 세가들의 다툼에 개입하여 치안을 유지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남궁세가 내부에도 부패한 세력들은 있는 법.

하위 세력들의 패권다툼에서 벌어지는 더럽고 추악한 음모들을 눈감아 주고, 그 대가로 뒷돈을 받아 챙기는 고위직들의 존재를 추이는 알고 있었다.

호예양의 살생부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던 원로급 거물.

또한 전생의 자신에게 칼을 꽂아 넣었던 수많은 추격자들 중의 하나.

추이는 바로 그놈의 얼굴을 떠올리며 차갑고 날카로운 복수를 계획하는 것이다.

그때, 호예양이 또다시 추이의 상념을 깼다.

“요즘도 애들이 많이 괴롭히니?”

그녀는 추이의 침묵을 조금 오해한 모양이다.

추이가 말이 없자, 호예양은 안되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경고만 해서는 의미가 없구나. 안 되겠다.”

“······.”

“추이. 너 누나랑 같이 떠날래?”

“······?”

호예양의 말에 추이가 한쪽 눈썹을 까닥 움직였다.

그러자 호예양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누나가 말이야. 이번에 등천학관에 입학하게 되었거든.”

“······.”

그 말을 들은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의 호예양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등천학관의 입학 시험을 봐서 수석을 했다고, 천하 최고의 후기지수들이 다니는 그곳에 자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하지만 돈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만약 그곳에 입학했다면 자신의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그랬던 호예양이 지금 밝게 웃으며 그 말을 하고 있다.

이번 생에는 그녀의 꿈이 꺾이지 않을 것이라 추이는 생각했다.

“추이, 너를 쭉 지켜봤는데. 과묵하고 성실하고, 또 재주가 참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너만 괜찮다면 나랑 같이 무림맹에 가자. 등천학관 입학생은 개인 생활을 보조해줄 보조자들을 몇 명 데려갈 수 있대. 그들의 급료나 생활 전반은 등천학관에서도 절반씩 부담해 준다고 하더라고.”

사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하인으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실로 황송하기까지 한 제안이다.

무림맹 산하 등천학관이라는 공공기관의 정규직 사용인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입신양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거기에 생활의 질도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고, 따로 급료까지 준다니.

호예양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꼭 등천학관에 입학할 거야. 가서 다른 쟁쟁한 정도십오주의 후기지수들이랑 당당하게 경쟁할 거야. 그리고 식견을 넓히고 인맥을 쌓아서 호정문으로 돌아올 거야. 무림맹에 남아서 계속 근무할 수도 있다고는 하는데······ 나는 그래도 아버님, 어머님이 계시는 집으로 돌아오고 싶어. 그래서 우리 가문을 크게 키우고 싶어.”

그녀의 포부는 당차다.

창해의 수평선 너머로 막 떠오르는 태양처럼, 비록 아직은 어스름하나 곧 밝게 빛나 천지를 비출 것이다.

그리고 추이는 그림자처럼, 노을 뒤에서 그것을 묵묵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그 뒤부터는 알아서 잘 해나갈 수 있겠지.’

앞으로 펼쳐질 남궁세가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호예양이 물었다.

“나랑 같이 가줄 거지?”

“상황이 여의하면.”

“뭐야~ 튕기긴!”

호예양이 섭섭하다는 듯 눈을 흘긴다.

그녀는 일 잘하는 추이를 꼭 데려가고 싶은 듯 말을 이었다.

“그럼 일단 가는 걸로 생각할게. 무림맹까지는 먼 길이 될 테니 미리 정리할 것들 있으면 정리해 놔. 뭐 누구한테 돈 빌려주고 그런 건 없지?”

“빚 받을 게 좀 있다.”

“뭐? 빚이 있어? 그럼 다 정리해야지. 받아낼 건 다 받아내!”

호예양의 장난기 어린 말에 추이는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빚은 받아내야 한다.

동전 한 닢, 피 한 방울까지, 싹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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