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곤귀(棍鬼) (1)
13-곤귀(棍鬼) (1)
한편.
추이는 말석에 앉아서 조용히 밥과 술을 먹고 있었다.
“······.”
식사를 하는 중에도 정신은 온통 심상세계 속에서 들끓고 있는 내공에 집중되어 있다.
[추워······]
[뜨거워······]
[여기서 꺼내줘······]
[제발 나를 풀어줘······]
[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잘못했습니다용서해주세요······]
조가장을 멸문시키는 과정에서 새로 얻은 창귀들.
그들은 단전 속의 심연 한가운데 우글우글 모여 울고 애원하고 웃어댄다.
그중 가장 깊은 곳에는 조양자의 창귀가 들어앉아 있었다.
‘과연 일류고수답군.’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추이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내공을 뽑히면서도 반항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과연 지금껏 사로잡은 창귀들 중에 가장 강한 존재다웠다.
하지만 추이는 조금도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그래봤자 며칠도 채 못 버틸 것이다.’
창귀칭이 만들어낸 내공의 심연은 너무나도 춥고 고독한 곳.
지금의 조양자는 추이를 향한 증오를 불태우며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겠지만······ 아마 곧 자신을 예뻐해 달라고, 꺼내어 부려 달라고, 제발 이 춥고 어두운 곳에서 잠시라도 꺼내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지.’
추이는 자신의 몸 상태를 다시 한번 점검했다.
일주천(一周天).
몸에 흐르고 있는 시뻘건 내공을 정수리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한 바퀴 돌리자, 비로소 신체 전부가 온전히 추이의 통제 하에 들어왔다.
굴각(屈閣) 10층.
이로써 굴각의 열 계단을 모두 올랐다.
이제 추이의 앞에는 크고 거대한 문이 보인다.
온통 해골과 혈관으로 이루어져 있는 무시무시한 문.
이올(彛兀).
상위 단계로 통하는 이 문을 열고 고통과 증오만이 넘실거리는 다음 층계를 내딛어야만, 비로소 창귀칭의 숙련자라고 칭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 이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지.’
그것이 바로 추이가 이 잔칫상에 참석한 이유였다.
이올의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임독양맥을 뚫어야 한다.
그걸 위해서는 특정 자리의 혈을 뚫어 몸에 흐르고 있는 기존 피의 절반을 빼내고 그 자리를 영약의 기운으로 대체해야 했다.
당연하게도 외부인의 도움이 없으면 해낼 수 없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생사를 헤쳐온 추이는 이 과정을 혼자서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 과정에 필요한 영약 등을 시간 내에 구하기 위해서라면 남의 손을 빌릴 필요가 있다.
‘주예화 표두랬던가?’
추이는 상석에 있는 주예화 표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시던 술을 내뱉으며 연신 콜록거리고 있다.
보아하니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챈 모양.
추이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술에 댔다.
그러자.
“헙!”
주예화 표두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왜지? 왜 은인께서 저런 자리에 계시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주예화 표두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따악!
추이의 머리가 갑자기 앞으로 팩 숙여졌다.
우동원이 손으로 추이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인마, 형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딜 봐!”
“막내 놈이 벌써부터 빠져가지고!”
“똑바로 안 해? 내 잔이 비었잖아!”
술이 좀 들어간 마굿간지기 소년들이 추이를 괴롭힌다.
불콰하게 술이 오른 우동원이 주먹으로 추이의 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어차피 좀 있음 떠날 뜨내기라고 해도. 어? 그 동안만이라도 예쁘게 좀 굴어라. 알겠냐? 맞기 싫으면 정신 바짝 차리라고.”
당연히, 그것을 보고 있는 주예화 표두는 안절부절 좌불안석이었다.
“저, 저, 저 미친놈들이!”
“네? 무슨 일이십니까?”
“아, 아닙니다 아가씨!”
“······?”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러버린 주예화 표두의 시선을 따라 호예양이 고개를 돌린다.
주예화 표두는 그런 호예양의 시선을 다시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바로 그때, 시기적절하게 다른 누군가가 호예양의 이목을 끌었다.
똑똑똑똑똑똑······
청명하게 울려퍼지는 목탁 소리.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중 하나가 잔칫상 말석에 홀연히 서 있었다.
그는 챙이 너덜너덜한 죽립을 깊이 눌러쓰고 손에는 거무칙칙한 장대 하나를 지팡이처럼 짚고 있었다.
입고 있는 분소의(糞掃衣)는 하도 낡고 헤져서 넝마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호예양이 합장을 하며 말했다.
“스님. 어떻게 오셨는지요?”
그러자 중이 웃었다.
“소인은 중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객이오. 보아하니 댁에 경사가 난 듯한데, 실례가 안 된다면 밥 한술 얻어먹고 갈 수 있겠소?”
“그럼요. 얼마든지요.”
호예양은 기꺼이 자리를 내주었다.
그때.
저벅- 저벅- 저벅-
중이 거침없이 잔칫상의 위쪽으로 향했다.
그는 일언반구 말도 없이 가장 상석에 털썩 앉아버렸다.
그리고는 눈앞에 있는 떡과, 밥, 술을 마구 집어먹기 시작했다.
“이것 참, 맛있구려. 벌써 몇 끼를 굶었더니만. 어험- 어험-”
고기산적을 쩝쩝 우물거리고 있는 중의 모습에 주변에 있던 귀빈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호정문주 호연암이 점잖게 말했다.
“스님.”
“나는 중이 아니외다. 목탁은 그냥 오다가 주운 거고.”
“예, 그러시군요. 아무튼 간에, 객(客)들을 모시는 자리는 이쪽이 아닙니다.”
“그렇소? 그럼 어디요?”
“저쪽에서 드시면 될 것 같군요.”
호연암은 잔칫상의 말석을 권했다.
그러자 중은 혀를 찼다.
“저쪽은 하인들이나 앉는 말석 아니오?”
“딱히 신분에 따라 나눈 것은 아닙니다. 음식도 똑같지요.”
“허허- 참. 그래도 사람 기분이라는 것이 있지. 에이, 알겠소이다. 음식이 똑같으면 됐지 뭐.”
중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트림을 한번 길게 했다.
그리고는 어기적 어기적 걸어서 말석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 옆에는 우동원이 있었다.
“아니, 뭔 땡중이 고기를 저렇게 우걱우걱 먹는다냐? 어휴, 냄새는 또 왜 이렇게······”
중이 옆으로 앉아 떡과 고기를 죄다 먹어치우자 마굿간지기 소년들의 눈총이 사나워졌다.
우동원이 대표 격으로 말했다.
“이봐, 땡중. 우리 문주님이 사람이 좋으셔서 끼워주는 거야, 감사하게 생각해. 솔직히 중이 아니라 거지 같기는 한데. 에이, 원래는 몰매를 줘서 쫓아내야 할 놈인데. 어쿠- 냄새야. 악취로 사람 잡네 아주.”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중이 껄껄 웃었다.
“고놈 아주 맹랑한 놈이구나. 이리 잠깐 와 보련?”
중은 우동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동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 손을 쳐내려는 순간.
“뭐 하나?”
중과 우동원의 사이를 가로막는 손이 있었다.
추이가 무심한 얼굴로 중을 바라본다.
우동원의 앞을 가로막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추이를 보며, 중은 또다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오호? 내가 뭘 하려고 하는지 눈치 챘나?”
“······.”
“감이 좋은 아이구나. 싹수가 밝아. 허허허-”
이윽고, 중은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추이의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우동원에게 말했다.
“너는 이 꼬맹이에게 평생 감사해하면서 살거라.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으니까.”
“뭐라는 거야, 저 씨팔 땡중이?”
중의 말을 들은 우동원이 새끼손가락을 들어 귀를 후볐다.
바로 그때.
벌떡-
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자, 다들 들으시오!”
쩌렁쩌렁 울려퍼지는 목소리는 말석뿐만 아니라 가장 상석에 있는 이들의 시선까지도 끌어모으기에 충분했다.
내공이 섞여있는 고함.
몇몇 이들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중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자-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푸짐한 자리에 끼워주셔서 감사하외다. 다만 말이오,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는데······ 그건 바로 술이 차갑다는 것이오. 술이 차면 배가 차게 되고, 배가 차면 배탈이 나기 십상이니, 이런 쌀쌀한 날씨에는 더운 술을 마셔야 인지상정 아니겠소이까?”
너덜너덜해진 죽립 사이로 중의 눈이 파랗게 빛난다.
“이 구모씨가 여기 모인 영웅호걸들께 따듯한 술 한 잔씩 올리겠소이다.”
이윽고, 중의 손가락이 탁자에 올라갔다.
동시에.
드드드드드드드······
긴 탁자 전체가 옅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탁자 위에 놓인 모든 술잔들에서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부글······
술잔이 뜨겁게 달아오르는가 싶더니 안에 든 술들이 모두 펄펄 끓기 시작했고 이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탁자 위의 다른 음식들은 모두 그대로였고 술잔에 든 술들만 싹 다 사라졌다.
모든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가운데, 중만이 너털웃음을 짓고 있었다.
“어이쿠. 정말로 건배(乾杯)를 해버렸군. 좋은 술을 다 말려버려서 이걸 어쩌나?”
침묵.
절정(絕頂)에 이른 무림고수의 기예를 눈앞에 두고 모두들 말이 없다.
당연한 일이다.
절정고수란 무엇인가?
셋만 모여도 한 성을 하룻밤만에 핏물에 잠겨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무인들.
지고의 영역에 한 발을 디뎌놓은 절대강자들.
그런 존재가 대놓고 기세를 발현하고 있으니,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의 목숨줄은 그에게 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윽고 호정문주 호연암이 입을 열었다.
“혹시 주 표두의 금패를 소지하신 분이십니까?”
“아닙니다 문주님. 저 분은······ 제가 만났던 분이 아닙니다. 저도 처음 봅니다.”
옆에 있던 주예화가 간신히 목소리를 짜냈다.
그때. 중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죽립을 벗었다.
뒤로 쓸어넘긴 회색의 머리칼, 쭈글쭈글 주름진 노인의 얼굴.
흰자밖에 보이지 않는 작은 눈과 콧잔등을 길게 가로지르고 있는 흉터 자국이 인상적이다.
중은 자기를 소개했다.
“나는 사도련에 몸담고 있는 수금귀(收金鬼)요. 한때는 ‘곤귀(棍鬼)’라는 별호로도 불린 적이 있소만. 허허.”
그 말을 듣는 순간, 잔칫상에 모인 모든 이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곤귀 구강룡.
그는 한때 무림을 독보하던 쌍귀(雙鬼)의 일인으로 일약 유명세를 떨쳤었다.
하지만 어느 날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사도련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사도련주와의 비무에서 패한 뒤부터는 사도련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주로 상납금이나 이자 혹은 원금을 제때 바치지 않는 조직을 찾아가서 채무를 독촉하거나 수금을 해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홀짝-
곤귀는 술병에 담긴 더운 술을 자신의 잔에 따르고는 그것을 들이켰다.
“흑도방이 망했더군.”
청중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다.
곤귀는 계속해서 술을 홀짝였다.
“그놈들이랑 붙어먹던 조가장도 망했다지?”
곤귀의 서슬퍼런 시선이 잔칫상을 훑는다.
“그럼 가장 이득을 보는 곳이 어디일까? 잔칫상까지 벌여가면서 이 상황을 기뻐하는 놈들이 어떤 놈들일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더란 말이지.”
잔칫상 위의 푸짐한 요리들을 핥아올리던 곤귀의 시선이 호정문주 호연암의 얼굴에서 멈췄다.
“그래서 오늘 몇 군데 좀 들렀다 오는 길이오. 여기 호정문이 마지막이고.”
“······저희들은 흑도방과 아무런 인연이 없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오늘 밤은 아무 일 없을 것이니 편히들 숟가락 드시오.”
곤귀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호연암의 옆에 있는 호예양을 향해 옮겨갔다.
“······흠, 그나저나. 과연 그럴 만 하구나.”
“?”
호예양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곤귀의 시선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배님?”
“조가장이 호 소저의 미모를 탐하다가 사달을 맞았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럴 만 하다고. 문파 한두개쯤은 너끈히 망하게 만들 외모야. 허허허- 아주 예뻐.”
면전에서 대놓고 이루어지는 외모 품평.
호예양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고민하는 순간, 일이 벌어졌다.
곤귀가 호예양을 향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리고는.
퉤-엣!
그녀의 얼굴에 걸쭉한 가래침을 뱉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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