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창귀무쌍-16화 (11/110)

16-곤귀(棍鬼) (4)

16-곤귀(棍鬼) (4)

창에는 상모(象毛)라는 것이 있다.

창날과 창대가 이어진 부분을 긴 끈, 짐승의 털, 종이 등을 이용해 장식해 놓은 것이다.

물론 단순한 미관용은 아니고, 창날의 혈조(血槽)를 따라 흘러내린 핏물이 창대를 적셔 미끄럽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추이가 휘두르는 묵창은 세게 휘두를 시 탄성을 받아서 휘게 되는데, 이때 상모까지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으면 적은 창날이 최종적으로 꽂히게 되는 지점을 예측할 수가 없다.

이 간단한 교란 동작에 지금껏 수많은 고수들이 불귀의 객이 되어 황천을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곤귀는 달랐다.

그는 한때 창술의 대가로 이름 날렸던 인물.

추이가 사용하는 수법을 꿰뚫어보지 못했을 리 없었다.

곤귀는 짐짓 추이의 교란에 당한 척 연기했다.

휘어진 창대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순간.

눈을 뱅글뱅글 현혹시키던 상모가 가라앉는 순간.

그리고 창날의 끝이 자신의 목을 향해 작렬하는 순간.

이 삼박자가 모두 제때 맞아 떨어지는 찰나의 바로 그 순간.

곤귀는 곤의 손잡이 아래로 흘러내린 핏물에 손이 미끄러진 척하며 몸을 살짝 물렀다.

그리고 창이 자신의 품속 깊이 들어오도록 유인한 뒤, 한 박자 늦게 곤을 뻗어 되치기를 먹였다.

···키리릭!

곤귀의 체중이 실린 곤은 핏물에 의해 옆으로 미끄러지며 창이 들어오는 궤도의 바로 밑을 파고들었다.

퍼-억!

선혈과 살점이 뒤섞여 튄다.

불과 한끗 차이로, 창과 곤은 서로 다른 과녘을 때렸다.

“······.”

“······.”

추이의 창이 곤귀의 왼쪽 팔을 어깨까지 통째로 날려버렸다.

곤귀의 곤은 추이의 아랫배 깊숙이 틀어박혔다.

“이겼구먼.”

곤귀가 다리 아래로 멀어져가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허허 웃었다.

···쿵!

곤이 회수되고, 추이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되치기가 제대로 걸렸다.

곤귀는 왼팔을 잃은 것에 불과하나, 추이는 뱃속의 오장육부가 모두 터지고 찢어졌다.

결국에는 서 있는 쪽이 이긴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구나. 열다섯도 안 되어 보이는 아해가 어찌 이런 고강한 무공을······ 마도(魔道)가 키워낸 물건인가?”

곤귀는 기침을 하며 몇 움큼의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곤을 들어올리려는 찰나.

부스스······

추이가 몸을 일으켰다.

마치 유령처럼.

“······!?”

곤귀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눈동자가 없는 흰색 일색의 눈알에 경악의 빛이 번들거린다.

“어, 어떻게 일어선 거냐?”

“······.”

추이는 말이 없다.

곤귀는 그제야 추이의 기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성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적의 상태가 객관적으로 관측된다.

산송장.

말 그대로, 숨만 붙어있는 상태.

추이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 상태로 서 있었다.

어쩌면 그저 정신력에만 의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곤귀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이와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기백이지 않은가.

“무엇이 너를 일으켜 세운 것이냐?”

곤귀는 추이를 향해 물었다.

“돈? 자존심? 투지? 약속? 우정? 사랑? 무어냐. 너를 움직이는 게.”

그러자, 닫혀있는 추이의 입이 열렸다.

“공포.”

“······?”

뜻밖의 대답에 곤귀의 말문이 막힌다.

추이는 말을 이었다.

“죽으면 어디로 가게 되는지 알아?”

눈앞에는 곤귀가 아닌 다른 것이 보인다.

추이는 지금 자신의 단전 속 깊은 곳에 있는 심상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검은 못. 추위와 어둠, 고독만이 존재하는 영겁의 무저갱.

그 밑에서 아귀처럼 득실거리고 있는 시뻘건 창귀들.

그것들은 살아생전의 기품, 위엄, 체면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저 짐승처럼 우짖는다.

그 꼿꼿하던 조양자조차도 심층 저 아래에서 개처럼 울부짖고 있는 것이 보였다.

추이가 말했다.

“죽은 뒤 저 꼴이 될 것을 생각하면 눈이 안 감겨.”

“큭큭큭- 무슨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냐.”

곤귀는 애써 웃었다.

하지만 그의 입꼬리는 올라갔으되, 눈꼬리는 그렇지 못했다.

오싹 끼쳐오는 소름.

혈관이 수축해서일까?

잘려나간 왼팔의 절단면에서 피가 절로 멎는다.

‘저 야차같은 놈도 겁낼만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죽음 뒤에는?’

곤귀는 궁금해졌다.

눈앞의 추이가 대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을지.

하지만 그것은 결코 해결될 수 없는 호기심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둘 중 하나는 죽을 테니까.

따-앙!

또다시 곤과 창이 격돌했다.

곤귀는 하나 남은 팔을 휘둘러 곤을 내리찍었고 추이는 간신히 창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펑!

파공성과 함께, 추이가 뒤로 밀려났다.

곤귀는 그런 추이를 바짝 따라붙었다.

회복할 시간을 조금도 주지 않을 심산이었다.

“······.”

추이는 창을 고쳐 쥐었다.

그리고 오로지 창의 무게만으로 그것을 위에서 아래로, 던지듯 내질렀다.

좌우로 피할 공간은 없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외줄다리 위, 곤귀는 최후의 승부수를 띄웠다.

핏-

추이의 창이 곤귀의 하나 남은 손을 스쳤다.

순간, 추이의 귓가에 예전 흑도방을 치기 전에 만났던 노야의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너무 짧은데. 일 장(丈)은 넘어야 써.’

‘그런 건 군부대나 가야 있어. 이게 제일 긴 거야.’

짧았다. 아주 미세하게.

추이가 던진 창은 본디 곤귀의 손목을 자르려 했으나,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 그쳤다.

창이 짧아서 생긴 불운이었다.

후둑- 툭-

곤귀의 오른손에서 손가락 두 개가 수줍게 잘려나갔다.

곤에 감겨있던 검지와 중지가 외줄다리 아래의 물안개에 집어삼켜진다.

하지만 곤귀는 잡고 있던 곤을 놓치지 않았다.

···꽈드득!

엄지, 약지, 소지. 세 개의 손가락이 뱀처럼 곤을 휘감고 단단히 조인다.

그렇게 말아쥔 곤을, 곤귀는 추이의 옆구리에 다시 한번 때려박았다.

떠-걱!

느낌이 왔다.

갈빗대가 모조리 부러졌다.

추이의 창은 곤귀의 하나 남은 손에서도 두 개의 손가락을 앗아갔으나, 곤귀의 곤은 추이의 몸통에 있는 모든 뼈를 죄다 으스러트렸다.

내장이 초토화되고 뼈가 완파되었으니 이번에는 즉사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곤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음!?”

이변이 벌어졌다.

곤귀는 자신의 시야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쿨럭!”

추이가 밧줄을 붙잡은 채 일어났다.

그의 입에는 마름쇠 몇 개가 물려 있었다.

추이는 격돌 직전, 곤귀의 눈을 향해 마름쇠 하나를 뱉어냈던 것이다.

뾰족한 이쑤시개로 밥알의 표면을 아주 살짝 깎아내는 것처럼, 마름쇠는 곤귀의 오른쪽 눈알 표면을 아주 살짝 깎아내고 지나갔다.

본디 눈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섬세하고 유약한 기관인지라, 각막의 겉표면을 살짝 깎아낸 상처만으로도 한동안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한다.

퉤-엣!

추이는 입에 물고 있던 마름쇠들을 핏물과 함께 마저 뱉어냈다.

“으으으! 이 미친 놈!”

곤귀는 눈앞에 있는 추이로부터 물러났다.

이제 상대의 모습이 달리 보인다.

처음 만났을 때는 흥미가 가는 꼬맹이.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제자로 삼고 싶을 정도의 기재.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적수라 부를 수 있는 강호의 후배.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너덜거리는 몸으로 시뻘건 피를 뿜으며, 창과 마름쇠를 흩뿌리는 저것을 대체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곤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그 사실을 자각할 틈도 없이 외쳤다.

“그, 그만! 그만 오란 말이다!”

임자(壬子)의 적. 천적(天敵)

침상에 누워 편안하게 늙어 죽고 싶다던 막연한 기대는 바로 이 순간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간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추이의 말은 마치 지옥에서 내려오는 판결처럼 들렸다.

곤귀는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연륜과 경험, 그리고 타고난 직감으로 추이의 말이 곧 사실이 되리라는 것을 예지했다.

하지만 하나의 생물로서 타고난 가장 강한 본능인 생존욕구는 그 사실을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으아아아아!”

곤귀는 곤을 휘둘렀다.

마름쇠들이 이마와 눈, 가슴팍과 어깨에 박혀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추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 추이가 옷을 벗었다.

퍼-엉!

허름한 옷자락이 휘둘러지며 곤귀의 곤끝을 잡아챘다.

곤의 궤도가 미세하게 비틀리는 순간.

“뒈져라! 마귀야!”

곤귀는 곤을 놓아버렸다.

최후의 수단으로 택한 투곤(投棍).

하지만 그 전략은 주효했다.

추이는 창의 공격궤도를 수정해서 곤을 막으려 했지만 상대가 곤을 던질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는지 대응이 늦었다.

파앗!

추이의 창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물안개 너머로 헛되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곤은 추이의 머리를 때린 뒤 그대로 절벽가에 깊숙이 박혔다.

“흐······ 흐하하하하하!”

곤귀는 웃었다.

피로 물든 이빨을 드러내 보이며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이겼다. 이제는 이겼다. 정말로 이겼다.

저 미칠 듯 끈질기던 악귀도 이제는 소생하지 못할 것이다.

보아라, 그 증거를. 저 악귀가 쓰러졌다. 머리를 감싸쥔 채 푹 주저앉았다.

“크하하하하하하! 그래! 거기 딱 주저앉아 있어라! 일 장에 때려죽여 주마!”

곤귀는 하나 남은 손을 들어올렸다.

비록 세 개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이지만 송장 신세만 겨우 면한 놈을 때려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곤귀는 광소를 터트리며 추이에게로 돌진했다.

······아니, 돌진하려 했다.

“엇!?”

최후의 일격을 먹이기 위해 달려나가던 곤귀는 몸을 멈췄다.

하나 남은 눈이 부릅떠진다.

뭔가 이상했다.

추이가 도망가고 있었다.

분명 추이는 머리를 감싸쥔 채 주저앉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로 빠르게 멀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속도로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뭣······!?”

곤귀는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현 상황을 파악했다.

다리가 끊어졌다.

마지막에 추이가 던진 창은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던 밧줄다리의 마지막 줄을 끊어놓았다.

그리하여 두 절벽 사이를 이어주고 있던 다리는 두 동강이 난 채 각자의 방향을 향해 갈라져 낙하하고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양쪽으로 갈라지는 다리의 끝에 각각 추이와 곤귀가 있었다.

“큭!”

곤귀는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적의 목숨을 끊어놓는 것보다 제 살 길을 모색하는 편이 현명하다.

어차피 추이는 저 상태로는 도망가지 못한다.

끊어지는 다리와 함께, 맥없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을 것이다.

곤귀는 이 전투의 승리자를 자신으로 잠정 인식했다.

그래서 서둘러 몸을 돌렸고, 낙하하는 다리의 널빤지들을 밟고 반대편 절벽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오싹-

본능이 또다시 곤귀의 뒷목을 쭈뼛하게 간질인다.

하지만 이성은 곤귀의 얼굴을 그대로 정면을 향해 고정시켜 놓았다.

‘설마.’

다리가 양쪽으로 끊어지고 있는 판국인데 그 와중에도 뒤돌아 도망치는 상대를 공격하려 드는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껏 싸워왔던 저 미친놈이 상식으로 설명이 되는 존재였던가?

곤귀는 뛰었다.

그리고 추락하는 다리의 널빤지를 밟고 뛰어올라 반대편 절벽가를 목전에 두었다.

그 시점에서, 곤귀는 자신이 가까스로 손에 넣은 아주 약간의 여유를 고개를 돌리는 동작에 소모했다.

고개를 돌리고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살핀다.

그렇게 용기를 낸 덕분에 곤귀는 이득 하나를 챙겨갈 수 있었다.

자신이 무엇에 죽는지, 자기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말이다.

“······!”

곤귀가 고개를 돌렸을 때 본 것은 창이었다.

추이가 허공으로 던졌던 창.

그것은 잠사에 휘감긴 채 물안개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곤귀의 이마를 살짝 찔렀다.

콕-

이마 중앙의 살갗이 살짝 벗겨지며 혈액이 방울방울 새어나오는 것.

그 일련의 과정들이 아주 느리게 보인다.

곤귀는 위로 향했던 눈알을 다시 정면으로 돌렸다.

그러자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추락하는 다리, 디딜 곳 없는 물안개, 텅 빈 허공.

그곳에 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추이의 시뻘건 시선이.

‘귀신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구나.’

싸움을 시작하기 전, 처음 마주했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무표정한 얼굴이.

“아.”

곤귀가 입을 벌렸다.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지만 끝까지 뇌까릴 수는 없었다.

이마의 살갗을 살짝 찌르는 것으로 시작한 추이의 창이.

콰-지지지지지지직!

곤귀의 두개골을 부수고 들어가 그 너머의 절벽까지 꿰뚫어 버렸기 때문이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