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혈채(血債) (1)
19-혈채(血債) (1)
추이는 빗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피비린내는 어느정도 씻겨 내려갔지만 여전히 몸 상태는 처참했다.
담벼락을 넘어온 추이는 다리의 고통을 억누르고 마굿간으로 걸어갔다.
삐걱······
마굿간의 문이 열리자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추이야아아아-!”
우동원. 그가 추이를 향해 소리를 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추이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냥 죽일까?’
지금은 몸 상태가 너무 나빠서 적당히 봐줄 수가 없다.
또 시비를 걸어온다면 살수를 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야야야! 너 어디 갔었냐! 너 줄라고 챙겨왔던 떡이랑 고기 다 식었······ 어? 너, 너 몸이 왜 이래!?”
우동원은 비틀거리고 있는 추이의 몸을 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윽고, 그는 뒤에 있던 마굿간지기 소년들을 향해 소리쳤다.
“야! 뭐 차라도 좀 끓여 와! 찬 물수건도 좀 가져오고! 애 몸이 펄펄 끓는다! 약 가진 놈 있냐!?”
갑자기 이상하리만치 친절해진 우동원을 보며 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우동원이 추이에게 어깨동무를 걸며 말했다.
“너 어디 밖에 싸돌아다니다가 맞고 돌아왔구나? 그치. 그 맘 안다. 역시 세상은 무섭지? 호정문이 최고지? 잘 돌아왔어. 그동안 괴롭혀서 미안했다. 그것 때문에 도망갔던 거라면 이제 그런 일 절대 없을 거야. 네가 내 목숨 구해줬잖냐. 나도 은혜를 아는 놈이다. 앞으로 너 마굿간 생활 쫙 편 줄 알아!”
추이는 우동원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동원과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따듯한 차를 내오고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는 동시에 푹신한 침상까지 양보해 주는 것은 꽤 마음에 들었다.
푹-
추이는 바싹 마른 침상 위에 누웠다.
건조한 짚더미를 엮어 만든 침상에 푹신한 이불을 깔고 누우니 마치 깊은 강물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옆에서 우동원이 추이의 몸상태를 보며 분노를 터트렸다.
“아이구, 아주 호되게 당했네! 온몸의 뼈가 다 부러졌어! 누가 이래놨냐? 저 아랫마을 삼구 패거리냐? 아니면 윗고을 칠득이파? 어떤 새끼들이 우리 막내를 이 꼴로 만들어놨어!? 당장 전쟁이다!”
“조용히 하고. 끓인 물이나 이리 가져와 봐라.”
“어! 그렇게 할게! 근데 이 새끼······ 말이 여전히 좀 짧네? 에이- 뭐 그래! 싸나이가 일관성이 있어야지! 오히려 좋다!”
우동원은 추이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리고는 추이가 부탁한 끓는 물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
그동안 추이는 눈을 감고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굴각의 10층계.
이제 눈앞에는 그 다음 경지인 이올로 넘어가는 문이 놓여있다.
이 문을 열기 위해서는 임독양맥을 뚫고 몇몇 특별한 혈자리를 통해 체내의 피 절반 이상을 빼내야 한다.
‘곤귀와 싸우면서 혈자리는 충분히 타통되었고. 피는 과하게 뺀 감이 있군.’
추이는 곤귀를 철저하게도 이용해 먹었다.
자신의 내공이 닿지 않는 혈자리를 곤귀의 손속을 이용하여 뚫었고 해묵은 피는 전투를 치르며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물론 정상인이라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위험천만한 방법이었지만, 추이는 괴물같은 마공과 가공할 수준의 정신력으로 그것을 뚫어낸 것이다.
‘몇 가지 필수적인 영약은 곤귀의 창귀로 대체한다.’
추이는 단전 속의 심상세계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칠흑의 무저갱 깊숙한 곳에 고여있는 피의 못.
수많은 창귀들이 피눈물을 흘려 만든 붉은 늪 한가운데에 새로운 창귀 하나가 들어앉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 피 연못 중심부의 주인이었던 조양자를 밀어내고 새롭게 그 자리를 차지한 창귀.
곤귀 구강룡. 그가 유령처럼 가만히 서서 추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꾸깃!
추이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자 피 연못 중심부에 도사리고 있던 곤귀의 망령이 찌그러들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것은 무시무시한 단말마를 토해내며 괴로워했다.
그러자 쩍 벌어진 곤귀의 눈, 코, 입, 귀를 포함한 칠공 전체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 피는 곧바로 혈관 곳곳을 흐르는 내공이 되어 추이의 뼈와 살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추이가 끊어졌던 혈관 한 가닥 한 가닥을 다시 맞춰서 촘촘하게 잇고 있을 무렵, 우동원이 돌아왔다.
“추이야. 여기 더운 물. 이걸로 몸을 좀 씻자. 아직 몸이 불편할테니 내가 씻겨 주마.”
생각보다 곰살맞은 놈이었다.
남이라고 생각될 때에는 몹시 짜증스럽게 굴되, 일단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이게 되자 대우가 그야말로 천지차이다.
추이는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회귀한 이래 가장 많은 말을 하게 만드는 놈이 바로 이놈이 아닐까 싶었다.
“됐고, 주 표두한테 가서 내가 말하는 약재를 좀 얻어와라.”
“어어. 또 뭐 필요해?”
“복령(茯苓), 혈갈(血竭), 시체(柿蒂), 호로파(胡蘆巴), 아마인(亞麻仁), 필징가(蓽澄茄), 용안육(龍眼肉)······”
자잘한 것부터 귀중한 것까지.
추이는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가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홍공이 구해오라고 시켰던 것들.
추이와 호예양이 발가죽이 벗겨져 피가 나도록 찾으러 다녔던 약재들이었다.
“옥죽(玉竹), 학슬(鶴虱), 천년건(千年健), 옥촉서예(玉蜀黍蘂), 곡기생(槲寄生), 포공영(蒲公英), 남방토사자(南方菟絲子), 일천궁(日川芎), 토천궁(土川芎), 나복자(蘿蔔子)······”
창귀칭의 내력을 몸에 더더욱 잘 스며들게끔 만드는 성질의 한약재들이 줄줄이 열거된다.
말하자면 고기를 양념에 재울 때 연육작용을 일으키기 위한 보조 재료들이다.
그때, 우동원이 당황하여 외쳤다.
“자, 잠깐 너무 많아! 그것들을 당장 다 어디서 구해와!?”
“말했잖나. 주 표두에게 가서 얻어오라고.”
“주 표두가 누군데?”
우동원이 고개를 갸웃한다.
추이가 주예화 표두를 지칭하고 있다고는 상상조차 못하는 모습.
추이가 입을 열었다.
“호질표국의 주예화 표두 말이다.”
“아. 주예화 표두. 호질표국의. 아아아. 아아. 아?”
이윽고, 우동원은 펄쩍 뛴다.
“미친놈아! 주, 주, 주 표두님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면 어떡해! 그분은 우리 마굿간지기들이 감히 눈도 못 마주치는 분이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분께 가서 약재를 달라고 하겠어!”
“내 부탁이라고 해. 그럼 줄 거다.”
“말이 되냐 인마! 어휴, 이 자식 이거. 한 대 때릴 수도 없고.”
우동원은 손을 올리려다가 말고 끙끙 소리를 냈다.
하지만 추이는 일관성 있게 같은 주장을 한다.
“내가 보냈다고 하면 내줄 것이다. 어서 가서 받아오기나 해.”
“어휴 진짜······”
우동원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윽고, 추이가 말하는 약재들을 모두 받아적은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구명지은을 베푼 은인의 부탁인데. 까짓거 가서 미친놈 소리 한번 듣고 오지 뭐.”
우동원은 침실과 연결된 마굿간 뒤쪽 후문으로 나섰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추이에게 말했다.
“가서 뭐라고 하라고?”
추이는 대답했다.
“쟁자수가 보냈다고 해. 그럼 알아들을 거다.”
“······차라리 그냥 마굿간지기가 보냈다고 하는 게 낫겠다.”
쟁자수가 표두에게 가서 이것저것 뭘 달라고 하는 상황이라니.
우동원으로서는 더더욱 기가 찰 노릇이었다.
* * *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추이가 말했던 모든 약재들이 대령되었다.
주예화 표두는 우동원을 끌고 약재실로 가 상비되어 있는 약재를 모조리 긁어모아 안겨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우동원에게, 주예화 표두는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분은 어떤 분이시니?’
우동원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제가 예뻐하고 있는 따까리인데요. 왜 그러십니까?’
그 말을 들은 주예화 표두는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아니다. 뭔가 의중이 있으실 게야. 때가 되면 어련히 말씀하시겠지. 가 봐라. 이후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나에게 오고.’
우동원은 당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갸웃하며 약재들을 들고 와 추이에게 건네주었다.
놀랍게도, 그때쯤 추이는 이미 몸을 일으켜 멀쩡하게 걸어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추이는 우동원을 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내가 나올 때까지 이 방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주 표두에게 말하고.”
“추, 추이 너······ 대체 뭐 하는 놈이니?”
우동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추이는 가뿐하게 대답을 씹어주었다.
이윽고.
추이는 방문을 닫고 침상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츠츠츠츠츠츠츠······
전신에서 검붉은 마기가 끓어오른다.
이 기운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마공과도 다른 이질적인 기운.
심지어, 굴각의 단계를 넘어 이올의 경지로 올라가기만 해도 창귀칭의 기운은 기존의 것과도 전혀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때쯤 되면 추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것이 마공인지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니. 홍공, 그는 내 무공의 정체를 알아보겠지. 그가 바로 창귀칭의 창시자이니.’
문득, 추이의 생각은 사부였던 홍공에게로 향했다.
그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마 한창 무림맹과 사도련에게 쫓겨다니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직 천마신교(天魔神敎)의 위대한 우신장차사(右神將差使)로서 군림하고 있을까?
추이의 머릿속 기억들이 어지러이 뒤섞인다.
······비 오는 밤의 전장.
······피와 살점이 난무하던 참호전.
······반신불수가 되어 죽어가고 있던 홍공.
······숯불로 얼굴과 가슴을 지지고 그것을 삼켜 목소리까지 바꿨던 호예양.
피로 물든 계단을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눈앞에 떠오르는 장면들이 바뀐다.
이윽고. 추이는 거대한 문 앞에 섰다.
피와 힘줄, 뼈, 내장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문.
이 문 너머에는 더 높은 곳으로 통하는 계단들이 존재한다.
지금까지 올라왔던 계단들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크고 높은 계단들이.
하지만 이미 그 계단들을 모두 올라봤던 추이는 안다.
지금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끼-기기기기기긱······
추이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층계들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때.
‘가는 거야?’
뒤에서 듣기 싫은,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철판을 긁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추이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과거, 기억 속의 호예양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일그러진 얼굴과 불타버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는구나.’
추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호예양이 웃었다.
일그러진 얼굴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와 오랜 시간을 함께한 추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잘 가.’
호예양이 말했다.
추이도 말했다.
‘잘 있어.’
입은 뻐끔거렸지만 목소리는 끝끝내 나오지 않았다.
이윽고, 추이가 이올의 문턱을 넘어 첫 번째 층계를 밟는 순간.
···번쩍!
눈이 떠졌다.
추이는 상체를 일으켰다.
검은색 땀이 침상을 완전히 푹 적셔놓았다.
땀에서는 지독한 오물 냄새와 함께, 여러 가지 한약재들을 한데 섞어 달인 냄새가 났다.
“······.”
추이는 자신의 몸을 확인해보았다.
키가 커졌고 뼈도 굵어졌다.
원래도 흰 빛깔이었던 피부는 더더욱 희게 변했고 몸 곳곳에는 잔근육들이 꽉꽉 들어차게 되었다.
이올(彛兀)의 제 1층계.
이곳에 발을 올려놓음으로써 일류(一流)와 절정(絶頂) 사이 어딘가에 있었던 추이의 경지는 완숙한 절정의 단계에 이르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준비되었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펑!
추이는 침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다음 차례인가.”
몸이 회복되었고 무공의 경지도 높아졌으니 이제 또 일하러 나갈 시간이다.
“진짜배기들만 남았군.”
흑도방, 조가장에 이은 세 번째 복수 상대.
추이는 그들의 면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마굿간의 문을 박찼다.
안휘성의 패자.
오대세가의 정점.
정도십오주(定道十五柱)의 한 축.
바로 남궁세가가 있는 방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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