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17화 (12/110)

17-곤귀(棍鬼) (5)

17-

퍼-억!

둔탁한 굉음과 함께, 추이의 창이 절벽에 틀어박혔다.

창날은 곤귀의 머리통을 관통한 뒤 단단한 암반을 꿰뚫고 깊숙이 들어갔다.

만신창이가 된 시체가 절벽 초입에 못 박히게 되었다.

휘이이이이잉······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불어 곤귀의 시체를 좌우로 까딱까딱 밀어 움직인다.

그리고 그 밑에서.

“휴우-”

추이가 묵은 한숨을 토해냈다.

곤귀의 머리를 뚫고 박힌 창대에 잠사가 늘어졌다.

피가 흘러내려 시뻘겋게 변한 잠사를 잡고, 추이는 천천히 절벽을 올라왔다.

‘······상태가 별로 안 좋군.’

추이는 자신의 몸을 점검했다.

머리는 깨졌고 내장은 성한 곳이 없었다.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졌고 두 다리 역시도 산산조각난 듯한 느낌.

그나마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수많은 창귀들을 쥐어짜서 간신히 만들어낸 생명력 덕분이다.

꾸드드득-

손바닥에 칭칭 휘감은 잠사가 살을 파고들어 뼈에 걸린다.

추이는 이를 악물고 실을 손에 휘감았고 절벽 위로 기어올랐다.

···쿵!

추이는 절벽가 위에 나동그라졌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은 절벽에 못박힌 곤귀의 시체를 씻어내린다.

추이 역시 몸을 절여놓고 있는 핏물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느덧, 추이의 눈동자가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왔다.

“······.”

추이는 몸을 일으켰다.

내장이 터지고 뼈가 부러졌지만 죽지는 않았다.

죽지만 않는다면 결국에는 회복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불가사의의 마공 창귀칭이었으니까.

‘홍공. 그 자도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었지.’

추이는 자신을 가르쳤던 혈마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머나먼 변방의 전장까지 쫓겨온 그가 반신불수가 된 몸으로도 복수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다 창귀칭의 불가사의한 회복력 덕분이었다.

쏴아아아아아······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진다.

절벽가에도 황토색의 폭포가 생겼다.

추이가 겨우겨우 상반신을 일으키는 순간.

콰릉!

하늘에서 번개 한 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공교롭게도, 그것은 절벽에 박혀있던 흑창 위로 떨어졌는데 그 때문에 곤귀의 시체는 불에 바짝 탄 목내이(木乃伊)가 되어버렸다.

···쿠르르릉!

절벽이 무너져 내린다.

추이는 진흙탕 위를 엉금엉금 기어서 절벽가에서 벗어났다.

그때.

우-우우우우······

무너져내린 절벽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

곤귀.

평범한 수(手)와 상식적인 단(段)으로는 절대 이기지 못했을 강적.

그것이 추이의 앞으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온몸이 시뻘겋게 물든 그는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진흙탕 위에 서서 추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추이는 곤귀의 부활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곤귀 구강룡.”

추이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곤귀가 움찔한다.

절정고수.

능히 한 지역의 패자를 자처할 수 있는 극강의 무인.

한때 단신독보로 전 무림을 오시하며 사도 전역을 활개치던 곤귀.

“곤귀 구강룡.”

그가 추이의 부름을 받아 몸을 떤다.

저벅-

곤귀가 절벽에서 기어올라 지상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저벅-

온통 피로 물들어 있는 걸음.

저벅-

그것이 추이를 향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윽고.

“곤귀 구강룡.”

추이가 이름을 모두 세 번 불렀다.

츠츠츠츠츠츠츠츠······

추이의 앞까지 다가온 곤귀의 망령은 붉은 안개의 형태가 되어 추이의 몸 전신을 통해 흡수되었다.

“후우-”

추이는 긴 숨을 내쉬었다.

절정고수 급의 창귀가 추이에게 붙었다.

이 녀석을 길들이려면 앞으로 시간이 꽤나 소요될 것이다.

‘좋은 영약을 얻은 셈이로군.’

추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굴각(屈閣)’에서 ‘이올(彛兀)’로 넘어갈 수 있는 재료가 마련되었다.

‘일단 몸부터 좀 회복하자. 임독양맥은 그 이후에 뚫으면 돼.’

추이는 엉금엉금 기어서 진흙뻘을 벗어났다.

소나무 숲 아래, 마른 솔잎들이 잔뜩 깔려 있는 곳.

이곳은 위에 돋아난 솔잎들이 하도 빽빽하여 빗줄기도 잘 들어오지 않는다.

추이는 마른 솔잎들을 치우고 그 아래의 검붉은 흙을 파고 들어가 마치 두꺼비처럼 웅크렸다.

[히히- 꼴좋다!]

[죽어! 제발 죽어!]

[이대로 파묻혀 죽어라!]

[생매장! 생매장! 생매장! 생매장!]

[눈뜨지마눈뜨지마눈뜨지마눈뜨지마눈뜨지마눈뜨지마······]

심상세계 속의 귀신들이 곡을 한다.

추이의 죽음을 기다리며 고사를 지낸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추이를 증오하는 그것들의 마음이 오히려 추이에게는 몸을 회복시키는 보약과도 같기 때문이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퍼-억!

말라붙은 흙과 솔잎들을 뚫고, 손 하나가 올라왔다.

추이가 동면이 끝난 개구리처럼 땅 아래에서 기어올라오는 것이다.

“또 살아남았군.”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듯한 목소리.

추이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고 지난밤의 격전지로 향했다.

황혼인지 새벽인지 알 수 없는 하늘은 붉게 익어 노릇노릇하다.

비는 그쳤고 천지는 고요에 잠겨 있었다.

물안개도, 외줄다리도,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았다.

언제 그런 것이 있었냐는 듯 절벽은 깨끗했다.

다만, 지난밤 두 명의 사내가 목숨을 걸고 싸웠던 것을 증언하는 증인이 하나 남아있기는 했다.

흑색의 곤(棍).

길이는 일 장.

기둥은 여섯 개의 각이 져 있는 투박하고도 거친 무기.

곤귀 구강룡이 마지막까지 쓰던 애병이었다.

추이는 절벽가에 박혀있는 그것을 뽑아들었다.

···쑤욱!

손에 냉병기 특유의 차가운 기운이 전해져 온다.

전에 쓰던 흑창보다 훨씬 무겁고 단단하다.

표면 역시 수많은 잔흉터들로 인해 까끌까끌 거칠기 짝이 없었다.

이 무시무시한 곤의 위력은 수십, 수백 번 맞아봤던 추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곤은 별로인데. 창날이 필요하겠군.”

추이는 곤의 뭉툭한 끝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곤귀 구강룡은 이 곤이 흑철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원래의 형태는 창이었으되, 창날이 부러져 나가서 곤이 된 것이라고도 했다.

만약 이 곤이 처음으로 만들어졌을 때의 형태를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면, 추이는 곤귀의 적수가 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한때 무림을 자유로이 독보하는 낭인이었다가 마지막에는 사도련의 개로 전락해 버렸던 곤귀 본인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빨이 빠지면 안 되지.”

사람도 그렇고 창도 그렇다.

추이는 곤 끝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회귀한 이래 처음으로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온 이후 무의식적으로 해이해져 있었던 자신을 바짝 다그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윽고, 추이는 곤을 든 채 절벽가를 떠났다.

외줄다리가 끊어져 버렸기에 돌아가는 길은 멀었다.

고래현으로 돌아가는 절벽가 맞은편의 길에서, 추이는 곤귀가 놓고 간 돈자루를 회수할 수 있었다.

곤귀는 잠깐 내려놓았다가 곧바로 회수할 생각이었는지 돈자루에 아무런 짓도 해놓지 않았다.

자루 안에는 빗물과 흙, 낙엽이 가득 들어가 있었지만 안에 들어있는 금원보의 무게 때문에 유실된 것은 딱히 없었다.

추이는 가죽자루 속의 흙탕물과 진흙을 모두 따라내고는 금원보만 추려서 짊어졌다.

그리고 곤귀가 그랬던 것처럼, 돈자루를 곤 끝에 걸고는 발걸음을 돌렸다.

노래는 부르지 않았다.

*       *       *

고래현에 도착하자 밤이 깊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어찌나 굵은지 떨어진 빗방울에 맞아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절벅- 절벅- 절벅-

추이는 맨발로 길가를 걷고 있었다.

비가 너무 심하게 오는 밤이라 그런가 주변에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추이가 막 골목을 빠져나와 호정문이 있는 대로변으로 향하려 할 때.

뿌직-

곤 끝에 매달려 있던 돈자루가 금원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찢어졌다.

왈그랑- 땅그랑- 떼굴떼굴떼굴······

금원보들이 길가에 흩어졌다.

추이가 그것을 주워담으려고 할 때.

벌컥-

갑자기 골목에 있던 뒷문 하나가 열렸다.

“야! 어떤 새끼가 길에다가 똥을 뿌려!?”

점소이 하나가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로 버럭 소리지른다.

흙탕물에 빠진 금덩이가 점소이 눈에는 똥덩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당장 이거 안 줏어가!? 어딜 감히 남의 만두집 앞에다가······ 헉!?”

점소이는 소리를 지르다 말고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빗줄기 너머에 으스스하게 서 있는 추이의 그림자를 본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지나가세요. 또, 똥 좀 마려우실 수도 있죠, 네네- 그냥 싸고 가십셔. 제가 내일 아침에 치우겠습니다. 아하- 비가 이렇게 오니 그, 그냥 떠내려가겠네요. 치울 것도 없네 뭐. 하하- 하하하하······”

그러고 보니 점소이의 낯이 익다.

예전에 추이가 호정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었던 녀석이었다.

점소이도 추이를 알아봤는지 황급히 제 뺨을 감싸고는 뒷문을 닫아걸었다.

“······.”

추이는 바닥에 흩어진 금원보들을 주워모아 자루에 쌌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빗물이 몸을 두드리지만 몸은 여전히 뜨겁다.

용광로에서 방금 막 끄집어져 나온 창날이 시뻘겋게 달궈져 있는 것 같은 느낌.

무수히 많은 빗방울들의 두드림에도 몸은 물러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단단하게 단조되고 있었다.

잠이 온다.

문득 추이는 자신이 비틀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온몸을 적시고 있는 피, 흙탕물, 빗줄기.

손에 든 흑색의 곤과 돈자루 역시도 점점 더 무거워진다.

곧 호정문의 뒷문이 눈에 보일 것이다.

담벼락을 넘어 마굿간으로 들어가게 되면 제일 먼저 푹신한 건초들 위에 쓰러져 정신없이 한숨 푹 자야겠다.

추이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흙탕물 범벅이 된 길로 나섰다.

바로 그 순간.

“저기요.”

추이의 발걸음을 붙잡는 존재가 있었다.

빗줄기 사이로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청음(淸音).

과거로 돌아온 뒤, 피로 얼룩진 기억에 새롭게 덧입혀진 목소리.

추이는 젖은 고개를 들어 골목 사이를 바라보았다.

“······.”

호예양이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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