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곤귀(棍鬼) (2)
14-
밤하늘의 한 허리와 같은 머릿결, 백옥처럼 흰 피부, 반달 모양의 검은 눈썹, 호수처럼 크고 맑은 눈과 별빛 같은 눈빛.
마주한 상대를 절로 조신하게 만드는 옥안(玉顔)이다.
······그래서일까?
퉤-엣!
곤귀가 내뱉은 가래침이 호예양의 얼굴 정중앙에 떨어졌을 때,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예의범절의 영역을 떠나, 무가지보(無價之寶)가 훼손당하는 것을 본 이들이 보일 법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주르륵-
누런 가래침이 호예양의 이마를 따라 흘러내렸고 이내 오똑한 콧날 밑으로 길게 늘어진다.
곤귀는 그것을 보며 허허 웃었다.
“꼭 콧물을 흘리는 것 같구나.”
“······.”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도 힘이 없으면 이렇게 안 맞아도 될 침을 맞는 법이란다, 아해야.”
순간.
채앵-
옆에 있던 호연암이 칼을 뽑아들었다.
그의 눈에서는 들불과도 같은 분노가 활활 휘몰아치고 있었다.
“혈사를 일으키기 위해 온 것이라면, 나는 끝까지 항전하리다.”
“허허허- 감당 가능하겠소?”
“감당 못해도 해야지. 아비가 보는 앞에서 딸이 치욕을 겪었는데.”
호연암이 씹어 내뱉듯 말을 이었다.
“밖으로 나오시오. 괜한 사람 휘말려들지 않게.”
“밖으로 나갈 필요나 있을까 모르겠군. 그냥 여기서 합시다, 문주,”
곤귀 역시도 자신이 들고 왔던 검은 장대를 움켜쥐었다.
호연암과 곤귀의 시선이 한 곳에서 마주치고 있었다.
그때.
“칼을 거두시지요, 아버님.”
호예양이 입을 열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들어 얼굴에 묻은 가래침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아까보다 더 맑은 미소를 띤 표정으로 술병을 들어올렸다.
쪼르륵-
곤귀의 잔이 차오른다.
호예양은 그 잔을 곤귀의 앞으로 내밀었다.
“좋은 가르침 감사합니다. 이것은 수업료입니다.”
“네 얼굴에 침을 뱉은 자에게 술을 따라주느냐? 무가의 여식이 작부도 못할 짓을 하는구나.”
“제 얼굴에 침 뱉은 놈에게 자존심도 없이 아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고의 경지에 도달하신, 그리고 그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부단하게도 노력하셨을 선배님께 드리는 경의의 뜻입니다.”
“같은 말인 것 같긴 한데, 미묘하게 다르긴 하구나. 그러니까, 좆빠지게 수련해서 그 힘을 손에 넣어놓고 기껏해야 하는 짓이······ 고작 너처럼 어린 계집아이 얼굴에 침이나 뱉는 거냐, 뭐 그런 뜻이렸다?”
“소녀의 말재간이 미천하여 오해는 하실 수 있으나, 곡해는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호예양은 생긋 웃으며 술잔을 향해 눈짓했다.
“그래서. 안 드실 건가요?”
“허허허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하는 호예양의 배짱에 곤귀조차도 혀를 내둘렀다.
그는 호예양이 따라준 술잔을 쭉 들이켰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호연암을 향해 일어나 포권을 취해 보였다.
“방금의 무례는 내 사과하겠네. 그러니 문주도 칼을 거두시게.”
“······.”
“내가 문주 체면 세워드리는 게야. 그러니 문주도 내 체면을 세워 주시게나. 서로 이쯤하지.”
말을 마친 곤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장대를 뒤로 내던져 버렸다.
쿵-
검은 장대가 바닥에 떨어지자 묵직한 소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른다.
호예양이 호연암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호연암은 긴 한숨 끝에 칼을 거두었다.
곤귀는 언제 기세를 일으켰냐는 듯, 그런 호연암을 향해 웃어보였다.
“여식이 아주 재기발랄하구만. 키우는 맛이 나겠어. 어떤가? 나 같은 사위는?”
“장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위가 어디 있소?”
“하긴- 그것도 그래. 아깝구나.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날 것을. 한 오십 년 정도만.”
곤귀는 턱수염을 쓸며 탄식했다.
이윽고, 그는 문득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참. 잊을 뻔했군.”
“?”
호연암이 고개를 들자 곤귀가 능글맞은 어조로 말했다.
“뭐, 아무튼 간에. 흑도방이 원래 냈어야 할 상납금을 못 걷어가게 되었으니 내 신세가 참 말이 아니야.”
방금에야 생각났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있지만.
“이대로 빈손인 채 련에 복귀했다가는 련주가 나를 호되게 질책할 걸세. 어쩌면 볼기짝을 맞게 될지도 몰라. 허 참. 두 손이 너무 가벼워.”
사실 이것이 곤귀의 본론이다.
돈. 상납금.
그것이 오늘 곤귀가 호정문에 찾아와 깽판을 치고 있는 목적인 셈이다.
곤귀의 눈에서 다시끔 시퍼런 불빛이 흘러나온다.
“이곳 안휘성 내에는 흑도방 만한 규모의 사파가 없으이. 이미 자잘한 곳들을 한번 쭉 훑기는 했는데······ 목표액을 맞추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더군.”
“그래서, 저의가 뭐요?”
“흑도방이 사라져서 돈을 못 받아가게 생겼으니 별 수 있나. 흑도방이 사라져서 이득을 보게 될 정파의 대협들 호주머니에서 걷어가는 수밖에.”
곤귀가 호연암을 향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이오. 나는 흑도방을 누가 몰살시켰는지, 조가장을 누가 멸문시켰는지는 관심 없으이. 목표로 한 액수만 맞춰 가면 돼.”
“······.”
“내가 아까 문주의 체면을 세워주었으니, 문주도 내 체면을 좀 세워주시게나.”
호연암은 미간을 찡그린 채 곤귀를 쏘아보았다.
“정파 소속 문파들에게 상납금을 걷으시겠다 이거군.”
“상납금이라니. 위로금이지. 우리 말을 서로 곱게 하기로 합시다, 문주.”
“그 위로금. 안휘성의 정도(定道)를 상징하는 남궁세가에도 청구하셨소?”
“거길? 미쳤나? 나는 돈 받으러 온 거지 찢겨 죽으려고 온 게 아니야.”
곤귀는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느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호정문이 표행으로 돈을 쏠쏠하게 벌었다지? 그 정도면 불쌍하게 죽어간 흑도방도들에게 낼 조의금으로 딱 적당하겠군. 상납금을 받으러 이 먼 곳까지 와서 몇 번이나 헛물을 켠 나에게도 심심한 위로가 되겠어.”
“······줄 수는 있소. 다만 시간이 필요하오. 표행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이들에게 줄 위로금을 먼저 제해야 해서.”
“무릇, 시간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부족한 법이야. 그대에게 시간이 없듯, 내게도 시간이 없네.”
곤귀의 태도는 완강했다.
시간을 벌어 보려는 호연암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호연암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만약 곤귀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이곳 호정문의 식솔들은 오늘 밤 안에 몰살당한다.
근처에 있는 남궁세가에 도움을 청한다고 해도 시간이 없을뿐더러, 남궁세가에서 제대로 도와줄지도 의문이었다.
결국.
“······대금을 모두 가져와라.”
호연암은 호정문의 문주로서 이런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윽고, 표사들이 이번 표행으로 받은 대금을 들고 왔다.
호연암은 이를 꽉 악물었다.
“대금을 넘길 테니 우리 호정문의 식솔들은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시오.”
“허허- 이거 왜 이러나, 문주? 내게도 과년한 딸자식이 있어. 그리고 그 돈을 안 주었어도 호정문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을 것일세. 자발적으로 위로금을 주는 것치고는 기세가 너무 날카롭구만. 뭐, 어찌되었든 간에, 고맙게 됐네.”
커다란 가죽 자루 안에 담긴 돈을 보며 곤귀는 히죽 웃었다.
짤랑- 짤랑- 짤랑- 짤그랑-
돈 세는 소리가 장원 안에 요란하다.
이윽고, 곤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셈이 딱 맞는군.”
그리고는 자루 속에서 금원보 하나를 집어들어 던졌다.
···땅그랑!
곤귀가 던진 금원보는 호예양의 술상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어따, 아가. 아까 침 뱉은 값이다.”
“······.”
호예양은 금원보를 쳐다보지 않았다.
다만 곤귀를 향해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을 뿐이다.
“그럼. 잘 위로받고 가네, 문주.”
곤귀는 껄껄 웃으며 죽립을 덮어썼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장대에 돈자루를 걸치고는 정문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태연하고도 여유로운 태도였다.
* * *
휘이이이잉-
호정문의 장원에 찬바람이 분다.
연회가 끝나고 난 자리는 비참했다.
절뚝이는 파장(罷場).
방문객들은 모두 조용히 돌아갔다.
빈 자리에는 호정문의 식솔들만이 남아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소.”
호연암이 아내 사지원과 딸 호예양을 데리고 내실로 돌아간 뒤, 다른 식솔들 역시도 뿔뿔이 제 보금자리를 찾아 흩어졌다.
돌아가는 인파들 속, 마굿간지기들은 마굿간으로 가며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들었어? 아까 그 땡중 별호가 곤귀래. 엄청 무서운 무림인인가 봐.”
“아까 표사들이 얘기하는 거 들었는데, 그 노인네 혼자서 여기 모인 사람들 전부를 죽일 수 있었다더라.”
“돈 주고 끝나길 천만다행이야. 사람 목숨이 제일 아니겠어?”
“나는 그 땡중 처음 봤을 때부터 무서웠어. 풍기는 분위기가 어째 인간백정 느낌이 딱······”
그때, 마굿간지기 소년들 사이에서 우동원이 튀어나왔다.
“그 자식 어딨냐!?”
그는 옷자락에 남은 떡과 고기들을 바리바리 싸온 상태였다.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반색했다.
“와! 대장! 그걸 언제 싸왔어?”
“자리가 파투나서 더 못 먹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다!”
“역시 우리 생각해 주는 건 대장 뿐이야!”
“어서 이리 와! 다 같이 나눠먹자!”
하지만. 우동원은 모여드는 소년들의 궁둥이를 향해 연신 발길질을 날렸다.
“니네 말고! 추이 어딨냐고!”
우동원은 손에 떡과 고기를 든 채 추이를 찾았다.
“추이야! 내 사랑 추이야! 너 어디로 갔니!?”
그는 아까 전에 곤귀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하마터면 고수를 몰라보고 함부로 대했다가 개값도 안 나올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그것을 막아준 것은 바로 자신이 무시하고 홀대했던 추이였다.
‘너는 이 꼬맹이에게 평생 감사해하면서 살거라.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으니까.’
곤귀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서늘하다.
만약 추이가 용감하게 나서서 그의 손을 가로막아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자식 추이! 너 알고 보니 싸나이였다! 나도 싸나이니 은혜를 알거든! 이 떡이랑 고기 너 다 먹어라! 으응?”
우동원을 비롯한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얘 어디 갔지?”
“어? 아까까지만 해도 여기 있었는데?”
“······뒷간에라도 갔나?”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던 추이가 그새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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