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18화 (13/110)

18-곤귀(棍鬼) (6)

18-

호예양. 그녀는 밤이 깊도록 잠에 들지 못하고 있었다.

“후우······”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그녀는 호롱불을 찾아 켰다.

곤귀 구강룡. 그의 방문으로 인해 호정문은 또다시 자금난에 빠지게 되었다.

호질표국 표사들이 목숨 바쳐 벌어온 돈을 곤귀는 마치 쌈짓돈 털어가듯이 가져가 버렸고, 이는 고스란히 호정문이 감당해야 할 설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무림(武林)이든 유림(儒林)이든,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것 아니겠나.

약자는 강자에게 잡아먹히고 강자는 더 강한 자에게 잡아먹히는.

이것이 약소문파의 운명이다.

심지어 호정문은 자신들보다 약한 자를 잡아먹는 것을 지양하는 곳이기에 타격이 더욱 극심했다.

‘아버님이 가엾어.’

호예양은 자신을 위해 칼을 뽑아들었던 호연암을 떠올렸다.

결국 아버지는 호정문의 식솔들을 위해 분을 참고 고개를 숙였다.

자칫 잘못했다면 대를 이어 내려온 호정문이 순식간에 핏물에 잠겨 사라질 수도 있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결국. 모든 것은 힘의 논리였다.

선(善)한 자는 약하면 안 된다.

강해야만 자신의 선(線)을, 신념을 관철할 수 있는 것이다.

드르륵-

호예양은 책상 옆의 서랍에서 문서 하나를 꺼내들었다.

<무림맹(武林盟)-등천학관(登天學館)/합격통지서>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저 멀리, 무림맹에서 보내온 서찰이었다.

등천학관.

그곳은 아홉 개의 파(九派)와 한 개의 방(一幇), 그리고 다섯 개의 세가(五代世家)로 이루어져 있는 ‘정도십오주(定道十五柱)’의 중심 연합체인 무림맹에서 직속으로 운영하는 학관이다.

16세에서 18세까지의 청년들이 입학하게 되어, 약 8년간의 수행을 통해 강호를 이끌어 나갈 차세대 인재로 거듭나게 되는 기관.

이곳에서 체계적인 지원을 받게 되면 고수로 거듭나는 것은 기정사실이며 졸업 이후에는 무림맹에 남을 수도, 원래 몸담고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호예양은 예전에 부모님 몰래 무림맹에 방문해서 등천학관의 입학 시험을 치른 적이 있으며 최근에 그 결과를 통보받게 된 것이다.

“후우······”

호예양의 한숨에 촛불이 호롱호롱 흔들린다.

“설마 덜컥 합격해버릴 줄이야.”

다른 세가의 후기지수들이 들으면 기절할 말이다.

등천학관이라면 다들 못 들어가서 안달이 난, 명실공히 정파무림 최고의 지도층 양성소이니까.

등천학관에서 1년에 한번 열리는 지(智), 덕(德), 체(體) 시험에서 호예양은 거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이런 명예로운 성과를 거둬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한숨을 쉬고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등록금.

등천학관의 등록금은 어마어마하게 비싸기로 이름높다.

하기야. 애초에 이곳에 지원하는 인재들은 각 문파나 세가에서 작정하고 키워낸 인재들인 만큼, 등록금 따위는 애초부터 고민할 요소 자체가 안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호예양 역시도 등록금 액수가 부담은 되지만 만약 입학할 수만 있다면 부모님이 기뻐하실 것이라 판단했었다.

학관을 졸업하고 돌아온 자신이 무림맹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문을 크게 일으킬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조가장과 흑도방의 방해에 나날이 기울어 가던 가세는 이번 곤귀의 수탈로 인해 완전히 꺾여버렸다.

돈. 그것이 문제였다.

“······.”

호예양은 등천학관에서 온 합격 통지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것을 구겨버렸다.

그리고는 이 사실을 굳이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래도 아쉽긴 하네.’

그녀 역시도 무림맹에 가고 싶었다.

등천학관에 입학해서 더 넓은, 더 높은 풍경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는 힘든 일이었기에, 호예양은 얼른 미련을 털어버리기로 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맞으며, 좋아하는 만두라도 하나 야식으로 사 먹으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       *       *

“······나아지긴 개뿔.”

호예양은 난처한 표정으로 골목에 들어섰다.

쏴아아아아아아-

아무도 없던 대로를 걷던 중 난데없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봉아! 일단 저기로 들어가서 비 좀 피하자꾸나!”

그녀는 애마(愛馬)의 고삐를 당겼다.

야식을 사 먹으러 자주 가던 만두집은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시간도 늦었거니와, 무엇보다 장차 며칠간은 쏟아질 기세로 내리는 비 때문일 것이다.

호예양은 서둘러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흙벽에 기대어 비를 피했다.

꾸우욱-

젖은 옷을 비틀어 물기를 짠다.

그녀는 이마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을 닦아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쉬움을 달래러 밤 산책을 나왔다가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푸히힝-

옆에서 말이 웃는다.

녀석은 시원하게 내리는 빗줄기가 마음에 드는 듯, 개운한 표정으로 갈기를 털어댔다.

“봉이 너어, 언니는 홀딱 젖었는데 혼자만 기분 좋기냐?”

호예양은 말의 엉덩이를 한 대 찰싹 때리며 웃었다.

바로 그때.

골목 저편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어떤 새끼가 길에다가 똥을 뿌려!?”

자주 가던 만두집의 점소이 목소리다.

덩치도 크고 인상도 괄괄하게 생긴 사람인지라 누구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당장 이거 안 줏어가!? 어딜 감히 남의 만두집 앞에다가······ 헉!?”

하지만. 어둠 너머에서 들려오는 점소이의 목소리는 중간에 확 바뀌었다.

“죄, 죄송합니다. 지나가세요. 또, 똥 좀 마려우실 수도 있죠, 네네- 그냥 싸고 가십셔. 제가 내일 아침에 치우겠습니다. 아하- 비가 이렇게 오니 그, 그냥 떠내려가겠네요. 치울 것도 없네 뭐. 하하- 하하하하······”

뭘까? 뭔데 저 괄괄한 점소이가 쩔쩔매면서 도망갈까?

호예양은 호기심을 느꼈다.

그래서 말을 끌고 골목 뒤로 돌아가 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곧 무언가를 마주하게 되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것을, 그 새빨간 것을.

어둠 속에 처연하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이 서 있는 남자.

온몸은 상처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주변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기가 뚝뚝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것들 역시도 온통 새빨갛게 물들어 있어서 빗방울인지 핏방울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저, 저기요?”

호예양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 사람입니까? 아니면 귀신입니까?”

그러자 새빨간 그림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작은 키와 여리여리한 체형.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죽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이윽고, 그림자가 대답했다.

“보이는 대로.”

“그럼 귀신이시군요.”

“······.”

호예양의 말에 그림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차림새를 한번 슥 내려다보는 동작을 한다.

‘휴- 사람이구나.’

호예양은 두려움이 살짝 가시는 것을 느꼈다.

저 자가 정말 피에 미친 마귀였다면 대답은커녕 바로 달려들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인데?’

호예양은 생각했다.

그림자의 목소리는 마치 뜨거운 숯이라도 삼킨 것처럼 쉑쉑- 거칠었고 그마저도 주변의 빗소리에 가려서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림자의 목소리를 어딘가에서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푸히히힝!

호예양의 애마가 그녀의 생각을 막았다.

“보, 봉아! 왜 그래!”

말은 호예양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몸을 떨어댄다.

골목 저편에 떠 있는 새빨간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스윽-

그림자가 움직였다.

아마 골목 너머로 가려는 것 같았다.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발걸음.

금방이라도 픽 쓰러져 죽어버릴 것만 같은 호흡.

그 모습을 본 호예양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잠깐만요!”

그림자가 발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말안장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들었다.

홱-

호예양은 그림자를 향해 자루를 던졌다.

안에는 상처 난 곳에 바르는 금창약이 들어 있었다.

“비싼 건 아니지만······ 혹시 필요하시면 쓰십시오.”

“······.”

그림자는 금창약이 든 자루를 움켜쥔 채 말이 없다.

어둠 너머에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만이 느껴질 뿐이다.

호예양은 용기를 내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무림의 은원에 함부로 끼어들 수도 없지만······ 적어도 눈앞에서 곤란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도울 측은지심 정도는 있습니다. 시, 싫다면 그냥 바닥에 버리고 가세요.”

그러자.

“······.”

금창약이 든 자루가 스윽- 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러더니.

꿈틀-

그림자가 한번 움직였다.

호예양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펄쩍 뛰어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쩔그렁!

묵직한 자루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는, 몹시도 수상하게 생긴 가죽자루였다.

호예양이 황급히 말했다.

“뭐, 뭔가요? 저는 그냥 돕고 싶었을 뿐인데 왜······”

“말에 실어 가라.”

하지만 그림자는 그녀의 말이 다 끝나기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픽-

그리고 촛불이 꺼지듯, 그렇게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호예양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뭐지?”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녀는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죽 자루.

저 안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호예양은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안에 어떤 끔찍한 것이 있을지 몰라 눈을 가늘게 뜬 채로, 그녀는 자루의 입구를 확 열어보았다.

“흐윽!”

확 풍겨오는 피비린내에 그녀는 잠시 뒤로 물러났다.

무언가 위험한 것이 들어있는 것 같으면 바로 도망칠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

자루 안에 담겨있는 것은 그녀의 두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어 놓을 만한 것이었다.

금원보. 그것도 막대한 양의.

호예양은 저도 모르게 자루 안으로 손을 뻗었다.

차갑고 무겁고 피비린내 나는 이것은 분명 돈이 틀림없었다.

“이건······ 이건 분명 우리 호정문의······?”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자루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곤귀가 호정문에서 빼앗아 간 금원보들과 그 외의 다른 금자, 은자들이 가득했다.

심지어 출처가 조가장과 흑도방인 것처럼 보이는 전표들도 상당수 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호예양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곤귀 구강룡의 돈자루다.

그리고 이 돈자루의 원래 주인은 죽었다.

어둠 저 너머로 피에 절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저벅-

지치고.

저벅- 저벅-

외로우며.

저벅- 저벅- 저벅-

아프고.

저벅- 저벅- 저벅- 저벅-

고독한.

호예양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이 비와 흙탕물에 젖는 것도 모른 채 발자국 소리를 뒤쫓아갔다.

하지만.

“······.”

소리가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처절한 각혈의 흔적만이 빗물에 천천히 씻겨 내려가고 있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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