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곤귀(棍鬼) (3)
15-
짙은 물안개 속.
돈자루를 짊어진 채 걸어가는 곤귀는 콧노래를 부른다.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바람 쓸쓸하고 역수의 강물은 차다.
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 중 제대로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는 제멋대로의 가락.
하지만 곤귀는 흥이 나는지 한껏 어깨춤까지 추고 있었다.
휘이이이잉-
물안개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강해진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버들잎들이 귀신의 머리카락처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었다.
어느덧, 곤귀는 발걸음을 멈췄다.
만 장은 되어 보일 듯 높은 절벽.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잇고 있는 긴 밧줄다리.
하지만 곤귀를 가로막은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삐걱······
자욱하게 낀 물안개 때문에 허공에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외줄다리 앞.
그곳에는 곤귀를 기다리고 있던 그림자 하나가 홀연히 떠 있었다.
삐걱······ 삐걱······
귀신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물안개 너머로 스르륵 사라졌다.
마치 곤귀에게 이 물안개 속으로 들어오라는 것처럼.
“허허-”
곤귀는 죽립을 깊게 눌러썼다.
그리고는 짊어지고 있던 돈자루를 절벽가에 내려놓았다.
쩔그렁-
돈자루를 내려놓은 곤귀는 그림자의 부름을 따라 물안개 속, 아찔한 외줄다리 위로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 삐걱······ 삐걱······
곤귀가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외줄다리가 위태롭게 흔들거린다.
이윽고, 곤귀는 다리의 중간 지점에서 발걸음을 다시 한번 멈췄다.
아까 물안개 너머로 사라졌던 그림자가 그곳에 서서 그를 맞이하고 있었다.
곤귀가 입을 열었다.
“잘못 봤나 싶었는데, 잘 본 것이었도다.”
그는 안개 너머에 있는 추이의 창백한 얼굴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귀신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구나.”
“······.”
“마굿간지기 맞지? 왜 나를 찾아온 것이냐? 네 정인(情人)에게 모욕을 주어서?”
곤귀는 추이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내가 호예양, 그 아해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때. 나는 보았다. 네 몸이 살짝 떨리는 것을 말이야.”
“······.”
“반한 여자의 복수를 해 주기 위해서 나를 찾아왔다면, 그것은 잘못 찾아온 것이다. 애초에 그 아해는 나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곤귀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네가 누군가에게 돈을 주었는데, 그가 돈을 받지 않았다고 치자. 그럼 돈은 누구의 것이지?”
“······.”
“그야 여전히 네 것이겠지. 같은 이치다. 나는 그 아해에게 침을 뱉었고, 그 아해는 나의 침을 받지 않았다. 그럼 그 침은 여전히 내 것인 셈이지.”
“······.”
“불가에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이 있다. 저 멀리 서역에는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을 돌려 대라’라는 말 또한 있지. 둘 다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주인됨을 잊지 말라는 뜻이다. 상대가 모욕을 주었을 때, 화를 내면 주인됨을 잃는 것이나, 그것을 받지 않고 의연히 대처한다면 상황의 주도권은 여전히 자신의 것.”
“······.”
“그 아해는 나의 모욕을 상선약수(上善若水)의 흐름으로 흘려보냈다. 결국 나의 모욕은 갈 곳을 잃었고, 피해를 본 이는 아무도 없다는 뜻이야. 그런데 네가 왜, 무엇을 복수하겠다는 것이냐? 다 무의미한 것이니라.”
곤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추이가 말했다.
“절밥을 어설프게 먹어서 그런가, 혓바닥이 길구나.”
이윽고.
삐걱······
추이는 곤귀의 앞을 가로막은 용건을 짤막하게 털어놓았다.
“돈 내놔.”
“······.”
추이의 말을 들은 곤귀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은 거의 사십 년 만에 들어보는군. 나한테 그따위 말을 하는 놈은 사도련주 이후에 네가 처음이다.”
추이는 곤귀의 말에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차앙!
아무런 광택도 없는 흑창 한 자루가 추이의 손에 들렸다.
곤귀는 그것을 보며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좋은 창이구나. 이름이 무어냐?”
“없다.”
“조그만한 세가에서는 능히 가보 취급을 받을 만한 창인데, 이름이 없으면 쓰나. 어디보자, 내가 하나 지어주어야겠군. 절명창(絶命槍), 아니면 섭혼창(攝魂槍). 어떤가?”
곤귀는 이런저런 말을 하며 자신의 장대를 들어보였다.
육각 형태의 긴 기둥.
추이의 창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광택도 없는 흑색 일색이다.
“이것은 말이야. 원래는 창(槍)이었거든? 그런데 창날이 부러져 나간 뒤로는 곤(棍)이 되었다네.”
“······.”
“그래도 말이야, 이게 흑철로 된 거라서 보기보다 단단해. 좀 무거운 것이 흠이지만. 허허허-”
곤귀가 자신의 흑곤을 들어 추이를 향해 겨누었다.
“만약 이 녀석의 날이 아직 살아있었다면, 내가 곤귀(棍鬼)가 아니라 창귀(槍鬼)가 되었을 것이야. 안 그런······!?”
하지만 그의 너스레는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쉬익-
안개의 복판이 뻥 뚫리며, 그 구멍을 통해 추이의 창이 일직선으로 쇄도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창끝에서 시뻘건 기운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본 곤귀의 안색이 일순간 딱딱하게 변했다.
···따앙!
창과 곤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따따따따따따따따따땅! 채앵-
순식간에 수십여 합이 오갔다.
팅! 티잉! 핏-
외줄다리를 구성하고 있는 밧줄과 판자 몇 개가 상처를 입었다.
끼-기기기기기기긱······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다리는 더더욱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잉! 펑!
외줄다리의 바닥을 구성하고 있던 널빤지 하나가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삭은 밧줄만이 오랜 벗이었던 널빤지를 향해 손을 뻗고 있으나 그저 너울거림에 불과할 뿐.
“내가 호정문을 너무 얕봤구나.”
곤귀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곤을 휘둘렀다.
“한낱 마굿간지기가 이리도 강하거늘, 허허허-”
“······.”
추이는 곤귀의 너스레에 반응하지 않았다.
다만 발을 크게 굴러서 외줄다리를 출렁거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
발을 내딛으려던 바닥이 갑자기 아래로 푹 꺼지게 되자 곤귀는 허공에서 주춤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다리가 지네처럼 꿈틀거렸고, 그 때문에 디딜 널빤지를 다시 골라야 했고, 그 때문에 몸의 균형을 회복하는 속도가 아주 잠시 느려졌고, 그 때문에 뒤이어질 동작들 역시도 끊겨버렸다.
그리고.
쉐엑-
그 사이를 귀신같이 비틀어 제끼는 창날.
극히 찰나의 빈틈마저 비집고 들어오는 그 표홀한 살기에 곤귀는 대경하여 위로 뛰어올랐다.
하지만, 막상 반격하려고 보니 추이는 이미 눈앞에서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
“······호오?”
곤귀의 표정이 일순간 급변했다.
타닥-
추이의 발소리가 바로 아래에서 들려온다.
나려타곤(懶驢打滾).
게으른 당나귀가 땅바닥을 구르는 듯한 동작.
하지만 이 볼썽사나운 동작의 주체가 추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쉬익-
아래에서 위로, 지면과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는 창날이 곤귀의 사타구니를 노렸다.
“미친!?”
곤귀는 황급히 허리를 뒤로 뺐다.
하지만 그러느라 미처 간수하지 못한 아래턱 끝을 창날이 옅게 스치고 올라간다.
···뿌직!
턱끝이 세로로 갈라지며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허허허- 이거 아찔하구나야.”
곤귀가 뒤로 물러났다.
일반적인 일류고수였다면 벌써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관통당해 죽었다.
절정의 완숙에 이른 자신 또한 하마터면 턱부터 정수리까지를 꿰일 뻔했다.
“평소라면 창이 절대 들어올 수 없는 각도라서 방심했구먼. 허허- 그렇다고 쳐도, 같은 남자끼리 사타구니 노리기 있나? 미친 새끼로고.”
곤귀는 추이의 도발에 기꺼이 어울렸다.
붕붕붕붕-
묵직한 곤이 물안개를 한껏 끌어모아 회오리치게 만든다.
곤귀는 그 힘을 이용하여 널빤지를 박찼다.
하지만, 추이는 곤귀가 걸어오는 정면승부를 보기좋게 외면했다.
퉤-엣!
피 섞인 가래침이 허공을 난다.
“!?”
곤귀는 추이가 뱉은 침을 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보기보다 뒤끝 있는 친구구만.”
곤귀는 고개를 숙여 추이의 가래침을 피했다.
그러자 추이가 고개 숙인 곤귀를 향해 발길질을 했다.
부웅-
거리가 멀었던 터라 추이의 발길질은 그저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후두두두둑!
추이의 바짓단에 줄지어 꿰여있던 마름쇠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미친!”
곤귀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어렸다.
그는 자리에서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고 곤을 휘둘러 마름쇠들을 걷어냈다.
바로 그 순간.
추이는 허공으로 뛰어 공중제비를 돌았고 다시 한번 발길질을 날렸다.
그곳에는 아까 뱉었던 가래침이 아직 허공을 날고 있던 중에 있었다.
뻐-억!
추이의 발등에 맞은 가래침이 지면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이내.
···철썩!
곤귀의 얼굴에 정확히 맞았다.
“큭!?”
곤귀는 황급히 눈을 감았다.
치지지지지직······
맵다.
침이 맵다.
저놈의 침은 이상하리만치 따갑고 고통스러웠다.
마치 침 그 자체가 맹독이라도 되는 듯.
부웅-
곤귀는 눈을 비비면서도 곤을 휘둘렀다.
하지만 추이는 유령같은 움직임으로 곤귀의 곤을 피해 거리를 좁혀왔다.
그 모습은 흡사 물안개 속의 악령을 보는 것 같았다.
“창잡이가 거리를 좁히면 어쩌자는 거냐!”
곤귀는 정면으로 달려드는 추이를 향해 무릎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추이가 창을 놓아버린다.
‘창잡이가 창을 버려!?’
곤귀가 경악하는 순간.
뻐-억!
추이는 곧바로 품속에서 망치를 꺼내들어 곤귀의 무릎을 내리찍었다.
“꺼윽!?”
곤귀는 황급히 다리를 뒤로 물렀다.
피하기는 했지만 스쳤다.
어린 시절 성장통에 잠 못 이루던 밤처럼, 무릎이 미친 듯이 시큰거리고 있었다.
···척!
추이는 허공으로 날아갔던 창을 다시 잡아챘다.
잘 보니 창대의 중앙에는 반투명한 잠사가 이어져 있었고 그 반대쪽 끝이 추이의 손목에 단단히 휘감겨 있는 것이 보인다.
“······.”
곤귀는 미간을 찡그렸다.
보통 무기를 든 자는 무기에만 의존하기에 모든 동작이 무기를 중심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기를 다루게 되면 꼭 신체 중에 노는 부위가 나오게 된다.
가령 칼을 오른손으로 휘두르게 되면 왼손이 놀고, 창을 두 손으로 잡으면 반드시 한쪽 다리가 놀게 되듯 말이다.
······하지만 눈앞의 적은 달랐다.
이 마굿간지기 소년은 전신이 흉기였다.
신체의 모든 곳에서 암기들을 쏟아내고 동작 하나하나가 체면과 형식 따위는 개나 줘 버린, 지독할 정도로 살상에만 그 목적을 두고 있는 것들이다.
마치 칠흑 같은 밤에 벌어지는 참호전, 진흙 구덩이 속의 아귀다툼, 그 안에서 불특정다수를 살상하기에 최적화된 살인병기를 보는 듯했다.
“어디서 튀어나온 악귀나찰이냐!?”
곤귀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의 표정에 여유라는 것은 이미 옛저녁에 사라져 있었다.
까-앙!
창과 곤이 외줄다리의 중앙에서 한데 맞부딪쳤다.
꾸드득······
냉병(冷兵)과 냉병(冷兵)의 힘겨루기.
날카롭게 날을 세운 두 이빨 끝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맞물려든다.
그때. 추이의 입이 열렸다.
“창은 예로부터 백병지왕(百兵之王)이라 했다.”
“······.”
“곤은 창에서 날이 빠져버린 아류일 뿐이지.”
어느새 피처럼 붉게 물든 추이의 시선은 곤귀의 눈알에 박혀 그 안쪽의 뇌까지 꿰뚫고 있었다.
“마치 이빨이 다 빠져서 사도련의 개로 전락한 네놈처럼 말이야.”
“개새끼가!”
곤귀가 역린을 곤두세웠다.
터-엉! 까가가가가각!
힘겨루기를 하고 있던 창끝과 곤끝이 서로 엇갈려 지나간다.
동시에.
······! ······! ······!
서로의 끝이 서로의 지척을 파고들었다.
···퍼억!
한 끝은 닿았으되, 한 끝은 닿지 못했다.
불과 한 끗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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